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와 고다이라의 포옹, 감동적인 귓속말
[현장] '최강 스케이터' 두 명의 뜨거웠던 평창... 베이징올림픽은? "몰라요"
▲ 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37초33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 선수를 금메달을 획득한 일본 고다이라 선수가 맞이하며 서로 위로와 격려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아웃코스에 선 이상화(30)가 긴장한 듯 양팔을 흔들었다. 빙판을 응시하던 그가 스타트라인에 섰고, 이내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삭삭' 소리를 내며 쾌속 질주. 이상화가 100m 라인을 통과하자 전광판에 '-0.06'이라고 떴다. 앞서 경기를 펼친 고다이라 나오(일본, 33)의 100m 기록보다 0.06초 앞선다는 의미였다. 관중석에선 태극기가 요동쳤고, 환호성으로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혔다.
한 번의 코너를 돌고, 다시 한 번의 코너를 돌고, 마지막 직선주로. 허리를 깊이 숙인 이상화는 혼신의 힘을 다했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과는 37초 33. 고다이라보다 0.39초 늦은 기록이었다. 이상화는 이날 자신이 갖고 있던 올림픽신기록을 넘어선 고다이라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내줬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이상화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전 두 대회(밴쿠버, 소치)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상화는 소치동계올림픽 이후 무서운 상승세를 보인 경쟁자 고다이라를 넘지 못했다(관련기사 : 이상화, 500m 37초33으로 눈물의 은메달).
▲ 이상화와 고다이라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 출전해 역주를 하고 있다. ⓒ 이희훈
▲ 이상화와 고다이라 '격려와 위로' ⓒ 이희훈
뜨거운 경쟁을 펼친 두 선수는 경기만큼이나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태극기를 든 이상화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일장기를 든 고다이라에게 다가갔고, 경기장 가운데서 만난 두 선수는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함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선수가 함께 빙판을 돌자 관중석에선 이상화의 이름과 함께 "울지마"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세계신기록 세울 때 느낌이었는데..."
경기 직후 믹스트존에서 기자들을 만난 이상화는 "눈물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제 끝났구나, 드디어 끝났구나'라는 후련함과 안도감이었다"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금메달을 못 따 슬퍼한 게 아니다"라며 "(올림픽) 3연패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단 경기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라고 덧붙였다.
▲ 인사하는 이상화와 고다리아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37초33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한 뒤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 오른쪽은 금메달을 딴 일본 고다이라 선수. ⓒ 이희훈
경기 직후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이상화는 "(고다이라와) 중학교 때부터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함께 했다"라며 "고다이라가 먼저 내게 '존경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나도 '너는 (이번 올림픽에서) 1500m도 탔고, 1000m도 타는데 500m에서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낸 것을 보니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두 사람은 기자회견장에서 나란히 앉아서도 경기 직후 했던 이야기를 공유했다.
"가장 먼저 한국어로 '잘했어'라고 이야기했다. 왜냐면 이상화에게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에 축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계속 우러러 볼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 고다이라 나오
"제가 메달을 따면 (고다이라)가 늘 축하해줬다. 저희가 어려울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됐다. 그래서 '1500m, 1000m, 500m 모두 경기한 것을 리스펙트(존경)한다'고 했다." - 이상화
이날 은메달을 비롯해 올림픽 시상대에 선 모습이 익숙한 이상화지만, 2014년 소치올림픽 이후엔 부상에 시달리며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관련기사 : 눈물 쏟은 이상화... 부상 딛고 펼친 '감동의 레이스'). 이상화는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는 질문에 "(부상에 시달렸던) 지난해 너무 힘들었다. 몸은 앞으로 가는데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라며 "자유자재로 스케이팅을 할 수 없었고 누가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끌어올리기까지 시간이 좀 길었다"라고 떠올렸다.
▲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가 18일 진행된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 후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며 웃음을 보이고 있다. 이날 이상화는 은메달, 고다이라는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 소중한
▲ 이상화 은메달!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37초33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시상대에 오른 이상화 선수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이희훈
이상화는 그럼에도 이날 100m 기록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데 대해 "저도 빠르다는 걸 마지막 코너 진입할 때까지 온몸으로 느꼈다.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현재 500m 세계신기록 36초36은 이상화의 기록이다), 그런 느낌이었다"라며 "너무 빠른 속도를 오랜만에 느껴서 마지막 코너에서 실수했다. 이미 경기는 끝났으니 후회하진 않는다. 정말 값진 경기였다"라고 말했다.
돈독한 우정... "베이징 갈 거야?" "네가 하면"
이상화, 고다이라 두 선수는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로의 장단점을 묻는 질문에 고다이라는 "3년 전 제가 서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위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경기 바로 직후 네덜란드로 가야 했다. 그때 공항에 가는 택시비를 이상화가 내줬다. 그때 제가 이겼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정말 친절하게도 저를 도와줬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고다이라가 "스케이터로서도 굉장히 훌륭한 선수고 제 친구다"라고 말하자 이상화도 "너무 귀엽다"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상화는 "자기 관리를 너무 잘한다"라며 "누가 잘 탔든, 못 탔든 간에 서로 격려를 많이 해줬고 저에겐 남다른 스케이터라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고다이라를 치켜세웠다. 이어 "제가 일본에 가면 좋아하는 걸 계속 선물해줬다. 제가 일본 식품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걸 많이 선물해줘서 저도 한국 전통 식품을 전해준 적이 많다"라며 "시즌이 끝나도 서로 택배를 주고받을 정도다. 우리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상화가 "(고다이라의) 단점은 말할 게 없다"라며 웃자, 고다이라는 한국어로 "고마워"라고 답하기도 했다.
▲ 이상화의 '눈물' ⓒ 이희훈
이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인 두 선수. 그들의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계획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고다이라는 이와 관련된 질문에 한국어로 "몰라요"라고 짧게 말하면서 웃음을 내보였다.
이상화는 "은퇴라고 말하긴 그렇다. 경기장에선 (저를) 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라면서도 "일단 지금은 제대로 쉬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월드컵을 돌면서 고다이라에게 '베이징 갈 거냐'고 물어봤다"라며 "그때 고다이라가 '네가 하면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땐 정말 재밌게 넘겼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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