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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불쌈꾼 백기완 선생과 함께 한 163일!

참어른들의 투쟁으로 대한민국의 변화가 가능했다!

등록|2017.12.20 11:04 수정|2017.12.20 11:39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 한 편을 먼저 소개한다. 1980년대 처음 이 시를 만나고 무언가 모를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고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곧장 그 감동을 오래 기억하고자 200자 원고지에 옮겨보았을 때 23장이나 되는 상당히 긴 시였다.

이 이야기를 만나기 전 시를 만나라는 이유가 있다. 의도와 다르게 또 다시 사설이 조금 길어지긴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 싶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슬그머니 많은 행사에서 축시(祝詩)가 사라졌다. 어지간한 단체에서 발간하는 책에도 반드시 '권두시'란 이름으로 자리하던 시의 자리가 사라졌다. 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부분 시가 상당히 대접을 받았고, 그 증거로 거의 모든 행사에서나 단체들이 발간하는 책에 청탁을 하여 실었음으로 증명된다.

앞으로 이 문화를 다시금 되살려 우리의 감성을 살찌우는 운동을 전개하면 좋겠다.

이 시는 백기완 선생께서 1980년 12월 지으신 걸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후에 지으셨을 수도 있으나 그리 생각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선생의 시집 '젊은 날'에 수록된 걸 처음 만났으니 말이다. 더구나 더 기억의 갈피에 처연하게 자리하게 된 까닭은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란 부제 때문이다.

묏 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 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 몸만
맴돌라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 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타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데나 내다 버려질지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다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협잡의 명수 정치꾼들은 죄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 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 터지는 소리
쩡, 쩡, 그대 등때기 가른 소리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치는
주인 놈의 모진 매질소리라

천추에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쭉소리라
차리라 그 소리 장단에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 그려
얼은 땅, 돌 뿌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쭉을 나꿔채
그 힘으로 어영차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 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 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 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 걸로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 걸로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 넣고 아…

더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 인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 자들의 짓이라

그 사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은 여보게 아예 그대 몸에
한 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 난 잿더미 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어
뿌려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 짓은 버들가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 목지 몸짓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그렇지
싸우는 현장의 장단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벌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신부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한 춤꾼은 비로소 구비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저 비록 이름 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쳐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 자들의 거짓된 껍줄을 털어라
이 세상 껍줄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오, 우리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몸으로 디리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위에
희대를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 땅의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

잠시 이 '젊은 남녘의 춤꾼'이란 부분에 대해 먼저 언급하겠다. 그렇다고 고향이 바다가 멀지 않은 고장이긴 하지만 경남이나 전남과 같은 남도 바닷가는 아니다. 처음 이 부제를 젊은 남녘의 춤꾼이 아니라 젊은 날의 춤꾼으로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부터 밝히며, 그에 따라 이제는 세상에 두 분 모두 안 계시지만 내 부모님이 지금의 나보다 한참 젊으셨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와 헤어졌던 여섯 살 어린 나이의 눈에 비쳤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묘하게 온통 하얀 빛과 화사한 꽃이 연상되었었다. 하얀 소복으로 단장을 하신 어머니의 춤사위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아마도 춤사위가 좋으셨던 까닭에 마을 잔치에 종종 불려가 아버지께서는 장구를 치시고, 어머니께선 춤을 추신 걸로 기억되는데, 종종 연세가 지긋하신(이젠 더러 돌아가신) 어르신들께서 "그래, 아직 엄마 소식은 모르고?"라 물으시곤 이내, "네 엄마가 놀기도 잘 놀고 춤도 잘 췄제. 이런 기특한 자식들을 두고… 그래 보고 싶지도 않은지…"라며 말끝을 흐리곤 하신 걸로 미루어 보면 틀림없다.

80년대를 넘으며 이젠 산촌에서도 '꽃반'(성주굿을 할 때 집주인은 작은 상에 백지를 깔고 나서 쌀을 부어놓거나 열 되들이 말에 담아서 올려놓고 돈을 꽂을 때도 있으며, 하얀 쌀밥 한 주발에 식구 수대로 수저를 꽂고 명(命)이 길게 해달라며 실타래를 걸쳐두기도 하는 것)을 차리고 비는 모습을 만나지 못하지만, 이 두 손을 모아 비는 손빔의 은덕으로 자식들은 키워졌다고 생각한다.

