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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손수레에 태워 다니던 날

등록|2018.01.12 11:05 수정|2018.01.12 11:05
아직껏 나에겐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다. 어머니란 말보다 엄마란 말이 더 익숙하다. 엄마에겐 여전히 난 막내아들일 뿐이다. 난 결혼하기 전이나 결혼한 후나 엄마 속을 많이 썩게 만들었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지금도 효도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고 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게 될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다. 엄마는 언제나 내 걱정이다. "나야 아무려면 어떻노, 너그들이 잘 살면 되지. 내가 영이 니 잘 사는 것 보고 죽어야 할텐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엄마, 난 괜찮아.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항상 엄마는 내 걱정뿐이다. 엄마는 아직 장사를 하신다. 매일매일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시장에 팔러 가신다. 그리고 울산 근교 시골장에 가서 곡식을 사서 울산 장에다 내어 파신다. 작년에 치매가 오고 혈압이 올라가고 당뇨도 생겼는데, 장사를 손에서 놓으실 줄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 찾아뵙는 것도 어려운 나는 한번씩 엄마를 볼 때마다 기력이 많이 쇠하여져 가는 것을 본다.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고 장사를 그만두게 할 수도 없다. 장사 안 하셔도 아들 3형제가 조금씩만 내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엄마가 장사하시는 것은 꼭 돈만이 아닌 줄 알기에 말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자식들을 욕을 할지 모르겠지만, 시장에 가서 옆에 있는 아주머니와 수다도 떨고 돈도 버시는 것이 집에 그냥 있는 것보다 나을 거란 생각에 아들들은 적극적으로 장사를 말리지 않는다. 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자식들 대학 보내고 장가 보내고 하셨다. 그 고생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일요일에 엄마집엘 갔다. 여전히 엄마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아이고, 우리 영이 왔나."
"응, 엄마 별일 없제, 몸은 좀 어떻노?"
"괜찮다. 당뇨 수치도 많이 내려갔다."
"요즘 병원은 잘 다니나? 약은 안 빼먹고 잘 먹제."
"그래, 한 달에 한번씩 병원에 가고 약 타먹는다."

항상 엄마와 나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엄마가 걱정을 한다.

"아까, 양남장에 갔다가 버스에서 짐을 내렸는데, 택시를 잡아도 안 잡혀서 옆에 있는 고물상에서 리어카를 빌려서 짐을 싣고 왔다. 그런데 갔다줄라니까 내가 힘이 없어가."
"어디에 갔다주면 되는데, 내가 갖다줄게."

엄마가 어디어디라고 설명을 해주는데, 도통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엄마, 리어카 타라 내가 엄마 태워서 가면 안 되나."
"그래 줄래?"

이렇게 해서 엄마를 리어카에 태우고 동네를 가로질러 500미터쯤 떨어진 고물상까지 갔다. 양복을 입고 노인을 리어카에 태우고 가는 모습에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고 엄마를 태우고 갔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계시는 것만 해도 어디고.'

리어카를 돌려주고 엄마 팔짱을 끼고 걸어왔다. 엄마는 조금 걷다가 힘이 들어 쉬고 또 걷고 하셨다. 그런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정말 정말 오래 오래 사셔서 막내 영이가 잘 되는 것을 보셔야 될텐데.'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슴에서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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