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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쭉삐쭉 솟은 굴뚝에 숨은 속뜻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19] 봉화(5) 거촌마을 옛집 굴뚝

등록|2017.12.24 16:56 수정|2017.12.24 16:56
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 굴뚝을 찾아 그 모양과 표정에 함축된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조선 중기 이후, 안동의 사족(士族)들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봉화에 들어왔다. 처가나 외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 연고 없이 무작정 들어오기는 쉽지 않다. 닭실마을의 권벌은 외가의 영향을 받았고 황전마을의 김흠은 아예 영양남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의성김씨 마을을 일궜다. 장인의 권유가 한몫한 경우도 있다. 거촌마을 광산김씨다.

거촌마을 정경 쌍벽당종택 동쪽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 정경이다. 가까운 쪽이 내거촌, 멀리 보이는 마을이 외거촌이다. ⓒ 김정봉


거촌마을은 내거촌(거촌1리)과 외거촌(거촌3리)으로 나뉜다. 내거촌은 광산김씨, 외거촌은 원주변씨 동성마을이다. 종택으로는 내거촌에 쌍벽당종택이, 외거촌에 수온당고택이 있다. 외거촌은 광산김씨의 외손이 많이 살아 바깥거촌, 외거촌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쌍벽당종택 소나무가 빼곡한 뒷산을 배경으로 그윽하게 자리 잡았다. 솟을대문 뒤에 사랑채, 사랑채를 중심으로 왼쪽에 안채, 오른쪽에 쌍벽당, 쌍벽당 뒤에 사당이 있다. ⓒ 김정봉


내거촌 입향조는 김균(1484-?)이다. 김균의 아버지 담암 김용석(1453-1523)은 무오사화를 피해 안동 풍천면 구담으로 낙향하였다. 무오사화를 보고 '진사는 몰라도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1505년경, 김균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거촌으로 들어왔다. 장인(丈人), 봉화금씨 금계(1439-1497)의 권유가 있었다.

김균이 잡은 터는 산세는 좋으나 뒷산의 기가 약하고 주변에 물이 없는 곳이었다. '물이 없으면 벼슬자리가 없다'는 속설이 있다. 굳이 이런 터를 잡은 이유는 뭘까. 벼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김균의 맏아들, 쌍벽당 김언구(1507-?)도 생원시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을 접고 소나무와 대나무, '쌍벽(雙碧)'을 벗으로 삼으며 선비의 길을 걸었다.

광산김씨 종택, 쌍벽당종택

마을은 어수선하다. '전통마을 관광자원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란다. 어수선한 골목을 지나 쌍벽당종택에 들었다. 산 아래에 있는 그윽한 집이다. '벼슬 못하는 자리'라는 말이 거짓말로 들릴 정도로 아름답다.

내 뒤를 급히 쫓아온 사람이 있었다. 18세손 김두순 종손이었다. 종손은 내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멀리서 부리나케 쫓아왔다고 한다.

내거촌마을 골목‘관광자원화 사업’으로 마을은 어수선하다. 외거촌은 바로 옆에 있으나 담으로 막혀 큰 길로 다시 나와서 가야한다. ⓒ 김정봉


집에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몸에 밴 것이다. 그는 집 구경은 나중에 하고 안채에 들라 했다.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만 한 것은 아니어도 배흘림기둥이 안채 지붕을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다. 대대손손 이 집을 떠나지 말라는 선조의 묵직한 당부로 보인다. 종손은 든든한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종가를 지키고 있다. 

육중한 기둥에 주눅이 잔뜩 들었다가 종손의 구수한 입담에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집안 내력에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쌍벽당, 사당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말솜씨는 타고나기보다는 많은 사람을 접객한 노련미에서 오는 것 같았다.  

쌍벽당 종손과 안채 기둥18세손 김두순 종손은 든든한 안채 배흘림기둥에 기댄 채 쌍벽당을 지키고 있다. ⓒ 김정봉


쌍벽당종택 안채육중한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있어 눈 맛이 좋다. ⓒ 김정봉


그는 '맨 처음 터 잡은 건 봉화다, 그때 닭실은 있지도 않았다'며 넌지시 어깨를 올렸다. '벼슬하지 말라'는 선조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남들은 대과를 몇 명 냈느니, 사마시를 몇십 명 냈느니, 집안 내력을 들먹이는데, 이 집 종손은 벼슬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였다.

쌍벽당종택 굴뚝

이런 집 굴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마당 구석에 있는 우진각지붕의 행랑채와 대문채 굴뚝은 모두 수더분하게 생겼다. 다른 굴뚝은 아늑하고 후미진 곳에 모여 있다. 안채와 쌍벽당이 양옆을, 사랑채가 앞면을 막아, 바깥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이다. 

