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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빼곡한 노트, 보면 볼수록 놀랍네

아버지께서 살아가신 그 시절의 역사를 담은 기록

등록|2017.12.27 16:38 수정|2017.12.27 18:27
사진을 정리하다 참 오래 된 노트를 촬영해 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께서 남겨 놓으셨던 노트를 유품을 정리하다 촬영해 두었던 모양이다. 글을 쓰려고 했었는지 사진은 이미 편집까지 되어 있었다.

요즘에야 사진의 용량에 대해 그리 크게 문제를 삼지 않으나 예전엔 600여 픽셀 정도로 사이즈를 줄여 사용해야 됐었다. 그나마 가로 910 픽셀에 세로 600픽셀인 걸 보아 어딘가 사용하려고 적당한 크기로 크기 조절을 해 놓고는 방치했던 모양이다.

노트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을 지내고 1976에서 1978년말가지 치안본부장을 한 김성주란 이가 시골의 이장과 반장들에게 증여를 한 노트로 보인다. 당시 오색약수로 유명한 오색리의 3반 반장을 맡은 아버지께도 이 노트가 건네졌거나, 외삼촌께서 중앙정보부 속초지부장을 한 인연으로 외삼촌을 거쳐 마을일을 보시는 아버지께 한 권 건네졌을 수도 있다. 김성주란 이름을 가끔 들었던 기억으로 미뤄 외삼촌과 함께 오색에서 만났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노트1977년 11월, 전달 말일 치렀던 형의 혼례식에 들어온 부조금을 기록해 놓으셨다. 그 시절 목수 일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자식들 굶는 모습을 보는 것 보다 당신께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하시며 청소부를 하셨는데 월급이 13,720원 이었다. 그 월급이 지금은 300만원이 넘으니 6만원의 부조금은 넉 달 월급보다 많았다. ⓒ 정덕수


아버지는 이 노트에 몇 년에 거쳐 다양한 마을의 일들은 기록해 놓으셨다. 수년간(1974년 1월~1979년) 마을일을 보신 기록이고 아버지의 흔적이다.

아버지께서는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본어를 배울 것을 강요당하신 분이다. 1932년 임신(壬申)생이시니 해방이 되던 해에 우리 나이로 14살이셨을 테고 19살에 한국전쟁을 맞으셨을 거다. 더구나 38선을 바로 개울 하나를 사이로 한 갈천에서 말이다. 그런 시절을 살아오신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일본어를 배운 이들만의 글씨체를 아버지께서도 사용하셨다.

아버지는 어르신들과 함께 옛날을 회상하실 때 항상 일제치하를 '왜정 때'라 하셨고, 한국전쟁기간은 '인공 때'라 하셨다. 큰어머니와 대화를 하시며 "형수 왜 거 왜정 때죠. 병자포락(병자년 수해)때 말입니다"로 말씀을 하시면 큰어머니께서는, "하이고 작은아버지 내가 그때 동상(동생) 손 붙들고 뛰다가 그만 손을 놓쳐 동상을 잃었는데 작은아버지가 기기나(기어 다니기나) 했었나?"하시곤 했다.

큰어머니께서 밑의 동생을 잃으셨다는 병자년 수해에 대해 잠시 설명하면, 양양군에서만 55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물이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는 오색초등학교의 운동장 높이에서 1미터 가량 파면 모래가 나올 정도였다. 학교 운동장은 물론이고 주변 어디나 비슷한 깊이를 파면 고운 모래가 한 없이 나온다.

병자년이 1936년이니 아버지의 말씀에서 왜정 때는 분명히 맞다. 1936년 7월에 발생했던 수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정리해야겠다.

노트엔 몇 년간의 반장 모곡과 이장의 모곡을 마을에서 걷은 기록이나 마을일에 동원 된 인부들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장을 맡으면 자식들이 바쁘다"는 말 그대로 반회나 마을의 회의는 물론이고, 이장과 반장 모곡을 받으러 마을을 도는 일까지 동생과 내가 심부름을 했다. 자연히 마을 어른들의 성함과 가구수를 지금도 거의 모두 기억하는데 이장과 반장 모곡을 낸 명단에 애초 이름이 누락된 이들이 여럿 있었다.

