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답답함은 여느 때보다 높은 위치에 도달했다. 100여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약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물론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권 국가로 도약했다. 정치적으로는 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실천되는 몇 안 되는 시스템을 확립해 내었다. 문화적으로도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한류 열풍'이 사그라들기는커녕 그 카테고리와 대상 국가들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하나하나의 '개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막론하고 갈수록 커져가는 사회적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부재한 현실에 기인한다. 여전히 60년대 혹은 80년대식 집단주의가 횡횡하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한국의 불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 담론집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렇기에 반갑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직된 곳으로 평가받고 가장 '개인'없는 '조직'으로 생각되는 법조계에서 용기있는 외침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주의'를 자신만 생각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기성 풍토와 달리,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문유서 판사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제목만 없었더라면 오히려 <공동체주의자 선언>으로 이해되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보다 공동체 문제에 대한 것이 많다. 어떻게 하면 더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공동체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온전한 '개인'이라는 개념은 이론적으로는 성립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작게는 가족부터 더 넓게는 학교와 지역 공동체, 그리고 국가라는 집단 혹은 사회에 둘러싸인 채 자랐다. '나'라는 개인을 둘러싼 모든 정체성과 특징들이 인간 공동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라면, 자연스레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자유를 보장받고, 행복 추구의 권리를 실현시켜 나가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담론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치를 높게 인식하지 않았고, 오로지 '집단'과 그 집단을 이끄는 사상 혹은 지도자만을 중요시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정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깊게 고민하려는 시도도 부재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의 공동체 논의라고는 기껏해야 격렬한 이념 다툼이 9할이었을 정도로 영양가 없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인주의를 존중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잘 지켜주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또 개인들끼리의 상호 침해가 없어지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존중할 것인지,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할 지, 그리고 어떻게 더 나은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문유석 판사가 살아가는 법적 영역에서도 '개인'의 삶에 집중하게 될 때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야기, 당장의 생존에 눈이 멀어 묻지마 투자에 사기당한 이들의 애환, 그리고 국가적 재난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가까이서 느낄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판결은 종이 쪼가리를 넘어서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다루는 통로가 된다. 더 깊은 고민이 가능해지고, 더 나은 공동체가 그런 판결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공동체의 위기'라고들 한다. 세대 갈등부터 지역 갈등, 그리고 이념 갈등까지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늘 이런 다툼 속에서 지쳐나가지 말고, 한 발 자국 뒤로 물러나 '나'라는 개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이런 여유를, 이런 생각의 전환을 가질 때 역설적으로 더 건강하고 튼튼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권 국가로 도약했다. 정치적으로는 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실천되는 몇 안 되는 시스템을 확립해 내었다. 문화적으로도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한류 열풍'이 사그라들기는커녕 그 카테고리와 대상 국가들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하나하나의 '개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막론하고 갈수록 커져가는 사회적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부재한 현실에 기인한다. 여전히 60년대 혹은 80년대식 집단주의가 횡횡하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한국의 불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 담론집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렇기에 반갑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직된 곳으로 평가받고 가장 '개인'없는 '조직'으로 생각되는 법조계에서 용기있는 외침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주의'를 자신만 생각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기성 풍토와 달리,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2015 ⓒ 문학동네
진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문유서 판사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제목만 없었더라면 오히려 <공동체주의자 선언>으로 이해되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보다 공동체 문제에 대한 것이 많다. 어떻게 하면 더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공동체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온전한 '개인'이라는 개념은 이론적으로는 성립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작게는 가족부터 더 넓게는 학교와 지역 공동체, 그리고 국가라는 집단 혹은 사회에 둘러싸인 채 자랐다. '나'라는 개인을 둘러싼 모든 정체성과 특징들이 인간 공동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라면, 자연스레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자유를 보장받고, 행복 추구의 권리를 실현시켜 나가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담론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치를 높게 인식하지 않았고, 오로지 '집단'과 그 집단을 이끄는 사상 혹은 지도자만을 중요시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정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깊게 고민하려는 시도도 부재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의 공동체 논의라고는 기껏해야 격렬한 이념 다툼이 9할이었을 정도로 영양가 없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인주의를 존중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잘 지켜주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또 개인들끼리의 상호 침해가 없어지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존중할 것인지,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할 지, 그리고 어떻게 더 나은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문유석 판사가 살아가는 법적 영역에서도 '개인'의 삶에 집중하게 될 때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야기, 당장의 생존에 눈이 멀어 묻지마 투자에 사기당한 이들의 애환, 그리고 국가적 재난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가까이서 느낄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판결은 종이 쪼가리를 넘어서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다루는 통로가 된다. 더 깊은 고민이 가능해지고, 더 나은 공동체가 그런 판결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공동체의 위기'라고들 한다. 세대 갈등부터 지역 갈등, 그리고 이념 갈등까지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늘 이런 다툼 속에서 지쳐나가지 말고, 한 발 자국 뒤로 물러나 '나'라는 개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이런 여유를, 이런 생각의 전환을 가질 때 역설적으로 더 건강하고 튼튼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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