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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 >에 담긴 허구, 손에 땀을 쥐게 한 실제 상황들

[기획] 실제 사건과 다른 영화 속 장면들... 영화적 상상력 덧대어 재미 높였다

등록|2018.01.04 15:59 수정|2018.01.05 12:02

▲ 영화 < 1987 >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영화가 종반부를 치달을수록 흘러내리는 눈물,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끝까지 좌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감동. 영화 < 1987 >을 본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평이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가 담긴 영상과 노래 '그날이 오면'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했던 사람들도 무너지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 < 1987 >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당시를 겪은 세대는 지난 30년에 대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고, 10대~30까지의 젊은 세대들은 저런 시대가 존재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당시를 미화하기보다는 세세한 고증과 함께 각각의 경험담이 어우러져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시대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동원된 부분이 존재하고 당시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각각이라 긍정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에 대해 다소 논란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 박종철 고문 치사를 밝혀낸 바탕이었고, 그것이 6월항쟁으로 이어졌음을 < 1987 >은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적 구성을 위해 실제와 다른 부분은 존재한다. 제작진은 작은 공기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영화적 상상력이 필요한 곳은 적절하게 각색하며 영화적 완성도를 높였다.

사제단 폭로 때는 고문경찰 이름 틀리게 발표

▲ <1987>의 한 장면. 고문경찰들 ⓒ CJ엔터테인먼트


<1987>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실명으로 나온다.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정치사회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허구적으로 창작된 존재는 김태리가 연기한 87학번 신입생 연희다. 그렇다고 이 부분도 전혀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글이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옥중에서 재야인사 이부영이 보낸 서신(일명 '비둘기')을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이를 다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했던 사람은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과 딸이었다. 당시 수배 중이라 고 변호사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김정남 선생은 이들을 통로로 옥중에서 온 소식을 정치권과 재야로 전했다.

교도관 한병용은 실제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한재동씨와 직접 비둘기를 전달한 전직 교도관 전병용씨를 섞어놨다. 한재동씨는 이부영 선생의 편지를 역시 수배중이던 동료 교도관 전병용씨를 통해 전달했다. 전병용씨는 수배 중인 재야인사를 숨겨줬다는 혐의로 당시 경찰에 쫓기던 상태였다. 편지를 김정남 선생에게 전달하고 며칠 만에 경찰에 잡혀, 조금만 늦게 전달됐어도 아찔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한재동씨의 이야기는 6월 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공중파 방송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당시 고문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은 발표과정에서 고문에 가담했던 3명의 이름을 추가로 발표했는데, 이 중 두 경관의 이름은 오기였다. 사제단은 방근곤과 이정오를 고문치사 가담자로 밝혔으나 실제 이름은 반금곤과 이정호였다. 교도소 내에서 귀로 들은 내용이 이부영 선생에게 전달되고 이 내용이 정리돼 외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착오로 표기돼 발표된 것이었다. 영화에는 이 장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2.7회 추도회와 3.3 대행진 섞은 시위 장면

▲ 영화 <1987>의 한 장면 87학번 신입생 연희로 나오는 김태리. ⓒ CJ엔터테인먼트


87학번 신입생 연희와 이한열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3월 3일 소공동 미도파(현 롯데백화점) 앞으로 배경이 그려지고 있는데, 박종철 2.7 추도회와 3.3 대행진을 섞어 놓은 장면이다.

명동에서 대규모 시위가 펼쳐진 것은 1987년 2월 7일 토요일 박종철 열사 추도회였다. 고문 살해가 드러난 후 재야단체 준비한 집회였고, 당시 기준으로는 6월항쟁 전까지 80년 5월 광주 이후로 가장 큰 시위기도 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경찰은 '진고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추도제 장소였던 명동성당뿐만 아니라 명동 전체를 수만 명의 경찰을 동원해 봉쇄했다. 토요 휴무가 없던 시절 명동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경찰에 가로막혀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당일 정오 이전부터 명동입구 길 건너편인 미도파 백화점에서 명동으로 진입하려던 시민 학생들은 경찰과 수시간 동안 대치하면서 해산 명령에 불응했다. 이후 최루탄이 난사되자 고문추방 독재타도를 외치며 명동, 소공동, 남대문 시장, 종로, 을지로 등에서 경찰과 대규모로 충돌했다.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면서 고문살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표출된 순간이었다. 당시 기자도 시위대 일원으로 서울 시내를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 했다. 

