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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에 적은 '감옥 자격증'... 나는 운이 좋았다

[나의 명랑한 감빵생활 ⑤마지막] '빵잽이' 인권활동가에게 <슬빵>이란

등록|2018.01.26 14:13 수정|2018.01.26 14:13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감빵'과 인연이 깊습니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인권활동가로서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고 느낀 점을 담은 '감빵'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내가 자격증이 이리 많아도 직접 해 본 게 없다. 이거 다 종이쪼가리다."

지난 18일 종영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마지막 회에서 22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하는 김민철이 50여 개의 자격증을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 장면에서 나의 의정부 교도소 시절이 생각났다.

원래 공안사범들은 출역(교도소에서 하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출역을 해서 일을 해야 점수를 많이 따서 수용등급을 올릴 수가 있는데 공안사범들은 출역을 하지 못하니 항상 최하점인 4점을 받게 돼 4급에서 3급도 되지 못한 채 만기를 맞이하고는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이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공안사범들도 본인이 원한다면 출역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이다.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는 기결수 공안사범이 나 한 명이었는데, 나와 몇몇 '문제 수용자'들을 담당하는 전담반 백 주임님이 있었다. 어느 날 백주임님이 운동을 하다가 내게 출역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전혀 생각 못 했던 일이기에 고민이 조금 필요했다.

보안과장과 면담했다. 그는 내게 정보화 교육 조교 출역을 권했다. 당시 의정부 교도소는 교육 전문 교도소를 표방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선발된 외국어 특기자 100명(영어, 일본어 각 50명) 이곳으로 와서 어학능력인증시험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보화교육 전문 교도소로도 선정돼 정보화 교육실이 별도로 설치되던 즈음이었다.

감빵에서 '컴퓨터 전문가'가 된 사연

▲ 실제로 취득한 자격증 ⓒ 김덕진


처음 출역 간 정보화교육실의 컴퓨터들은 컴퓨터가 아니라 거의 타자기 수준이었다. 모든 교육생들은 '베네치아'라는 한글 타자 연습 게임을 하면서 모니터 위에서 떨어지는 단어들을 키보드를 두드려 소멸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결국 정보화 교육은 타자 교육이었다.

나 역시 겨우 1분에 200타쯤 치던 타자 실력이 의정부 교도소에 와서 400타쯤으로 늘었다. 신기하게도 몇몇 수용자 형님들은 양손 검지손가락만을 이용하는 일명 '독수리타법'으로도 200타가 넘게 나오는 신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정보화 교육 조교를 하는 동안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급하는 공인 자격증인 워드프로세서 3급과 2급 자격증을 땄고, 전국 교정시설 최초로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에서 발급하는 PC정비사 2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PC 정비사 자격증은 교정시설에서는 2001년 처음 실시했는데, 당시 나를 포함한 동료 8명이 응시해 모두 합격했다.

시험은 협회에서 교도소로 감독관이 출장을 와서 치렀다. 문제집에서 거의 그대로 시험문제가 나오는 필기시험을 통과한 뒤, 하드디스크를 다른 하드디스크로 복사하는 'ghost' 프로그램만 사용할 줄 알면 거의 합격하는 실기시험이었다.

당시 분명 어느 신문에 "의정부 교도소 수용자 김모씨 등 8명 전국 교정시설 최초로 PC정비사 합격"이라는 기사가 났었는데,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 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한 인터넷 카페에서 PC정비사협회 회보에 실린 기사 내용만 검색될 뿐이라 몹시 안타깝다.    

연거푸 3연속으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나는 다른 수용자들이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필수로 거쳐야 하는 조교로 유명해졌다. 컴퓨터 조교 중 나와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서 병역을 거부해 수감된 친구 단둘만 문신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 여사의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시험 대비 특강을 한 적도 있다. 교도관들도 승진 고과 등을 위해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곤 했는데, 컴퓨터와 친숙하지 않은 현장 근무 교도관들에게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으로 표를 만들고 연산식을 수립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실기시험은 주어진 문서를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 플로피 디스크에 넣어 이름을 쓰고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도저히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워 보이던 몇몇 교도관들은 조교들에게 '미션'을 주었다. 우리는 옆방에서 재빨리 문서를 만들어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한 다음, 시험장 컴퓨터에 꽂아 문서를 내려받은 뒤 제출용 플로피 디스크에 다시 옮겨 담아 제출하도록 도왔다.

배우면 뭐하나, 써먹지를 못하는데

감빵에는 수없이 많은 출역장이 있다(감방이 맞는 표현이나, 드라마에서 쓰이는 표기 방식대로 감빵이라고 씁니다). 관용부라고 통칭된다. 교도소 곳곳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소지들은 내청과 외청으로 나뉘어 교도소 청소와 관리도 하고 각 사동과 교무과, 의무과, 영치과 등에서 수용자들의 생활을 거든다. 사실 소지들이 없으면 방안에 갇혀있는 수용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유명한 '조폭'(조직폭력배)들도 소지들에게는 잘 해주고는 했다.

