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에서 사는 어떤 소설가의 소설
[세계작가대회] 탈북인에 대한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
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분단 기고글로 소설가 조해진 작가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 <로기완을 만났다> ⓒ 창비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그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그 인물은 왜 하필 난민 신청을 한 탈북인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우선 '탈북인'이라는 명칭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싶다. 이 작은 문제제기가 내가 이 소설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탈북인'이라는 명칭에는 북한을 '탈출'했다는 의미가 들어가므로 '탈북인'은 결국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므로 언중이 아무런 제약이나 반감 없이 사용하는 '탈북인'이라는 단어를 나 역시 쓰고 있지만, 이는 다분히 한국인의 시각에 맞춰진 조어(造語)라는 건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조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는 북한일 것이다. 한국 정부에서 발급한 합법적인 여권과 비자가 있어도 한국인은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혹은 통일이 되지 않는 이상, 살아서는 북한에 갈 수 없다. 오랫동안 갈 수 없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인은 그곳을 개개인의 시각으로 보지 못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와 가정에서, 신문과 방송을 통해 교육받은 내용과 약간의 상상으로 그 나라를 완성해왔을 뿐이다.
나 역시 북한에 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 북한이 '탈출'을 할 수밖에 없는 척박하고 비인간적인 곳인지, 그래서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이지 감옥도, 수용소도, 유배지도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북한이 국가로 대접받기보다 감옥이나 수용소, 혹은 유배지로 인식되는 건 사실 오랜 역사적, 정치적 갈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북한의 이미지를 나열하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 가난한 나라, 독재 국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깡패국가……. 물론 다 맞는 말이긴 하다. 북한의 경제지표는 세계 최빈국에 속하고 북한에서는 3대째 독재가 세습되고 있다. 또한 북한은 끊임없는 군사도발과 핵 위협으로 미국과 대치중이며 이론 인해 세계 평화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이 전부 북한 탓일까.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1997년쯤에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를 통해 북한의 식량난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상황이 믿기지도 않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북한의 식량난에 미디어는 침묵했고 내 주변 사람들은 무지했다. 그 어느 강의에서도, 그 어떤 교수도 그에 대해 구조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금함 박스에 넣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2010년 무렵, <로기완을 만났다>를 쓰면서 자료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에야 나는 1990년 중반에 북한이 맞닥뜨린 최악의 식량난이 '고난의 행군'으로 불렸다는 걸 알게 됐다. 또한 나는 '고난의 행군'이 그 나라 자체의 모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여러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자연재해를 만나면서 폭발하여 일어난 비극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 나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썼다.
로가 인민학교에 들어가고 이듬 해 북한에는 큰 홍수가 일었고 전염병이 돌았다. 1995년, 자연 재해의 얼굴로 찾아온 이 재앙 앞에서 로의 조국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건 오래 전부터 예고된 시나리오였다.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의 지원 감소,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한 무역량 감축, 무분별한 비료 사용에 의한 토지 황폐화와 연료 부족이 가져온 농업 기계화의 실패, 그리고 미국의 경제 제재와 오랜 기간 지속된 무역적자는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처럼 연동하여 로의 조국으로부터 재앙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앗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1995년은 시작에 불과했다. 홍수는 그 다음 해에도 그 가난한 나라를 찾아왔고 1997년에는 해일과 가뭄이, 1998년에는 태풍이 국가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아사한 북한 주민은 대략 이삼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북한 정권의 와해를 은연중에 바라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한국은 북한이 가장 배고플 때 식량 지원을 주저했고 북한 정부는 고고하게 쌓아올린 지상 낙원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현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두려워했다. 이 거대하고 무정한 정치 게임 속에서 학생의 배울 권리 같은 개인의 영역은 너무 쉽게 외면되었다. (중략) 학교생활은 사치였다. 학교에는 학용품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가르쳐줄 교사들도 상당수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 많던 교사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 <로기완을 만났다>, pp100~101.
'고난의 행군' 당시 이삼백 만 명의 아사자 수는 사실 부풀려진 수치라는 반성적인 논의가 있긴 했으나, 그 수치의 정확도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제때 먹지 못하여 죽었다는 것, 그것도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직적으로 희생되었다는 것, 그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역사학자는 '고난의 행군' 당시의 북한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던 한국과 미국, 또한 그 주변 국가를 어떻게 평가할까. 북한 문제를 정치적인 이슈로만 이용하려 했던 정치인들뿐 아니라 그들의 말에 동의하며 더 큰 틀을 보지 못한 우리 한 명 한 명은 또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주도한 국가들의 국민들이 고국의 만행을 알지도 평가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의 우리의 맨얼굴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의심은 커다란 부끄러움이 되기도 한다.
그럼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그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그 인물은 왜 하필 난민 신청을 한 탈북인이었는가? 아니, 왜 난민 신청을 한 북한이탈주민이었는가?'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으려 한다.
한 인간을 담고 싶었으되 그 인간이 북한 출신 난민이었던 것은, 1990년대 중후반 내게 각인된 어떤 비인간성의 실마리 때문이라고 말이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으나 정치적으로만 이용하려 했던 북한 문제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싶어서였다고도 덧붙이고 싶다. 물론 보다 평등한 입장에서, 보다 근원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싶었다는 바람도 한 몫 했다.
결국 나는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정체성을 갖고 이 소설을 쓴 셈이다. 다시 말해, 정치보다는 인간이 먼저였다는 의식 아리에는 분단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에 나는 <로기완을 만났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가소개]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소설을 연재하면서 독자와의 만남을 진행하는 등 소설 창작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꾀하고 있다. 수많은 블로그 리뷰가 증명하듯, 오늘날 현실을 강렬하게 담아낸 작품들로 독자에게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소설가 중 하나다.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2011, 창비)는 탈북인 로기완과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작가 '나'의 이야기로 북한 주민과 탈북인의 현실을 다뤄 주목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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