사랑채, 안채, 쌍벽당에 하나씩, 세 개의 굴뚝이 있다. 쌍벽당 굴뚝은 쪽마루 밑에 내굴길(연도)이 있고 기단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는 기단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 굴뚝은 낮은 몸체에 긴 연통을 달았다. 향촌에 묻혀 살고자 한 선조의 생각은 이제 기단굴뚝으로 추억해야 하나 보다.

안채 굴뚝이 눈에 밟혔다. 눌은 이광정이 적은 쌍벽당 편액, '제가십잠(齊家十箴)'을 알고 온 터라 이 집 종부에 대한 마음이 더 쓰였기 때문이다. 제가십잠은 집안을 다스리기 위한 열 가지 지침이나 경계할 점을 적은 것이다.

쌍벽당종택 굴뚝아늑한 공간에 세 개의 굴뚝이 모여 있다. 사진 왼쪽, 쪽마루 밑에 토방이 살짝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쌍벽당 기단굴뚝, 기단굴뚝 앞에 있는 것이 안채굴뚝, 사진 정면에 있는 것이 사랑채 굴뚝이다. ⓒ 김정봉


아닌 게 아니라 부모를 섬기는 것은 기본이고 접빈객과 봉제사, 이웃을 생각하는 내용까지 열 가지를 지키기에는 종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종손은 달달 거리며 움직이는 종부가 꽤 안타깝게 보였을 게다.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플라스틱 연통이라도 높게 달아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겠지. 이 굴뚝은 종부에 대한 실속 있는 배려, 사랑으로 보였다. 

외거촌마을, 원주변씨 수온당고택

외거촌마을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상류 고급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색 꽃담과  붉은 벽돌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수온당고택이다. 최근에 지은 집처럼 보이나 안에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사랑채, 안채, 사당, 수온당까지, 30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몸채와 대문채는 대목장 신응수의 손을 빌렸다니, 후손의 인맥 또한 남달라 보인다.

외거촌마을 정경 구양서원 가는 길에서 본 외거촌마을 정경이다. 붉은 벽돌 굴뚝이 높게 서있는 집이 수온당고택이다. ⓒ 김정봉


수온당고택 정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채, 사랑채, 수온당, 대문채다. 집밖과는 달리 집안은 30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김정봉


원주변씨의 '거촌 입촌기'도 평범하지 않다. 거촌에 맨 처음 들어온 인물은 만취당 변영순(1523-1612). 1545년 일이다. 조부가 무오사화를 피해 안동으로 낙향한 후 봉화로 들어왔다. 1653년에 사당과 정침을 짓고 1713년에 수온당 변상훈(1678-1737)이 수온당을 지었다.

변상훈은 수온당에서 눌은 이광정(1674년생)과 권두응(1656년생), 권만(1688년생)과 교유하였다. 황전마을 도암정에서 교유한 사람 중에 도암정 주인 김종걸과 바래미마을의 팔오헌 김성구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권두응과 이광정은 여기에 다시 모였다.
    
수온당고택 굴뚝, 권위를 내세운 건가?

수온당고택은 바깥담을 꽃담으로 쌓았다. 암키와로 줄무늬를, 수키와로 반원무늬를 냈으며 빈 곳은 하얀 회칠을 하였다. 아랫집까지 이어진 꽃담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굴뚝도 꽃담과 마찬가지로 집주인의 개성을 드러냈다. 붉은색 바탕에 검붉은 벽돌을 섞어 높게 쌓았다. 세련되고 품위 있게 보인다.

수온당고택 안채 굴뚝두 개의 붉은 벽돌 굴뚝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 김정봉


수온당 굴뚝고택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높게 만들었으나 수온당 굴뚝만은 정자의 굴뚝답게 낮게 만들었다. ⓒ 김정봉


수온당 굴뚝만은 낮다. 정자, 서당, 서원 굴뚝처럼 낮게 만든 것이다. 두 개의 방, 와룡헌과 함양재에 하나씩 있다. 종손은 이따금 불을 때면 연기가 낮게 깔려 맵고 그을음으로 지저분해진다고 푸념 섞인 말을 하는데 선조의 뜻인 걸, 어찌하겠는가.

수온당 굴뚝을 제외하면 외거촌마을 굴뚝은 문중의 위세를 맘껏 뽐낸 굴뚝으로 보인다. 사화를 이유로 여기까지 물러났으나 이제 숨죽이며 뒤로 물러날 생각보다는 가문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 집주인의 생각 아닌가 싶다.    

거촌마을 집 원주변씨 집일까? 광산김씨 집일까? 붉은 벽돌 굴뚝집이니 원주변씨 집일거야. 문패를 보니 성이 변씨였다. 집은 수리중이나 담은 보나마나 수온당고택과 같은 하얀색 꽃담으로 쌓을 것이다. ⓒ 김정봉


집 담으로 나뉜 내거촌과 외거촌은 모두 거촌, 한마을이지만 생각은 달랐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굴뚝모양으로 보면 내거촌은 실속과 배려를 택했고 외거촌은 권위와 품위를 택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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