또한 3교대로 가스 불을 계속 켜고 쉼 없이 밥을 하는 취사부, 모포 빨래나 기본 지급 물품들을 지급하는 세탁부, 소내 고장 난 것은 무엇이든 고쳐내는 '맥가이버' 영선부, 기본적으로는 수용복을 제작하지만 친해지면 규정을 살짝 어겨 바지에 고무줄도 넣어주고 주머니도 달아주는 양재부, 재소자들의 헤어스타일을 책임지는 재리부(재소자 이발), 직원들의 휴식과 피로를 담당하는 직리부(직원 이발)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작업 공장들이 있다. 주로 봉투를 붙이거나 비닐장갑을 포장하는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부터 목공, 용접, 원예 등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내고 수익을 내는 공장들도 있다. 교도소 밖 외부 공장으로 나가 일을 하거나 교도소 소유 목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외부통근(외통)자들도 있다. 의정부 교도소 농장과 공주교도소 고추장 공장 외통은 유명하기까지 하다.

▲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중 한 장면 ⓒ tvN


나는 감빵에서 취득한 세 가지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천주교인권위원회 입사 이력서에도 깨알같이 써넣었다. 당시 면접 때 '컴퓨터 잘 하냐'는 질문에 자격증을 보여주며 '아주 잘한다'고 부풀리기도 했다. 아마도 1:8의 경쟁률을 뚫고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취직이 된 데는 그 자격증이 역할을 했으리라.  

내 경우는 운 좋게도 감빵에서 딴 자격증을 이력서에 적어보기라도 했지만, 사실 교정시설 수용 중 딴 자격증은 담장 밖에서 큰 소용이 없다. 감빵 안 교육과 훈련이라는 것이 <슬빵> 김철민씨의 말처럼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격증을 따도 그와 관련된 일을 계속해야 숙련이 되는 것인데, 교정시설 교육과 훈련은 많은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자격증을 따면 그 교육장을 떠나야 한다. 역설적으로 자격증을 따면 그 분야의 일은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김민철의 대사처럼 '종이쪼가리 자격증'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죽하면 자동차정비 교육장에서는 폐차장에서 가져온 차들이나 이미 단종된 차들로 교육을 했기 때문에 자격증을 땄어도 사회에 나가면 자격증 취득 사실을 숨기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었다. 어디 자격증뿐이랴. 원예반에서 수년간 화분에 국화를 키우던 실력을 쌓고 나간 이들 중 밖에서 그 일을 생활을 이어간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교도소 내 작업이 출소 후 사회에서 쓸모 있는 경험이 되려면 교육 자체가 좀 더 실질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여기도 사람이 살아요' <슬빵>에서 찾은 의미

<슬빵>의 인기에 편승한 '나의 명랑한 감빵생활' 연재는 많은 분들이 관심 있게 읽어주고 격려해준 덕에 나 역시 재밌게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감옥인권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가 종영됐으니 <슬빵>의 내용 중 진짜 감빵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더 말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많은 시청자들이 '감빵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 사람들의 인권 역시 보호돼야 한다는 것에 공감했다면 충분하다.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감히 칭찬하고 싶다.

그동안 감옥인권운동은 수용자 처우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어 왔다. 수용자들에 대한 구타나 가혹행위, 욕설과 폭언들은 실제 많이 사라졌고 난방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됐으며, 밥이 모자라 다투는 일도 줄어들었다. 콜라, 사이다, 이온음료, 커피까지 구매할 수 있고, 수용자가 원하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법무부 장관 청원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들은 당연히 보장돼야 했던 권리들이 하나씩 회복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워낙 열악했던 예전에 비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지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용자 인권 옹호와 더불어 중요한 과제는 너무나도 열악한 교도관들의 근무환경과 처우가 향상되는 것이다. 구금시설 수용자 인권과 교도관의 노동기본권은 언제나 비례한다. 둘 중 어느 쪽 하나가 낮아짐으로써 다른 쪽이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도관이 제대로 대접받고 과중한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수용자들의 일상도 그만큼 나아진다. 물론 '나과장' 같은 사람은 어디나 있지만 말이다. 교도관 증원과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 확보와 인력 충원 역시 꼭 필요한 일임을 이 기회를 빌려 알리고 싶다.

▲ 감옥에서 적은 다짐 ⓒ 김덕진


앞선 글에서 밝힌 것처럼 2년 6개월의 감빵생활은 인권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나를 인권활동가의 길로 이끌어 16년간 이 자리에 있게 만들었다. 나도 잊고 있었는데, 출소를 앞둔 감옥 일기장에 위와 같은 다짐을 적어 둔 것을 발견했다. 감옥을 나오며 다짐한 결심을 아주 조금은 실천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에게도 칭찬을 좀 해 주고 싶다.

극 중에서 불현듯 이감을 가버린 고박사와 문래동 카이스트의 훗날이 궁금하다. 실제로 수개월 같이 살면서 정든 이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다른 방으로 전방되거나 다른 교정시설로 이감되어 사라져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게 매몰차게 굴고 그랬다.

<슬빵> 시즌2에 대한 기대와 추측성 기사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만, <슬빵>은 16부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신원호 피디와 이우정 작가 그리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고생했다는 박수를 보내드리며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아무리 슬기로워도 감빵생활은 살면서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인권활동 16년 차.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 구속돼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빵생활'을 하던 중, 열악한 구금시설 인권상황에 분노하며 인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출소 직후 유일하게 감옥인권활동을 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자유권 전문위원으로 전국 30여 개 구금시설에 대한 방문조사와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등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감빵' 수용자들의 인권 보장이 사회 전체 인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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