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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도 뺏지 못한 교동법주의 맛과 향

[역사기행] 경주 최씨의 한이 서린 경주 교촌마을에 가다

등록|2018.02.01 13:23 수정|2018.02.01 13:23
'신라·첨성대·왕릉·불국사'

경북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키워드들입니다. 신라 천년의 고도였던만큼 경주는 신라시대 유적이 가득한 역사관광도시로 유명합니다. 또한 수학여행 단골 코스로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봤던, 그래서 시시할 거라는 편견으로 가득 찬 도시가 또한 경주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 시절 본 풍경만이 경주의 전부였을까요. 이번 경주 여행의 시작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경주에 깃든 또다른 역사와 전통을 찾아 지난 26일, 역사를 전공하는 친구들과 함께 경주를 찾았습니다.

▲ 교촌마을 탐방에 나선 일행들의 모습.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군 생활을 함께 한 동료이자 역사를 전공했다는 공통점으로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 ⓒ 김경준


교촌마을에는 치킨이 없다

경주만의 전통을 찾아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교촌마을'이었습니다. 처음 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마을 이름과 동명인 모 치킨 브랜드였습니다. 오죽하면 '여기 치킨 공장이 있나' 하는 생각에 입맛부터 다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교촌마을에는 치킨이 없다>는 책 제목처럼 이곳과 치킨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교촌마을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옛날 향교(고려·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가 있었던 데서 유래됐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경주향교(慶州鄕校)가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택입니다. 사실 고택 자체는 그리 희귀한 문화재는 아닙니다. 서울 북촌에만 가도 고택들이 즐비한 곳에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택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따라 역사적 의미는 달라집니다.

이곳 고택은 조선 영·정조 때 인물인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터를 잡은 이래 약 200년 동안 경주 최씨 가문이 대대로 살던 곳이었습니다. 경주 최씨 가문은 400년 동안 '9대 진사·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고 하여 대표적인 부자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죽하면 '경주 최부자'라는 별칭이 고유명사로 굳어졌을까요.

▲ 경주 최씨 고택 입구 ⓒ 김경준


▲ 안내문을 읽고 있는 일행의 모습 ⓒ 김경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씨 가문

그러나 경주 최씨 가문이 더 유명해진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경주 최씨 가문에는 대대로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육훈(六訓)'이 내려오는데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간 무명옷을 입어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경주 최씨의 후예들은 대대로 선조들이 남긴 육훈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崔浚: 1884~1970)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항일투쟁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그는 경주 최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했는데, 현재 교촌마을에 남아있는 고택 역시 그때 기증됐다고 합니다.

고택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읽으면서 치킨 생각에 입맛부터 다셨던 제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고택에 들어서니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추운 날씨 탓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고택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경주 최씨 고택에 붙은 편액. '대우헌(大愚軒)'은 '크게 어리석다'는 뜻으로 경주 최씨들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김경준


고택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편액(현판)'입니다. 보통 주인 자신의 호(號)를 따서 붙이곤 하는 편액은 그 의미에 따라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경주 최씨 고택은 편액부터 남다릅니다. '대우헌(大愚軒: 크게 어리석은 집)', '둔차(鈍次:재주가 둔한 버금)'.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편액 대신 스스로 어리석고 둔하다고 낮춰 부르는 이름 뿐입니다.

각각 최준 선생의 조부인 최만희 선생과 부친인 최현식 선생의 호를 본땄다고 합니다. 만석꾼 집안의 후예였지만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어리석고 둔함을 호로 삼을 정도라니. 역시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명성이 거저 생긴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 최씨가의 재산이 영남대로 넘어간 까닭은

현재 이 고택은 영남대학교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한겨레>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이 기사에 자세한 내막이 나오는데요. 이 사연은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대구대 설립자이자 이사장이었던 최준 선생에게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찾아와 "한수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며 인수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이에 최준 선생은 "대학에는 주인이 없다"며 무상으로 양도하는 것은 물론 "상거래처럼 계약서를 써서도 안 된다"며 '구두 계약'의 형식으로 운영권을 삼성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뿐만 아니라 대구대 역시 박정희 정권에 헌납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납니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기존에 인수한 청구대와 대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출범시켰습니다. 경주 최씨 가문의 재산이 통째로 박정희 정권에 넘어간 것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최준 선생은 "왜 멋대로 박가(박정희)에게 파느냐"며 노발대발했지만 경주 최씨 가문은 이미 학교 운영권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경주 최씨 가문의 선산 등 경주 최씨가 대대로 축적한 재산은 지금도 모두 영남대 소유입니다. 고택 앞에 붙어있는 '이 고택은 학교법인 영남학원에서 소유하고 있다'는 문구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 고택 입구에 붙은 안내판.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다'는 영남대학교 총장 명의의 문구가 선명하다. ⓒ 김경준


조선 숙종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경주 교동법주'

고택을 나서면 바로 옆에 '교동법주 도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동법주(경주법주)는 경주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빚어온 비주(秘酒)로 조선 숙종 때 궁중요리를 담당하는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빚기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주인만큼 만드는 데 드는 정성도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9월에서 이듬해 4월 사이에만 빚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데,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어 무려 100여일을 숙성시켜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숙성된 법주는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를 냅니다. 술을 빚을 때 쓰는 고택 내의 샘물도 그 맛의 비결로 알려져 있습니다. 100년이 훌쩍 넘은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샘에 걸쳐있어 맹물에서도 이미 구기자향이 날 정도로 물맛이 좋기 때문입니다.

▲ 경주 최씨 고택 바로 옆에 자리잡은 '교동법주' 도가 ⓒ 김경준


▲ 교촌마을에 자리잡은 '교동법주 도가'에서는 방문객들에게 법주를 판매한다. ⓒ 김경준


술의 맛과 향마저 빼앗아가려 했던 박정희

그런데 박정희는 이 교동법주의 향과 맛마저 빼앗아 가려고 했습니다. 국내최고 청주 최부자댁 교동법주 이 기사에 따르면, 원래 교동법주는 경주법주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당시 교동법주의 맛에 반했던 박정희가 "더 많이 만들 수 없느냐"고 지시하면서, 유사제품을 대량 상품화하여 보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졸지에 이름을 빼앗긴 경주 최씨 가문은 '경주 교동법주'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술을 빚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국선의 후예들은 이름은 빼앗겼어도 그 맛과 향만큼은 끝내 지켜냈습니다. 현재 최국선의 10세손인 최경 선생이 기능보유자로 그 맥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맛과 향기는 시중에 파는 보급형 법주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도 교촌마을에는 원조 경주법주의 명맥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교동법주가 경주 최씨의 마지막 자부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니 이제 경주에 들르게 된다면 경주 최씨들의 넋과 한이 서린 교촌마을을 찾아 법주 한 잔 걸치며 지나간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덧붙이는 글 [정보] 교촌마을 및 교동법주 도가 가는 법

주소: 경북 경주시 교촌안길 19-2 (경주고속버스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소요)
전화 : 054)772-2051 / 054)772-5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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