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고도 3399m에서 일으킨 몸의 반란
[안데스 자전거원정 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지난해 회사에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었다. 장기근속자 6개월 무급휴가. 내가 첫 번째 신청자가 됐다. 내 생애 가장 긴 휴가를 오직 2가지만을 위해 쓰기로 했다. 자전거 여행과 독서. 첫 번째 소원을 위해 지난 3개월 자전거 타기와 야영훈련을 했다. 그리고 지인들과 함께 37일간의 남미 자전거 원정을 떠난다. 참가자는 24번의 해외 원정 경험이 있는 김광옥 목사(62)와 전업주부 박정희씨(50), 그리고 직장여성인 나(58), 이렇게 셋이다. 3인의 좌충우돌 안데스 자전거 원정기를 소개한다 - 기자 말
고산병의 시작
가족이 있는 곳으로부터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는 불안감이 없다. 이는 필시 사람들 때문이리라. 그제 밤 교민 김선택 선생님 가족의 환대와 현지인 인디오 여대생 케이나의 친절, 그리고 푸짐한 한식으로 식탁을 차려내는 교포 게스트하우스의 인심이 낯선 곳의 여행자를 이처럼 안도케하는 것이다.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만끽했다. 김 목사님과 나눈 삶의 가치에 대한 얘기는 리마에서 받은 푸짐한 영혼을 위한 식탁이었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내 영역밖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 37일간의 이번 남미 여정은 앞으로 나를 말하는 일부가 될 것이다.
시장에 들러 아보카도와 옥수수를 사고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쿠스코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을 나온 리마하숙집의 청년 호세. 아직 학교에 있어야 할 호세는 지금 작년에 시작한 이 게스트하우스 일을 도우며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호세의 아버지는 두 해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불과 54세에 훌쩍 떠난 아버지의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호세의 엄마는 남편에게 이민자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감싸 안는 대신 사업으로만 내몰았던 시간을 후회하는 일로 힘들었고 호세는 기둥을 잃은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엄마는 곧 스스로 서는 용기를 냈다. 요리 솜씨가 남달랐던 엄마는 그 실력을 프로로 키우기 위해 TV의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레시피를 연구하고 실험했다. 이제는 리마에서도 제대로 된 한식을 낼 수 있게 되었다. 호세 엄마가 차린 점심으로 리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비빔밥의 참기름 향이 식탁뿐만 아니라 석별의 마음까지 감쌌다.
크루즈델솔(Cruz Del Sur)버스를 탑승하는 절차는 공항의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일이 여권을 티켓과 대조하고 얼굴 촬영까지 했다. 남미의 치안에 대한 경종으로 보였다. 케이나도 함께 버스에 올랐다. 쿠스코까지 우리의 대원이 되기로 한 케이나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리마를 벗어나 1시간 30분쯤을 달린 뒤에 산에 나무가 보이고 과수에 열매가 달린 경작지가 보였다. 식물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땅에서 붉은 꽃이 보이자 폐는 절로 깊은 숨으로 바뀌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붉은 언덕과 광고판과 주유소만 존재하는 기묘한 세계로부터 비로소 탈출에 성공한 기분을 폐가 먼저 알았으리라.
새벽 2시 40분, 정희씨가 구토를 하려고 한다. 고산병약, 소로체 필과 따뜻한 물을 주었다. 메스꺼움이 조금 가라앉는단다. 이카(Ica)와 나스카(Nasca)를 지난 차는 시속 50km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 안데스산맥을 오른다.
목사님도 울렁증으로 잠시도 잠들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내 아침이 오고 운무 속에서 해발 3,399m의 쿠스코( Cusco)가 우리를 맞았다.
택시로 이동해 숙소를 정했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거닐었다. 광장은 외국인으로 가득 찼다. 나도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전거의 포장을 풀었다. 목사님의 자전거는 손상이 되었고 내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헐거워져있다.
찬란한 제국, 슬픈 쿠스코
해발고도 40m 미만의 서울에 살면서 836m의 북한산을 오르내린 것이 전부인 내게 해발 3399m 쿠스코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뇌는 산소부족의 경고를 내 온몸으로 발신했다. 머리는 두개골을 반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아프고 토할듯한 메스꺼움이 계속되었다. 평균해발고도 4천m의 안데스산맥을 달려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이 고산병에 적응을 해야 한다. 이 여정의 한순간도 남북 길이 7천 km의 이 안데스산맥의 품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누룽지를 먹다가 결국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아르마스광장을 천천히 거닐며 내 뇌가 2천m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현재의 처지에 길들여지길 기다렸다. 먹은 것이라곤 잉카콜라 한 모금. 어제 아침부터 만 하루 이상 식사를 못했다. 입은 계속 타는 듯 마르고 온몸은 춥다·더웠다를 반복했다.
