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하차 이어 조기 종영... EBS의 부끄러운 입장문
[取중眞담] 조기 종영 택한 <까칠남녀>... 출연자들 "나쁜 선례 안 되길" 비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결국 EBS <까칠남녀>는 '인권' 대신 '혐오'를 선택한 걸까. EBS는 6일 입장문을 내고 당초 19일 종영 예정이었던 <까칠남녀>를 2월 5일로 2주 앞당겨 종영했다고 발표했다. 출연진과 제작진은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1년 넘게 함께 한 <까칠남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은하선 강제 하차 이후 녹화 '보이콧'까지 이어져
▲ EBS 토크쇼 <까칠남녀>에 출연 중인 칼럼니스트 은하선씨. ⓒ EBS
칼럼니스트 은하선씨는 지난 1월 13일 <까칠남녀> 마지막 2주분 녹화를 앞두고 EBS 측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하차 통보를 받았다. EBS <까칠남녀> 책임피디에 따르면 은하선씨의 하차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은하선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섹스토이 이미지 중 하나가 십자가 모양이라는 것과 은하선씨가 개인 SNS 계정에 퀴어문화축제 후원 계좌를 <까칠남녀> 담당 피디의 전화번호인 양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담당 책임피디는 이러한 점을 들어 "은하선씨가 방송 출연자로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은하선씨의 생각은 달랐다. 은하선씨는 자신이 하차 통보를 받은 시점이 <까칠남녀>가 2주에 걸쳐 '성소수자 특집'을 방송하고 난 다음이라고 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운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이후 일부 보수 학부모 단체는 EBS 일산 신사옥을 점거하고 "<까칠남녀>를 폐지하라"면서 매일 같이 농성을 벌였다. 은하선씨는 해당 방송에서 '바이섹슈얼'로 소개됐다. <까칠남녀> 시청자 게시판은 "교육방송에서 동성애가 웬 말이냐"는 항의성 도배글로 가득 찼다.
은하선씨는 '성소수자 특집 방송'에 나왔던 자기 자신을 강제 하차시킨 것이 '성소수자 탄압'이라 해석했고 학부모 단체의 요구에 EBS가 굴복을 한 것이라고 보았다. <까칠남녀>의 출연진 중 손아람·손희정·이현재씨가 은하선씨의 "성소수자 탄압"이란 주장에 동의하며 동시에 출연을 보이콧했고 <까칠남녀> 녹화가 전면 취소됐다.
이후 제작진은 남은 출연진만으로 녹화를 강행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다른 출연진 중에서도 '보이콧'까지는 아니지만 방송이 정상화되기 전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까칠남녀> 2주분 녹화는 '무기한 연기'됐고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EBS <까칠남녀> 조기 종영 사실이 알려지자 패널 은하선씨는 개인 SNS에 "EBS는 출연자와 합의에 실패한 게 아니라 호모포바이와의 선긋기에 실패했다"면서 "이 모든 일들이 성소수자 특집 방송 전후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덮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보이콧 의사를 밝힌 패널 중 한 명인 평론가 손희정씨는 6일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은하선 하차 결정 당사자인) 책임피디로부터 전화를 받긴 했으나 그것이 '설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오히려 패널들이 책임피디를 설득하려고 했으니 저희가 설득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손희정씨는 "EBS가 공영방송으로서 이번 일에 어떻게 제대로 된 책임을 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길 바란다"며 "<까칠남녀>가 나쁜 선례로 남지 않길 바란다"고 EBS의 조기 종영 결정을 비판했다.
'성소수자' 빠진 EBS의 사회적 약자
▲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중 한 장면. JTBC 예능 <아는 형님>을 패러디해 '모르는 형님'이라는 컨셉으로 진행됐다. ⓒ EBS
손희정 평론가는 <까칠남녀>가 "나쁜 선례로 남지 않길 바란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EBS는 은하선씨의 강제 하차 결정에 이어 조기 종영이라는, '성소수자 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2015년 JTBC <선암여고 탐정단>의 동성 간 키스신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결정을 받아 논란이 인 바 있다. <까칠남녀>의 조기 종영 역시 성소수자 가시화의 '흑역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성소수자가 단지 유머의 소재가 아닌 진지한 접근으로 예능에 출연했던 건 <까칠남녀>가 처음이었기에 이번 조기 종영의 파장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EBS는 <까칠남녀>의 조기 종영을 알리는 입장문에서 "상대적 소수자와 이익 실현이 힘든 계층의 이익이 반영되도록 살피는 것은 공영방송의 중요한 책무"라면서 그 '사회적 약자'로 어린이와 장애인, 노인, 다문화가정을 들었다. "성소수자 탄압"이라고 불린 <까칠남녀> 은하선 하차에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듯 EBS의 '사회적 약자'의 정의 안에 성소수자는 없었다.
또 해당 입장문에서 EBS는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면서 "<까칠남녀>가 그러한 범주 안에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했다. 물론 <까칠남녀>는 방송하는 동안 사회에 내재한 여러 여성혐오 이슈에서 목소리를 냈고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EBS는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고 사실상 보수 학부모 단체의 "<까칠남녀> 폐지" 입장에 손을 들어준 꼴이 됐다. 과연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선뜻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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