정주(부엌을 다른 말로 이리 부르기도 했고, 혹은 정지라고도 했다)에서 성줏굿을 하며 징소리에 맞춰 구성지게 풀어내던 벽사진경(辟邪進慶)도 이젠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요즘 어느 자리에서건 성주굿이나 대잡기란 말을 하면 미개인으로 보거나, 별세상 이야기를 하는 좀 모자란 사람 정도로 취급 받기도 한다. 세상이 달라진 건가?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분명 내 어려 알던 이들이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데 바라보는 시선들은 분명 달라졌다.

태반이 부모님과는 달리 기독교를 믿는 젊은이들이 많다보니 부모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면 자신들의 신앙관에 위배된다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 간절한 손빔의 행위 자체, '비나리'를 미신이라 치부하여 터부시하는 경우를 만난다. 그들 스스로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이 간구하시던 하늘님과 삼신할매를 부정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이방신인 예수를 통성으로 부르며 간절히 빌고 있음에 이리 변했다. 내 부모의 은덕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에 대해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개신교를 믿는 쪽에서는 '종교'라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당황케 한다. 그들은 종교라면 불편하게 생각하고 '신앙'이란 말로 바꿔 표현한다. 그렇더라도 유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개신교가 언제부터 이 땅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이토록 조상들의 면전에 우상숭배니 하는 억지를 부릴까.

백기완 선생님불쌈꾼(혁명가) 백기완 선생께서 2016년 12월 30일 광화문광장차일마을에 문을 연 <광장미술관 궁핍>에서 축사를 하고 계신다. ⓒ 정덕수


백기완 선생께서는 정말 간절한 염원으로 올곧게 우리의 정신을 지키고 살려내시려 하셨다. 선생님을 지난 겨울 매주 토요일에 뵙고, 그 외에도 수시로 광장에 나오시는 모습을 뵈면서도 어떤 종교를 가지셨는지는 솔직히 여쭤 본 적도 없다. 아니 모른다는 말이 옳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분은 그 어떤 종교인보다 더 치열하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비나리를 하셨다. 그 어떤 신앙보다 더 깊고 융숭하게 노동이 밝게 웃을 날을 염원하고 간구하셨다.

선생께서 박근혜 정권을 촛불의 힘으로 끌어내리고 난 열흘 뒤, 2017년 3월 20일 '광화문캠핑촌 넉 달 보름 해단식' 여는 덕담을 부탁드렸을 때 말씀하셨다.

"송경동이 고생했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되도 않은 캠핑촌이 뭐냐며 채얄마을이라고 하랬어. 그런데 말을 안 듣고 끝까지 캠핑촌이래. 그래서 맘에 안 들어. 채얄이 뭐냐. 잔치판이 벌어지면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 그 노는 자리에 치는 가리개가 채얄이야. 앞으로 잊지 말고 채얄마을이라고 해."

어느 고장의 방언인지 확인해 본 적은 없다. 분명한 건 채얄이란 선생의 말씀이 '차일'의 방언인 모양이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고 우리 문화를 지극히 아끼시는 선생의 진정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말씀이다. 물론 송경동 시인을 나무라고자 하신 말씀도, 진정으로 미워서 나무라시는 모습도 아니셨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광장에서 넉 달 반이란 긴 시간을 함께한 이들이 해단식을 치르는 자리에서의 모습은 차후에 별도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다. 그 자리엔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해왔던 노동자들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들,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까지 함께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불쌈꾼 백기완 선생박근혜 탄핵을 기다리며 진행된 제16차 박근혜퇴진 비상국민행동 집회의 또 다른 프로젝트 중 하나인 <미슬행동 9차 "Over the Wall" "촛불광장 Project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류연복 작가가 백기완 성생의 <비나리>를 현장에서 썼다. 이날 광장으로 설치작업이 진행될 때 장경호 화백의 수행을 받으시며 백기완 선생께서 오셨다. 신학철 화백의 대작 <금강>이 전시된 날이기도 하다. -사진 왼쪽부터 장경호화백, 백기완 선생, 류연복 화백 ⓒ 정덕수


그곳에서 늘 <묏 비나리>의 의미를 헤아리며 움직였다. 딱 한 발 띠기에 온 맘을 다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생각, 그것은 혁명가를 순우리말로 불쌈꾼으로 명명하신 백기완 선생의 사상이고 정신이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불쌈꾼 백기완 선생과 함께하는 이들이 어찌 나약하겠으며, 그까짓 추위 정도에 굴복하겠는가.

백기완 선생을 비롯하여 환갑을 넘긴 이들도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정규 촛불집회가 개최되는 토요일은 물론이고, 3·1절과 같은 기념일이나 광장에 설치한 극장과 미술관의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힘을 실어주셨다.