로션 뚜껑을 열자마자 내용물이 솟구치고 스틱커피 봉지와 라면 봉지는 내 뇌속처럼 빵빵하게 부풀었다.
결국 내일 자전거 주행 대신 대중교통으로 우루밤바(Urubamba),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 그리고 마추픽추까지 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비행기와 버스화물로 이곳까지 온 자전거를 조립하고 발견한 손상 부분을 이곳 쿠스코의 수리점에서 잉카인의 솜씨로 얼마나 완전하게 수리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잉카인의 면도날 하나 들어갈 수 없게 돌을 가공하던 신묘한 솜씨를 믿어볼 수밖에.
단식과 게움, 오한으로 나는 결국 2시에 자전거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호스텔에서 계속 뜨거운 코카차를 마시며 두통과 메스꺼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자전거는 온전하게 돌아왔다. 목사님은 상태가 호전되었고 정희씨의 두통은 그대로였다. 나도 저녁이 와서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진정되었다.
낯선 곳에서 온몸이 일으키는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저녁식사로 익숙한 음식을 찾았다. 하지만 한인이 운영하는 사랑채 식당은 만석이었다. 라면을 사서 호스텔로 돌아왔다. 목사님의 문명강의를 찬 삼은 특별한 저녁식사가 되었다.
나는 쿠스코가 슬프다. 교회가, 수도원이, 광장이 슬프다. 마을언덕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색실로 치장한 오배하(oveja 새끼양)를 안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잉카 여성의 미소가 슬프다. 교회의 주춧돌로만 남은 태양의 신전, 세계의 배꼽이 슬프다.
고산병의 시작
▲ 세상의 중심이라는 쿠스코, 짧은 잉카제국의 영화는 돼지치기였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무너진 잉카제국의 광장은 이제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 강복자
가족이 있는 곳으로부터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는 불안감이 없다. 이는 필시 사람들 때문이리라. 그제 밤 교민 김선택 선생님 가족의 환대와 현지인 인디오 여대생 케이나의 친절, 그리고 푸짐한 한식으로 식탁을 차려내는 교포 게스트하우스의 인심이 낯선 곳의 여행자를 이처럼 안도케하는 것이다.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만끽했다. 김 목사님과 나눈 삶의 가치에 대한 얘기는 리마에서 받은 푸짐한 영혼을 위한 식탁이었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내 영역밖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 37일간의 이번 남미 여정은 앞으로 나를 말하는 일부가 될 것이다.
시장에 들러 아보카도와 옥수수를 사고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쿠스코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을 나온 리마하숙집의 청년 호세. 아직 학교에 있어야 할 호세는 지금 작년에 시작한 이 게스트하우스 일을 도우며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호세의 아버지는 두 해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불과 54세에 훌쩍 떠난 아버지의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호세의 엄마는 남편에게 이민자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감싸 안는 대신 사업으로만 내몰았던 시간을 후회하는 일로 힘들었고 호세는 기둥을 잃은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엄마는 곧 스스로 서는 용기를 냈다. 요리 솜씨가 남달랐던 엄마는 그 실력을 프로로 키우기 위해 TV의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레시피를 연구하고 실험했다. 이제는 리마에서도 제대로 된 한식을 낼 수 있게 되었다. 호세 엄마가 차린 점심으로 리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비빔밥의 참기름 향이 식탁뿐만 아니라 석별의 마음까지 감쌌다.
▲ 이민후 낯선 곳에서의 사업에 내몰린 남편이 훌쩍 떠나고서야 남편이 짊어졌던 짐의 무게를 가족이 알게 되었다. 부인은 한식을 공부하고 지구의 반대편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부합하는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아들 호세가 힘이 되어주고 있다. ⓒ 강복자
크루즈델솔(Cruz Del Sur)버스를 탑승하는 절차는 공항의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일이 여권을 티켓과 대조하고 얼굴 촬영까지 했다. 남미의 치안에 대한 경종으로 보였다. 케이나도 함께 버스에 올랐다. 쿠스코까지 우리의 대원이 되기로 한 케이나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 버스정류장의 봇짐에 자꾸 마음이 간다 ⓒ 강복자
리마를 벗어나 1시간 30분쯤을 달린 뒤에 산에 나무가 보이고 과수에 열매가 달린 경작지가 보였다. 식물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땅에서 붉은 꽃이 보이자 폐는 절로 깊은 숨으로 바뀌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붉은 언덕과 광고판과 주유소만 존재하는 기묘한 세계로부터 비로소 탈출에 성공한 기분을 폐가 먼저 알았으리라.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의 소중함을 안데스의 고원을 달리면서 실감할 수 있다. ⓒ 강복자
새벽 2시 40분, 정희씨가 구토를 하려고 한다. 고산병약, 소로체 필과 따뜻한 물을 주었다. 메스꺼움이 조금 가라앉는단다. 이카(Ica)와 나스카(Nasca)를 지난 차는 시속 50km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 안데스산맥을 오른다.