▲ 1987년 박종철 2.7 추도회를 보도하고 있는 신문기사. 당시 경찰에 의해 막혀있는 명동성당 모습 ⓒ 동아일보pdf


3.3 평화대행진은 박종철 열사 49재를 맞아 서울 9개 지점에서 종로 파고다공원까지 행진하는 추모행사로 준비됐다. 당시 새 학기 첫날이었는데, 신촌로터리와 제기동에서 대학생들이 집결했다 흩어졌고, 청계천 4가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상대적으로 명동을 중심으로 모였던 2.7 추도회 때와는 양상이 달랐다.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은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의 추격을 피해 골목으로 숨었다 다시 집결하는 일명 숨바꼭질 시위를 이어 나갔다. 이전까지는 경찰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흩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87년에는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반독재 데모를 벌이는 숨바꼭질 시위가 이어졌다. 백골단이 시위 학생들을 잡기 위해 골목길까지 들어오는 경우도 잦았는데, 이때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는 점포들도 많았다.

< 1987 >에 한 줄만 덧대도 아예 다른 영화

▲ 명동성당 입구 맞은 편 골목 아래 위치한 향린교회 ⓒ 성하훈


영화에서 재야인사 김정남이 은신한 곳으로 나오는 향린교회는 명동성당 앞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을 지휘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 앞장섰던 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기도 한데, 영화에서는 실제장소가 아닌 상상력을 가미한 장소로서 교회 이름이 사용됐다. 최근 재개발로 인해 옛 중앙극장이 사라지고 길이 넓어지면서 골목길의 정취는 없어졌다.

영화에 나오는 서울시청 앞 광장의 시위장면 또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1987년 당시 서울시청 앞으로 진출한 것은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유일했다. 서울시청 앞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많았으나 서울역 쪽 남대문이나 소공동, 을지로입구, 무교동 쪽에서 막히기 일쑤였다. 따라서 영화에 나오는 차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촛불시위의 상징과도 같은 서울시청과 광화문 네거리는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이나 시위대가 진출할 엄두를 못 낼 만큼 경찰의 방어가 철통같았다. 접근하려고 하면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사됐다. 80년대에 이뤄내지 못하는 광화문 돌파를 이뤄낸 것은 2000년대 촛불시위였다.   

1987년 당시 운동권 가요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많이 모여있을 때 학생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는 애국가였고, 6월 항쟁 때는 태극기를 흔드는 시위가 많았다. 당시에는 태극기도 시위용품으로 분류됐다. 1987년의 숭고한 태극기는 그 가치를 떨어뜨린 지금의 태극기 시위에 대비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보수적인 인사들도 자기 위치에서 소임을 다한 것은 평가받아야할 부분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부검을 막았던 최환 검사는 공안부장의 이력이 설명해줄 만큼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1987년 1월 상황에서 그가 검사로서 내린 원칙적 판단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

보안계장으로 나오는 안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후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권적인 행위를 자행한 과거로 인해 당시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로부터 미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고문 조작 사실을 알린 그 순간만큼은 양심의 목소리를 전달했고 그 역할이 1987년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사실은 별개로 인정받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12월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1987> 언론시사회에서 장준환 감독이 소감을 말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장준환 감독은 최근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서 1987년 1월~6월까지의 과정에만 초점을 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 1987 >은 그런 6월 항쟁의 매우 아름다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는 영화다. 만일 끝부분 자막에 한 줄만 덧대도 이 영화는 아예 다른 영화가 된다. '그해 12월 군사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6월 항쟁은 굉장히 짧았던 한여름 밖에 되지 않고 이후 야당의 분열로 군사 정권에게 권력을 다시 내준 부분이 있었던 거고. 그 광장에 모여 외쳤던 사람들을 소위 386이라고 하는데 그 이후 386세대들이 어떻게 살았나. 아파트값을 이렇게 올려놓고. 나는 이 영화가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대체 그 순수함은 어디로 갔느냐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영화이기를 바란다."

*관련기사 : "박근혜탓에 몰래 만든 <1987>, 배우들 출연 요청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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