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모이] 내 나이 70에도 봄이 온다면...

사랑하는 딸에게 부치는 편지 | 2018 2월 8일

등록|2018.02.08 09:06 수정|2018.02.08 09:06

▲ ⓒ 조상연


회사의 산책로에 매일 보는 꽃이지만 볼 적마다 예쁘고 또 예뻐서 자주 해주는 말이 있다. "아이구 우리 예쁜이 사랑해" 그러면 꽃들도 바람에 흔들흔들, 어떤 꽃은 건들건들 앞다투어 "나두" 한단다.

이렇게 우스운 생각을 하며 산책을 마치고 휴게실로 돌아와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김광섭 시인의 시집을 펼치다가 깜짝 놀라 시집을 떨어트렸다. 아버지와 함박꽃의 대화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어있는 경이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찻잔의 찻물이 바닥을 보일 즈음 감동이 누그러들자 이번에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김광석 시인만 아니었으면 '사랑'이라는 시는 내 건데!" 하며 또 혼자서 웃으니 옆의 동료들이 뭣도 모르면서 함께 웃어주는구나. 아버지가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버지도 꿈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련?

내 나이 70에도 봄이 온다면.

이다음 내 나이 70에도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나이 70에 맞이하는 봄날, 나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눈이 부셔 어쩔 줄 모르는 찬란한 정열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 70에 맞이하는 봄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 전주행 호남선 기찻길옆 봄 아지랭이 속의 솜털같은 민들레 꽃씨에게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이 남아 있었으면 참 좋겠다.

내 나이 70에 맞이하는 첫 봄날, 나는 시(詩)를 쓰리라. 풀먹인 책상보가 하얗게 덮인 앉을뱅이 책상 앞에 앉아 오래 된 만년필을 꾹꾹 눌러가며 남들이 내 시를 읽으면 마음이 둥글어지는 그런 시를 쓰리라.

시를 쓴 다음 제일 먼저 사랑하는 딸에게 보여주리라.

그리고, 내 나이 70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첫 봄날에
이 말을 꼭 듣고야 말리.

"아이고! 우리 아버지 진짜백이 시인이 됐구랴? 갑시다 막걸리 마시러......"

아버지 나이 70에 꿈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도 카시미론 두꺼운 이불에 몸을 누이면 구름인 듯 떠있고 분홍빛 바람이 이마를 스칠 때면 안 될 건 또 뭐냐며 은근히 오기도 생긴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시 한 편 동봉하니 잘 읽어보아라. 시집의 첫머리에 있는 시인의 말이다.

-

시인의 말

- 권오영

처음이야.
느린 계절을 읽다가 잠들었다.

덜컹거리는 잠의 문은 자주 흔들리고
나는 그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똑같은 꿈속에서 너무 많은 처음을 지운다.

계절을 지운다.
바다, 바람, 모래, 나를 지우고 나니
내가 남았다.
봄이다

천년의 시작 '너무 빠른 질문' 서문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