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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현충사를 야스쿠니 신사처럼 만들었다

1966년 성역화 작업 당시 본전-배전 양식 그대로 이식시켜... '시멘트 현충사'도 문제

등록|2018.01.30 10:23 수정|2018.01.30 10:23

1968년 현충사의 모습노란색 사각형 안에 있는 건물은 구 현충사인데 배전으로 쓰였다. 빨간색 사각형 안의 건물은 새로 지은 현충사인데 본전으로 쓰였다. 앞뒤로 있는 형태다. ⓒ 국가기록원


1967년 현충사의 모습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충사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뒤로 현충사 본전, 배전이 보인다. ⓒ 국가기록원


현충사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종가의 맏며느리(종부) 최순선씨가 "현충사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을 내리라"고 입장을 내놓은 뒤부터였다. 최씨는 그 이유로 "지금 현충사에는 왜색이 너무 짙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기록원 누리집에서 1967년 현충사 사진을 찾아 봤다.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일본 신사 양식이 그대로 찍혔기 때문이다.

현충사는 1966년 성역화 작업을 단행했는데 이때 새로 지은 건물을 '본전'이라고 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셔놨고 원래 있었던 현충사 건물을 배전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말로만 듣다가 사진으로 접하니 무척 황당했다.

"1966년 성역화 사업으로 현재의 현충사 본전이 신축되고, 구 현충사는 한동안 배전으로 사용되었다." - <경제 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지용희 씀) 118쪽
 

야스쿠니 신사의 구조왼쪽 빨간색 동그라미가 본전, 오른쪽 빨간색 동그라미가 배전이다. ⓒ 구진영


본전과 배전이 있는 일본 신사 양식

일본 신사는 보통 본전(本殿, 혼덴)과 배전(拜殿, 하이덴)을 두고 있다. 이 양식은 일본 헤이안 시대 교토 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에서 본전과 배전을 묶어 사전(社殿)이라 부르면서부터 정착됐다. 본전은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고, 배전은 보통 돈을 넣는 상자(銭箱 ぜにばこ)를 놓고 방문자가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건물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일본 신사 양식으로 해놨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 양식을 두고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는지 1968년 구 현충사는 유물관 옆으로 옮겨지게 된다(당시에는 유물관이 있었으나 새로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구 현충사는 1932년 민족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민족성금을 모아 중건한 건물이다. 그런 건물을 배전으로 사용하려고 앞 뒤 벽을 모두 없앴다. 심지어 원래 자리에서 옮겨버렸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1967년 현충사의 모습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며 구 현충사의 벽을 모두 없애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뻥 뚫려 있다. ⓒ 국가기록원


걸렸다 내려갔다 다시 걸린 숙종 사액 현판

구 현충사에 걸려있던 숙종 사액 현판(사액 현판 :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건물 위에 걸 수 있는 글씨를 내리는 일)도 기구한 운명을 갖고 있다. 1706년 충청도 유생들이 임금에 상소해 허락을 맡은 뒤 충무공 사당이 건립됐다. 이후, 1707년 숙종이 '현충사'라고 적힌 현판을 내려 지금까지 현충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현충사도 없어지는데 이때 숙종이 내린 현판은 충무공 이순신 종가가 보관하게 된다. 이후 1932년 민족성금으로 현충사가 다시 지어지면서 종가는 보관하고 있던 숙종 사액 현판을 내놔 다시 걸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 종가는 "현충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숙종 사액 현판 때문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내리고 숙종 현판을 다시 걸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 현충사 건물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숙종 사액 현판이 걸리게 되면 안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역화 작업 이후의 현충사를 살펴보면 이번 기회에 현충사를 다시 지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된다.

1963년 현충사의 모습구 현충사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때는 박정희 성역화 작업 전으로 건물에 숙종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 국가기록원


1963년 현충사 행사 사진구 현충사에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박정희의 성역화 작업이 이뤄지기 전이다. ⓒ 국가기록원


'시멘트 현충사', 그대로 둘 것인가

52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역화 작업으로 지어진 현충사 건물은 시멘트로 지어졌다. 시멘트 건물은 수명이 다하면 부수고 새로 지을 수밖에 없다. '시멘트 현충사'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손을 봐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목조 건물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무 및 기와 등을 교체하면서 오래 보존할 수 있다. 구 현충사를 다시 옮겨 예전 현충사 위치로 돌려놓는다거나, 새로운 목조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등의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숙종 현판이 합당하냐, 박정희 현판이 합당하냐'와는 별개로 논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에는 구 현충사가 너무 작지 않나'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963년 현충사 행사 사진을 보면 구 현충사 건물로도 대규모 행사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민족성금으로 지어진 건물이기에 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현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만큼 현충사 건물 문제 역시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문화재청은 오는 2월 박정희 친필 현충사 현판 존속 여부를 두고 자문회의를 연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현판뿐만 아니라 현충사 자체에 대한 논의과 토론이 이어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결정을 도출해내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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