아마도 300원 하는 반장 모곡을 내지 못하는 이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들을 일부러 누락시킨 걸로 보인다. 아버지는 마을 터잡이 목수셨지만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홀아비로 자식들을 키우다보니 형편이 참으로 궁색했다. 자식들 끼니 걱정을 늘 해야 될 정도로 곤궁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팍팍한 살림살이로 고생하는 이웃을 배려한 아버지의 성품을 새삼 느끼게 됐다.

요즘이야 반장은 모곡도 없고 전출입과 같은 일에서 도장을 찍어 주는 일도 없지만 당시에는 반장이 마을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이장은 지금과는 달리 제법 지역의 유지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마을 전체에서 반장 모곡의 곱절에 해당하는 모곡을 각 반의 반장들이 집집마다 걷어 주었으니 이장은 제법 할 만한 자리였다.

아버님이 작성하신 기록 중에는 당시 마을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어떤 이가 불법으로 마을 주민들을 푼돈으로 동원해 주목나무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한겨울 돈이 귀한 산촌에서 몇 백 원 벌이는 눈에 불을 켜고 서로 하겠다고 나섰다. 처음엔 점심을 준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서니 슬그머니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평소 마음 맞는 분들과 어울려 현장에서 아낙네들이 점심밥을 하고 찌개를 끓여 드셨다고 기록해 놓으셨다.

양기성 돼지고지 3근
양근석 고등어 5손
곰보 막걸리 1말

여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내놓으셨는지는 기록해 놓지 않으셨다. 이틀 정도 일을 마치고 우리 집에 모이셔서 각자 분담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국수 5관을 내기로 하셨는데 이건 새참을 드시기 위해 필요했다. 아주머니들은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뒤 산에 들어가셔서 새참부터 점심밥과 오후 참까지 챙겨주고 내려오기로 했었다.

3주 정도 이 일들을 하셨는데 2번 돈을 받아 오시고 난 뒤에 이 일이 불법이란 게 드러났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그는 구속됐었다. 재판을 받았지만 얼마나 많은 양의 주목나무가 도벌되어 반출되었는지는 경찰이나 검찰이 밝히지 못하고 풀어주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들려주신 말씀으로는 그의 벌목에 당시의 경찰과 검찰도 연관이 있었던 걸로 기억나신다고 하셨다. 불법은 어느 때나 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적인 존재인가 보다. 그런 숨겨진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와 같은 반장 일을 보던 두 분도 이런 기록을 했을 텐데 아무도 조사를 받지 않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고단하게 사셨던 아버지의 지난날 삶의 흔적들이다. 난 1977년 11월의 기록에 눈길이 멎었다.

바로 그 직전인 10월 말일에 형이 혼례식을 올렸다. 형은 작년 10월 21일 환갑을 지낸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 형의 혼례식 당시 들어 온 축의금과, 부조로 들어 온 물품들에 대한 기록이다. 일가친척을 비롯해 온 마을주민이 오셨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면장을 비롯해 우체국장 등 많은 이들이 3일에 거쳐 잔치를 치렀는데 당시의 내 기억에는 10만원을 빌려서 혼례를 준비했다.

축의금을 받은 기록을 보니 60,000여 원이 들어왔는데 사실 당시 주민들의 생활 형편으로 보아서는 많은 돈이다. 1977년에 일반미 한 말 값이 2,500원에서 막 올라 3,200원을 할 때다. 축의금은 대부분 200~300원을 내고 마음을 넉넉히 쓴다면 500원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1,000원 이상씩 낸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 이상을 낸 이들도 보이는 걸 보니 아버지께 대한 마을 분들의 마음을 알 거 같다.