목사님도 울렁증으로 잠시도 잠들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내 아침이 오고 운무 속에서 해발 3,399m의 쿠스코( Cusco)가 우리를 맞았다.
택시로 이동해 숙소를 정했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거닐었다. 광장은 외국인으로 가득 찼다. 나도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전거의 포장을 풀었다. 목사님의 자전거는 손상이 되었고 내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헐거워져있다.
▲ 한국에서부터 나와 동일한 거리를 박스 속에서 함께 이동해온 자전거를 쿠스코에서 풀었다. ⓒ 강복자
찬란한 제국, 슬픈 쿠스코
해발고도 40m 미만의 서울에 살면서 836m의 북한산을 오르내린 것이 전부인 내게 해발 3399m 쿠스코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뇌는 산소부족의 경고를 내 온몸으로 발신했다. 머리는 두개골을 반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아프고 토할듯한 메스꺼움이 계속되었다. 평균해발고도 4천m의 안데스산맥을 달려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이 고산병에 적응을 해야 한다. 이 여정의 한순간도 남북 길이 7천 km의 이 안데스산맥의 품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누룽지를 먹다가 결국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아르마스광장을 천천히 거닐며 내 뇌가 2천m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현재의 처지에 길들여지길 기다렸다. 먹은 것이라곤 잉카콜라 한 모금. 어제 아침부터 만 하루 이상 식사를 못했다. 입은 계속 타는 듯 마르고 온몸은 춥다·더웠다를 반복했다.
로션 뚜껑을 열자마자 내용물이 솟구치고 스틱커피 봉지와 라면 봉지는 내 뇌속처럼 빵빵하게 부풀었다.
결국 내일 자전거 주행 대신 대중교통으로 우루밤바(Urubamba),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 그리고 마추픽추까지 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비행기와 버스화물로 이곳까지 온 자전거를 조립하고 발견한 손상 부분을 이곳 쿠스코의 수리점에서 잉카인의 솜씨로 얼마나 완전하게 수리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잉카인의 면도날 하나 들어갈 수 없게 돌을 가공하던 신묘한 솜씨를 믿어볼 수밖에.
단식과 게움, 오한으로 나는 결국 2시에 자전거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호스텔에서 계속 뜨거운 코카차를 마시며 두통과 메스꺼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 전통복장으로 치장한 새끼양과 함께 방문객의 모델로 생활을 이어가는 형편이 잉카제국의 허망한 몰락과 겹쳐져 애처롭고 슬프다. ⓒ 강복자
자전거는 온전하게 돌아왔다. 목사님은 상태가 호전되었고 정희씨의 두통은 그대로였다. 나도 저녁이 와서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진정되었다.
낯선 곳에서 온몸이 일으키는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저녁식사로 익숙한 음식을 찾았다. 하지만 한인이 운영하는 사랑채 식당은 만석이었다. 라면을 사서 호스텔로 돌아왔다. 목사님의 문명강의를 찬 삼은 특별한 저녁식사가 되었다.
나는 쿠스코가 슬프다. 교회가, 수도원이, 광장이 슬프다. 마을언덕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색실로 치장한 오배하(oveja 새끼양)를 안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잉카 여성의 미소가 슬프다. 교회의 주춧돌로만 남은 태양의 신전, 세계의 배꼽이 슬프다.
◆페루인들이 권하는 고산병 대처법 |
잉카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에 처음 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기대에 상응하는 대가를 먼저 치르게 된다. 해발 고도 3,399m의 쿠스코에서의 고산병을 진정시키기 위해 쿠스코 사람들은 아래의 몇 가지를 권한다. -쿠스코로 오기 직전에 과식을 피할 것 -쿠스코로 여행 직전과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하루 6~8잔의 물을 마실 것 -쿠스코의 숙소에 도착하면 몇 분 동안 누워서 쉴 것 -숙소 어디에서나 무료로 제공하는 코카 차를 마실 것. 레몬 캔디를 곁드려도 좋다. -걷거나 계단을 오를 때 과격한 움직임을 삼갈 것. |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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