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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그에게도 '최순실'이 있었다

[서평]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생생한 역사 이야기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등록|2018.01.02 15:23 수정|2018.01.04 15:55
지난달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앞. 김활란 초대총장 동상 앞에 그의 반민족 친일행위를 밝히는 팻말을 세운 이대 학생들의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김활란(1899~1970)은 일제 강점기 때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있을 정도로 여러 친일단체를 이끌며 강연과 칼럼을 통해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다. 

▲ 1권, 2권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역사책. ⓒ 푸른역사

광복 후 처벌이나 지탄을 받기는커녕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고, 1963년엔 대한민국 건국훈장까지 받는다.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잊거나 체념하지 않고 뜻있는 행동에 나선 학생들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김활란 -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2권으로 구성된 이 책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위 학생들처럼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역사책이다. 역사책에 잘 소개되지 않은 이야기,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소환한다. 위인(혹은 악인)이나 영웅만이 역사를 이끌고 이뤄나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더불어 숨은 역사와 몰랐던 인물들이 많이 나와 새로운 역사 지식을 함께 얻게 됐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에 놀라울 정도로 박학다식한 저자는 의외로 역사학자가 아닌 PD(방송 제작자)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양심을 지킨 사람들>, <한국사를 지켜라> 등의 책을 낸 후 2015년부터 지금까지 주간지 <시사IN>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 중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선 사람들 

▲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 인터뷰와 함께 실린 항일의병 사진 (1907년). ⓒ 의병박물관



"역사는 특별하지 않고, 반짝이지 않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이들이 살아낸 삶의 총합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선 사람들 덕분에 세계는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는 새싹을 틔운다." - 책 본문중

이름도, 빛도 없이 나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분은 구한말 항일 의병들이 아닐까 싶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서 삶을 체념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걸고 일제에 저항 한 사람들. 당시 일제는 청나라는 물론 러시아와도 싸워 이길 세계 최강의 군사 국가였다. 어느 의병이 했다는 말은 새삼스레 삶과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 백성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원나라 쿠빌라이에게 결연히 맞섰던 재상 이장용, 1913년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국의 여성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1987년 6월 항쟁의 물꼬를 트게 해주었던 평범한 의사·법의학자·교도관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평범하지만 의로웠던 사람들과 반대로 영웅이나 위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정반대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알게 됐다. 대표적인 사람이 책 1권 첫 꼭지에 나오는 명성황후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궁궐을 습격한 일본인들의 칼에 맞아 죽고 시신마저 불태워진 비극적인 왕비는 뮤지컬, 드라마를 통해 '조선의 국모'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실은 자신과 친척의 이익을 위해 매관매직을 하며 백성이 배를 곯든 말라 죽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백성들(동학농민)을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짓밟기까지 했다.

전라도 관할인 태인, 고부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원래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중략)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 난리 때에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 문제도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께 알려 몇 개의 부대를 파견토록 조치해주십시오. 저희 군대 대신 동비(동학군)를 초멸해주셨으면 합니다. - 동학농민군을 토벌해달라며 명성황후(또는 민비)가 청나라에 보낸 편지 내용

과거와 오늘이 교차하는 특별한 역사 이야기 

"1898년 자주독립의 미래를 꿈꾸는 시민들이 만든 만민공동회. 그 개혁의 기운을 짓밟은 건 정부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 단체 '황국협회'였다. 오늘날 어버이연합에 과거의 어두운 역사가 어른거린다." - 책 본문 중

저자는 과거와 오늘을 교차시키고 입체적으로 연결해 역사가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전한다. 역사가 고리타분하기는커녕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평범한 시민의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접근해 최근 벌어진 사건과 결부시키면서 풀어내는 역사 이야기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 역동적이고 재미있고 쉽다. 정말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한 구어체로 설명하는 역사 이야기가 친밀하고 친근해 귀에 쏙쏙 들어온다.

대한제국 시절 명성황후에게 '진령군(임금 君)'이란 호칭을 받을 정도로 무한신뢰를 받으며 국정농단을 일삼았던 무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조선판 사드(THAAD) 논란 '모문룡 사건', 한국전쟁과 세월호의 비극을 '7시간'이라는 상징적인 키워드로 비교한 부분, 조선시대 의병과 세월호 민간 잠수사의 평행이론 등 일반 역사책과 다른 서술 방식이 참신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곱씹게 한다.

덧붙이는 글 김형민 (지은이) | 푸른역사 | 2017-10-21
제 블로그 (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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