신학철 화백은 물론이고 장경호 화백과 김준곤 화백 등 전두환 정권시대에 민중미술을 대표하던 분들과 2세대 민중미술을 이끌어 온 분들까지 항상 조용히 참석하셨다. 거기에 여태명 서예가와 정고암 서예가 등 각 분야의 일가를 이룬 대가들께서도 어김없이 광장에 나오셨다. 실로 백기완 선생의 불쌈꾼으로 명명된 엄혹한 군부독재시대의 혁명가요 투쟁가들이 모두 광장의 주인으로 나서신 것이다.

그 분들 모두 마지막 심장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동토에 새싹이 파릇하게 돋듯 민주주의가 완착되는 순간을 이끌어 내시려는 딱 한 발 띠기에 일생을 걸으셨다.

광장차일마을의 대부분 집회와 다양한 행사들이 해직노동자들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에 의해 기획되고 진행되었지만, 민족미술협회에 소속되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오래전부터 독제정권을 타도하는데 앞장 선 미술계 인사들은 김준권 화백을 주축으로 하여 활동했다. 이 활동은 '광화문미술행동'이라 명명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2017년 3월 11일은 전날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이 있었고 제19차 박근혜퇴진 비상국민행동 집회가 진행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은 여기에 맞춰 <미술행동 제 12차 "Over the Wall"> 행사에 두 개의 슬로건으로 설치미술을 선보였다. 하나는 <"촛불광장 Project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합니다">로, 또 하나는 <"헌법 제1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게 나라다!!">란 슬로건으로 진행됐다. ⓒ 정덕수


1차부터 4차에 이르는 <차벽공략 프로젝트>가 있었고, 경찰의 차벽이 광장에서 멀어진 시점부터 시작된 총 6차례 동안 진행된 <차벽 넘어 광장으로 프로젝트>와 5차례에 이르는 <촛불광장 프로젝트>까지 촛불시민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미술세계를 펼쳐보였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광화문미술행동의 참여작가로 활동했다. 여수에서 작품을 싣고 오가다 차에서 쪽잠을 자면서 끝까지 많은 작품으로 광장을 채우셨던 최병수 조각가도 있었다. 그리고 진천과 안성에서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달려오시곤 했던 김준곤 화백과 류연복 화백도 토요일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활동들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토요일 아침이면 가장 먼저 아침식사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에 인사동 나무화랑의 김진하 대표의 디자인으로 완성되어 도착한 대형걸개그림들을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항상 평소와는 다르게 하루 일정이 진행되었다. 광장 중심에 설치된 대형걸개그림들을 철수까지 마치고 늦은 저녁식사를 해야 되었지만, 촛불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이는 시점과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함께한다는 보람이 있었다.

어떤 일에나 양면성이란 건 존재한다.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다름을 틀림으로 주장하면 난감해진다. 광장에서 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촛불이 밝혀지는 이유는 분명했다. 박근혜 정권의 소통의 부재뿐만 아니라, 무능함을 감추려는 부도덕함과 대한민국의 주체인 국민을 기망한 세력을 물러나게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모습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이 잘했다고는 생각 안 한다.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이제 이 정도로 했으면 됐다"는 주장 정도는 애교로 봐 준다 해도, "국가안보가 위중한 시기에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세력은 북한의 지령으로 움직이는 좌파들의 선동이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용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세력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국민들이 아니라, 태극기를 흔들며 <북한의 공작>이나 <친북좌파세력> 등의 지극히 위험한 사상검증방식의 용어들을 외치는 그들이라 확신한다.

2017년 3월 20일 오후 1시 치른 광장차일마을의 해단식 뒤로도 근 1달을 더 광장에서 봄볕에 꽃들이 피고 나무에 새순이 나오는 걸 봤다. 단풍 곱게 광장에 날리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 노숙을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마쳤다.아직 그 누구도 이 세상이 온전히 제 모양을 찾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르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법치주의도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이 사회가 공명정대하게 잘 맞물려 움직여진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명품조차도 식상하여 언제 새로운 상품이 나오느냐고 할 때 여전히 서민은 하루살이가 팍팍하다. 권력의 중심부를 기웃거리며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자들이 법의 온갖 틈새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때, 그 법에 의해 시련을 겪은 누군가는 여전히 세상의 눈 밖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에 불쌈꾼들이 광장에서 외친다. 여전히 고공에 올라 차디찬 새벽을 가르며 외치고 있다.

이만큼이나마 대한민국 사회가 변모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바로 백기완 선생과 같으신 참어른이 계셨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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