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50년 동안 강도짓 한 거야"
[서산개척단⑨] 반 백년을 품어온 빼앗긴 '내 땅'의 기록들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개척단원 하용복씨가 1968년 9월 가분배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기로 정리해 놓은 구획별 지도. ⓒ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1968년도에 땅을 가분배했어유. 그만큼 고생했으니까 이 땅을 그냥 주는 건 줄 알았쥬. 고생한 사람들은 다 주겠노라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주는 게 아니라 유상으로 다 사게 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어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산개척단을 처음 찾은 1962년부터 현재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개척단원 출신 성재용(74)씨는 자신이 일군 땅을 단 한 번도 남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열손가락 마디가 다 굽도록 정성을 쏟아 부은 땅이었다.
국가는 1992년 국무회의에서 아예 유상매각을 못 박았다. 돈을 주고 땅을 사라는 것이었다. 지루한 소송이 이어졌고, 모두 패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배포한 시행령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근거였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사례인 장흥 지역 개척단의 경우, 이 시행령이 적용돼 무상분배를 받았다. 개척단원 출신 이정남씨가 자신의 땅을 "억울한 땅"이라고 소개한 이유다.
'지옥'을 버틴 유일한 이유
이정남(78) : "가분배 받을 때는 내 땅인 줄로만 알았지. (국가에서 땅에 대한) 임대료가 나올 때까지는. 공무원들이랑 임대료 때문에 들판에서 막 싸우기도 했어."
정영철(76) : "청춘을 전적으로 바쳐서 만든 땅을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뺏겼다는 거여.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50년 동안 강도짓 한 거야."
'고생은 땅으로 보상한다'는 약속은 개척단의 존재 이유와 다를 바 없었다. 지자체와 관계 당국의 과거 문건 및 기록물 곳곳에서도 무상 분배의 근거를 담은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개척단원들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증거이자, 국가가 남겨둔 강제 노역의 흔적이었다.
대표적 증거는 1968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개척단원들에게 배부된 '농지가분배증'이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장의 명의로 배부된 이 증명서에는 토지 분배 대상자의 이름과 분배 면적, 대상자의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 남소연
분배증을 손에 쥔 개척단원들은 그제야 안심했다. 비록 미등기 상태인 가분배증일지라도 '내땅'을 미리 받았다고 믿었다. 이정남씨는 "내 땅인 줄 알았으니 내가 (가분배증을) 받은 것이고, 그 고생을 했으니 여태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용복씨는 1968년 9월 가분배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구획별로 빼곡히 지도에 기록해 놓기도 했다. 1966년 민정식 서산개척단장이 해임된 후, 개척단 관리를 넘겨받은 당시 서산군이 국가기록원 등에 남긴 여러 문건 속에서도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 있었다.
개척단원들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증거들
① <서산자활정착 사업장 농지 및 가분배 계획서> 충청남도가 서산군에 전달한 공문 일부, 1968년 3월 20일
- 현재의 일체 농지는 1968년 4월 30일까지 세대 당 1정보씩 무상으로 가분배 확정한다.
- 분배의 공평과 합리성을 기하기 위하여 관계 기관과 입주자 대표로서 농지위원회를 구성하되 의결권을 가진다.
- 가분배가 확정되면 군수는 농지분배증서를 수분배자에게 교부한다.
- 가분배에 관한 사항을 일체 당해 군수 책임 하에 시행한다.
② <서산자활정착사업장 농지 및 주택 분배위원회의록> 일부, 1968년 8월 26일
- 참석자 : 면장·지서장·사업장 측 주민대표 3명·동 지구 내 일반 대표 3명
- 회의 장소 : 서산군청 회의실
- 회의 주제 : 서산자활정착사업장 농지 및 가옥 가분배의 건
- 대상 : 기혼 112세대, 미혼 74세대, 총계 186세대
▲ 서산개척단 이정남씨 ⓒ 남소연
③ 중앙부처인 보건사회부가 충남도에 보낸 공문 중, 1970년 7월 21일
"본 농지는 당초 정착민의 자활을 위하여 국유지를 임대 정착민에게 가분배한 것"
④ 1960년대 중반 서산군에서 작성한 '서산자활정착사업장현황' 중
"농지를 분배하여 7년간이란 세월을 다만 이를 바라고 간신만고(艱辛萬苦)하여 온 입주계민(入住繼民)들의 숙원(宿願)을 풀어주고자 함. 만약 아무 대가 없이 이를 요구한다면 이들의 꿈은 깨어질 뿐 아니라 커다란 파동(波動)이 야기될 것으로 사료됨."
뿐만 아니었다. 같은 시기, 개척단 출신 타지 거주자들이 보낸 진정서도 빗발쳤다. 자신도 분배 대상이니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자체 관계 부서는 진정서 접수 결과를 구체적으로 작성해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 인지면에서 서산군에 보낸 진정서 검토 결과, 1969년
"본 건 진정인 김○○은 1962년 1월경 자활정착사업장에 정착하여 거주 중 1964년 4월경 무단 가출하여 그 후 현재까지 거주 사실이 없는 자임. 그러므로 진정인은 1964년부터 정착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자로서 농지 분배 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농지 분배 대상자로 책정할 수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똑똑했으면 달랐을까"
분배 자격은 곧 서산개척단 정착민으로서 얼마의 기간 동안,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만큼 분배 절차는 구체적이고 까다로웠다.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록과 결재 공문이 상하 부처를 오갔다. 개척단원들이 '내 땅'에 대한 자격을 믿어 의심치 않은 배경 중 하나였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11년 9월 서산개척단 관련 의결에서 "근로기준법 상 노임의 통화지급 원칙에도 불구하고 (중략) 법적 근거 없이 양곡으로만 노임이 지급되는 등 제도 상 생활보호법 및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며 개척단원들이 대가 없는 강제 노역에 동원 됐음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착취는 있었으나 보상은 없었다. 통화지급원칙. 국가는 돈으로 노역 값을 치르겠노라 했지만, 약속은 법전 안에서만 유효했다. 돈 대신 줄 것으로 믿은 내 땅마저 국가의 소유가 됐다. 무상분배를 위한 조사와 수차례의 회의, 그리고 '곧 네 땅이 될 것'이라 인증한 가분배증까지. 증거는 차고 넘쳤다.
앞서 언급한 서산개척단 '쌍둥이 사례'인 장흥개척단의 경우, 1965년 무상분배를 받았다. 당시 대통령령에 따라 '근로 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분배할 수 있다'는 자활지도사업에관한임시조치법(1982년 12월 31일 폐지)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분배 대상자에게 '매립증'이라는 분배증을 나눠준 사실도 똑 닮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흥에 (땅을) 나눠 주라고 했대. 거기는 우리랑 똑같거든. 눈곱만큼도 다르지 않아."
서산개척단 출신 농민들이 땅만 생각하면 밤중에도 일어나 가슴을 치는 이유다. 정영철씨는 빚으로 경작 중인 자신의 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찍어냈다. 그는 장흥개척단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웠으면"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그때 등기라도 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배우지 못해 속았고, 땅을 빼앗겼다는 한탄이었다. 장흥개척단이라고 더 '똑똑해서' 땅을 받았을까. 정작 '똑똑하게' 일을 처리했어야 할 책임 주체는 어떤 해명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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