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남녀 상관없이 '그냥 벗는' 목욕탕, 야하지가 않네

독일의 혼탕 문화와 '야함'에 관한 고찰... 육체는 그저 '육체'일 뿐

등록|2018.01.31 20:30 수정|2018.01.31 20:30
"독일은 남녀 혼탕 문화야"라고 말하면, 열이면 열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수영복 입고?"

그렇지, 그렇다면 아마 덜 이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수영복 같은 건 없다.

"아니 그냥 빨가벗고!"

3주간 홀로 독일에 머물렀다. 피로와 호기심이 동시에 쌓인 나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근교 도시인 비스바덴(Wiesbaden)을 찾았다. 독일 도시 이름이 '-바덴'이면 온천이 흐르는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 비스바덴 역시 대표적인 온천 도시 중 하나이며, 독일에서 손에 꼽히는 부촌이기도 하다.

"여긴 수영복 안 입어" 쿨하게 대답하고 들어간 그곳

▲ 비스바덴의 길거리, 온천에 찾아가는 길이다. ⓒ 남지우


외관부터 화려한 사우나 건물에 들어서면 키를 받는다. 머문 시간에 따라 금액이 책정되는 시스템으로, 가격은 겨울 기준 시간당 6.5유로. 비싸지 않은 금액이다. 카운터 직원분은 "이 곳은 수영복을 입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직원분의 단호함에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이 수영복을 들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Ich weiß es schon"(이미 알아요~)라고 애써 쿨 한척 대답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눠서 설명해보자면 탈의실도 공용, 사우나도 물론 공용, 샤워실만 남녀가 따로 이용한다. 옷부터 같이 벗어야 된다는 말인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그냥 벗으면 된다.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것은 독일 사우나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이니 이 부분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옷을 벗고 샤워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한다. 그리고 사우나 입성! 내가 간 곳은 굉장히 큰 규모의 사우나 시설이었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는 온천탕과, 수영복 없이 수영하는 수영장, 그리고 아주 많이 뜨거운 사우나, 한국의 찜질방에도 있는 수면실 등으로 구성된다. 온천탕은 동양 사람인 내가 느끼기에도 무척 뜨거운 수준이고(그래서 그런지 독일 사람들은 잘 들어오지 않더라), 수영장은 굉장히 차갑다. 찬 물과 찬 공기를 선호하는 유럽의 문화가 반영된 것일 터.

사우나는 예외. 독일식 사우나는 우리의 것과 비교해도 훌륭하다. 매 정각 즈음에 사우나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수건을 깔고 앉는다. 그러면 체구 좋은 남자 직원분이 들어와서 뜨겁게 달궈진 돌에 민트향과 화한 느낌이 나는 물을 뿌려준다. 200% 수동이다. 그러면 사우나가 미친 듯이 뜨거워지고, 직원이 공기 중으로 큰 수건을 돌려서 뜨거운 공기가 얼굴과 몸으로 더 잘 닿게 만들어준다. 너무 뜨거워서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날 정도인데, 그 10분을 견디고 나오면 20년 묵은 피로가 안녕히 가신다. 경험할만한 순간이다.

▲ 표지판 1. 온천 입구로 안내를 해준다. ⓒ 남지우


남녀혼탕이 이상하다고? '나쁜 상상'의 자리는 없다

핵심은 여기다. 독일은 혼탕 사우나 문화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 걸까? 앞서도 말했지만 수영복 등의 '가리는' 물건 없이 그냥 알몸으로 입장한다. 우리가 평소 목욕탕에 갈 때 가는 그 모습으로 말이다. 나 역시 약간은 긴장하다가 목욕탕에 입성했는데, 그때의 느낌은 '헉 이것이 자연이구나'! 이곳에 5분 정도 있다 보면 '애초에 왜 여-남을 나눈 거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 정도로 서로의 알몸이 정말 이상하지 않다. 무엇을 상상하든 자연스럽고 편안한 곳이 바로 남녀혼탕이다.