그 뒤엔 쌀과 술, 국수 등 잔치에 소용되던 물목을 낸 이들과 물량이 적혀있다. 이분들은 축의금을 내고도 어려운 살림에 장성한 큰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전옥용 국수 3관
윤춘녀 국수 3관
이상수 편 1기(떡을 이야기 하고 쌀 한 말로 만든 떡의 양이다)
김지선 편 1기
양기성 편 1기
박주옥 국수 3관(소면으로 현재 판매되는 큰 봉투의 국수 두 덩이를 한 관이라고 한다.)
김재협 국수 1관
이원근 국수 1관
양근석 백미 1두(1두는 10되 1말을 이른다. 8kg의 양으로 1가마니는 80kg이다.)
양주석 탁주 3두
이남옥 국수 3관(이남옥은 내 친구의 이름으로 당시 아버지께서는 친구의 어머니 성함을 모르셨다.)
홍철표 백미 1두
김영기 백미 1두
양경수 백미 1두

아버지의 노트1977년 11월, 전달 말일 치렀던 형의 혼례식에 들어온 부조금 외에 물목도 기록해 놓으셨다. 일반적으로 현금만 얼마간 부조하는데 거기에 잔치에 필요한 국수와 떡, 술을 별도로 낸 분들이 많다. 내 기억으로는 혼례식날 저녁밥을 하며 양기성 어르신의 아주머니께서 팥 3되를 가져 오셨는데 이건 모르셨던 듯싶다. ⓒ 정덕수


이 기록엔 아버지의 필체가 아닌 진하게 쓴 작은 글씨가 있는데 아마도 형수가 나중에 추가로 기록해 드렸던 모양이다.

당시로써는 정말 엄청 많은 양의 물목이었다. 잔치엔 소를 키우는 집에서 가마솥을 빌려와 냇가에 걸고 밥을 짓거나 종일 국수를 삶았다. 지금은 여기 기록된 많은 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생존해 계신 몇 분께는 여전히 명절이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있다.

사실 형은 혼례를 치르기 직전까지는 집을 나가신 어머님 곁에 가서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집에 돌아왔지만 단칸방이라 아버지께서는 늘, 관광지였던 오색의 몇 곳 여관을 다니시며 주무셨었다. 아버지의 입장을 아시는 이들이 배려를 해 주어 돈은 받지 않았지만 아궁이에 불을 땔 경우에는 나뭇짐을 져다 주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잔치를 치르면서 마당에 차일을 치고 마을에서 빌려 온 멍석을 깔아 손님을 맞았다. 사실 이런 풍경은 70년대엔 시골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혼례식이었지만 지금의 우리 결혼 문화와는 정말 많은 차이를 보이는 정겹던 정취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신랑신부가 입는 전통혼례복인 사모관대도 아랫마을에 내가 걸어가서 빌려왔다.

혼례를 치르고 3일 뒤 재향(성혼한 남자가 처갓집으로 인사를 가던 풍습)을 간 형과 형수를 보내 놓고 사돈어른께서 연장을 챙겨 오색으로 넘어와 방 한 칸을 아버님과 함께 드려주셨다. 당시 형님의 처가는 홍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식당을 했던 관계로 제법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방을 드리는 비용을 모두 대 주고 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해 주셨다.

아버지2002년 3월 23일 늦은 결혼을 하는 둘째 아들 옆에서 하객을 맞이하시던 아버지는 형에게 “저놈을 공부를 시켰어야 되는데…”라며 눈물을 지으셨다. 이듬해 둘째가 첫딸을 낳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첫딸은 살림밑천이다. 아무 생각 말고 예쁘게 잘 키워라”란 말씀을 하셨는데, 다시 그 이듬해 1월 26일 손녀의 돌을 보시고 며칠 뒤인 2월 1일 세상을 떠나셨다. ⓒ 정덕수


형의 결혼식 때문에 얼마동안 집에 와 있던 난 다시 서울로 갔다. 지금 솔직히 말하면 한 해 늦었지만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을 알기에, 그리고 곳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야 되어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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