온천이 넓다 보니 걷다 보면 다른 사람이랑 눈이 마주칠 수는 있지만, 서로의 몸을 훑어본다거나 하는 징후는 없다(심지어 사우나는 좁은데 사람은 많아서 거의 낑겨 앉아야 하는 데도, 잘 못하다 살결이 닿아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거기'가 보이면 어떡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눈이 있다 보니 남성의 성기가 '보이기'도 하고, 상대방도 내가 보이겠지만 그건 그냥 '보이는' 거다. 보는 게 아니라! 하지만 보여도 전혀 민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민망해하는 게 더 민망한 그런 분위기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사우나에서 독일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정이 없는 냉혈한이 되는 건 아니다. 수면실 간이침대가 눕혀지지 않아 낑낑대고 있더니 독일 언니가 직접 와서 손수 눕혀주기도 하고, 내 락커에 문제가 생겨서 열쇠를 들고 낑낑대고 있더니 독일 남자가 직원분께 손수 도움을 요청해 주기도 했다. 상황에 맞추어, 상대에 대한 배려와 그 배려심을 기반한 무시를 동시에 해낼 줄 아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 온천 입구로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사진 속은 온천 내부의 모습이다. ⓒ 남지우


말하고, 드러내는 육체는 야하지 않다

온천에서 멍을 때리면서 생각한 게 있다. 야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야하다고 학습해왔고, 특히나 여성의 육체는 일상적인 성적 대상화와 맞물려 더욱 야한 것이 되었다. 가슴이나 성기 등 '여성'의 특성이 부각되는 신체 부위는 그중에서도 제일 야한 것이 되어버렸다(남성의 몸과 남성기는 '야함'의 속성이 덜 부여된다. 남성의 탄탄한 몸은 '건강함' '용감함' '탄탄함' 등의 긍정적인 수식으로 묘사되고, 돌출형인 남성기 역시 '은밀하다' 여겨지는 여성기에 비해 더 많이 노출되니까).

사실 우리 육체 그 자체는 야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상이 야해지려면 '맥락'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을 둘러싼 줄거리, 분위기, 음악, 혹은 누군가의 페티쉬 등이 맥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나인 하프 위크> 라는 영화를 보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유혹적이고 성적인 자극에 따라 파프리카와 달걀 노른자까지 섹시하게 연출된다. 쉽게 말해서 분위기와 맥락 속에서 연출된 '파프리카'가, 우리 '육체' 그 자체보다 더 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연출되지 않은 우리 육체는 야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몰카가 설치되는 곳을 보면, 여자화장실을 필두로 강의실, 지하철 등 무궁무진하다. 나는 계속되는 몰카의 범람에 분노하기 앞서 솔직하게 든 심정이 있다. 아니, 여자들이 용변 보는 게, 그냥 강의 듣는 게, 계단 올라가는 게, 그게 야한가? 그걸 보고 싶나? 그걸 왜?

그러한 일상조차 야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몰카가 제작되고 소비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혹은 다수의) 한국 남성들은 왜 그렇게 탈맥락화된 상황에서조차, 다시 말해 맥락과는 상관없이 육체 그 자체에서 야함을 느낄까?

나는 그것이 '생리'라는 단어에조차 청소년들이 부끄럽다거나-야하다고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우리의 몸은 밝고, 넓고,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예를 들면 학교) 말해지지 않는다. 몸이 말해지지 않으니, 몸은 은폐되면서 신비화된다. 우리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은 신비롭고 만져질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쌓이고 쌓인다.

돌이켜보면 자궁, 난소, 나팔관 이런 명칭은 학창 시절부터 많이 배웠는데, 여성의 성기를 순우리말로 '보지'라고 부른다는 건 대학교 와서 처음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맥락이 없다면 육체는 야해질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그 야한 걸 어떻게 말해! 라고 성급하게 오해해온 건 아닐까?

우리 몸에 대해 말하고 배울 틈도 없이, 극도로 과하게 연출된 육체를 포르노를 통해 먼저 접하고 그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 결국 육체의 실체에 대한 학습은 더욱 느려지는 것이다. 모니터 너머의 허상으로서의 야한 육체를 먼저 인지하다 보니, 실제로는 야하지 않은 그냥 우리 '몸'을 바라볼 용기를 잃는다. 몸의 실체는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아지고 허상으로만 남으며, 그렇기에 우리 몸은 결국 그 자체로 야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나는 포르노 자체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포르노의 위험성은 의외로 이런 지점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야하지 않은 우리 몸을 당당하게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가정의 책임이고, 공교육의 책임이며,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한 대상화를 성범죄로 이어나가곤 하는 미천한 성의식을 지닌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훈련이다. 독일에서 혼욕 문화가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육체 그 자체는 결코 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인지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간혹 농담거리로 말해지곤 하는 혼탕 문화의 판타지 뒤에는, 이렇듯 건강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