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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사망자 타살, 왜 국가가 인정하지 않나"

위원회 참여했던 남부희 교수, '부실' 부마민주항쟁 조사보고서와 유치준 사망 관련 입장 밝혀

등록|2018.03.01 16:31 수정|2018.03.01 18:48

▲ 남부희 창원대 겸임교수(사학). ⓒ 윤성효


"타살 증거를 찾아내라고 하더라. 그게 위원들이 할 이야기냐. 자료를 국가 문서로 채택하면서 그 자료에 실린 내용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아래 위원회)가 내놓은 <진상조사보고서(초안)>(이하 보고서)가 부실 지적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때 위원으로 참여했던 남부희(71) 창원대 겸임교수(사학)가 입을 열었다.

특히 그는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 16~20일) 때 사망자인 고(故) 유치준(1928~1979, 당시 51세)씨와 관련한 <보고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고 유치준씨가 부마항쟁 당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부희 교수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부마항쟁에서 사망자가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남부희 교수는 2월 28일 오후 창원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보고서>에서 유치준씨 관련 내용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유족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후두부함몰이 사인이라고 이야기한 부검의를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2011년 관련 단체 대표가 부검의와 인터뷰를 했을 때 부검의는 유치준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유족은 사망 장소 인근에서 근무하던 이발사가 당시 유치준이 쓰러져 있었고 일어서려고 애쓰는 장면을 목격하였다고 하여, 이발사를 찾아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이발사는 유치준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원회는 유치준씨를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고서>에 보면 "당시 유치준 사건은 절차에 따라 처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족의 주장대로 경찰 진압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진술이나 객관적 자료가 없었으므로 유치준을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고 서술했다.

유치준씨 유족들은 위원회에 2014년 부마민주항쟁 피해자 신청을 했다가 공정한 심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2016년 8월 신청을 철회했다.

위원회 1년 정도 하다 사퇴... "외로웠다"

부마항쟁 때 사망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1989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내면서 알려졌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내용은 남부희 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남 교수는 부마항쟁 때 <경남신문>(당시 제호 '경남매일') 사회부장으로 있었다. 당시 취재 기자들이 보고한 내용과 자신이 확인한 내용을 자료로 갖고 있었고, 이를 기념사업회에 넘겨 자료집으로 냈다.

이 자료는 위원회가 '국가 문서 자료'로 채택했고 남 교수는 보상금(200만원)도 받았다. 남 교수는 보상금을 그대로 기념사업회에 기부했다. 위원회는 이 자료를 '국가 문서'로 채택하면서도, 정작 보고서 초안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남 교수를 비롯한 <경남신문> 기자 6명은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해직되었고, 남 교수는 7년만에 복직해 논설주간과 상무이사 등을 지내기도 했다.

남 교수는 경남도 추천으로 2014년 10월 출범한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고, 1년 정도 활동 한 뒤 사퇴했다.

그는 "저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위원회 회의에 가 보면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1년 정도 하다가 말없이 내려와서 등기로 사표서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위원회 위원이기도 했지만 유치준 사망과 관련해서는 조사를 받아 진술을 해주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 뒤 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며 "그런데 최근에 보고서 초안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니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취재 기자들이 보내온 문건은 경찰 작성 가능성 높아"

1979년 당시 <경남매일>은 기자 18명으로 '시위현장팀'과 '행정관서팀' '경찰팀'을 꾸렸다. 당시 경남지방경찰청은 부산에 있었다.

남 교수는 "10월 19일 밤 마산경찰서, 마산시청, 경남경찰청을 담당하던 기자들로부터 각각 동일한 내용의 사상자 발생 보고가 접수됐다"며 "특히 마산경찰서 취재기자한테서는 타이핑이 된 보고 문건이 들어왔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도 실렸던 당시 보고 문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사자 발생. 대림여관 앞 도로변(새한자동차 영업소 앞)에서 50여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채(토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편. 킨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

▲ 남부희 교수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신문>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취재기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변사자 발생' 자료로, 이는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 그대로 실려 있다. '타살체가 분명'(원안)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 윤성효


당시 신문사 사회부장이 기자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에는 '피해 상황'과 '연행자 구분', '연행자 명단·숫자' 등이 들어 있었다.

연행자를 보면, 학생 40, 재수생 5, 상인 18, 여상인 4, 공원 73, 회사원 22, 공무원 4 등의 자료도 있다. 또 마산경찰서, 1979. 10. 21. 입수"라 적힌 자료도 있다.

또 '검거 학생 현황'이란 자료를 보면 경남대 35, 고대법대 1, 경남공전 2, 산업전대 4뿐만 아니라 창신고, 마산고, 경상고, 중앙고, 진양반성종고, 대구칠성고, 마산남고, 무학고, 마산동중, 창신중 소속 1~4명씩 들어 있었다.

남부희 교수는 "기자가 보고한 내용이지만 그 자료는 경찰이 직접 작성하거나 내부 문건이 아니면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첫 사망자 보고가 있었을 때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남 교수는 "기자가 보고한 내용을 확인도 할 겸해서 다음 날(20일) 오전 현장에 김현태 기자(이후 한겨레신문)와 같이 가보았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입구 오거리 쪽이다"며 "현장에는 사체가 없었고,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새한자동차 직원 2명과 면담했는데, 그들은 기자가 보고한 내용과 거의 같았다. 그들은 당시 겁이 나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했으며, 아침에 이웃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고 기억했다.

당시 남 교수는 사망자의 진위 여부와 이후 행적을 찾기 위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과 마산시청에 갔다고 했다. 그는 "당시 행려자가 사망하면 사체 검시는 의료원에서 했다. 그런데 19일 밤 행려사망자가 한 명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고, 마산시청 역시 행려자 부검 소식을 파악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후 여러 방면으로 확인하려 했지만 위수령이 발동되어 있고, 군병력이 장악하고 있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적극적인 취재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이 나온 뒤, 유치준씨 유족들이 기념사업회를 찾아와 호적 관련 자료 등을 제시하고 대조한 결과 "사망자가 유치준씨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있다가 사퇴했던 남부희 창원대 겸임교수(사학)가 부마항쟁 당시 고 유치준씨의 사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왜 유치준씨가 당시 그 장소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남부희 교수는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와 검찰청, 경찰청에서 파견 나온 실무자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럴 때마다 남 교수는 유치준씨에 대한 진술을 해주었다. 무려 네 차례나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는 "정부 부처에서 파견 나온 실무자들이 바뀔 때마다 진술을 했다. 진술할 때마다 부닥쳤다. 나중에는 더 이상 조사를 안받겠다고 했다"며 "그런 상황이다 보니 보고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 짐작은 했었다"고 했다.

그는 "유치준씨가 타살이라고 하니 위원회는 그 증거는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자살이라면 그 증거를 찾으라고 했다. 저는 그 사람이 자살하려고 거기까지 갔겠느냐고 했다"며 "여러 차례 진술을 해줘도 자꾸만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더 이상 진술을 안하겠다고 했던 것"이라 했다.

남 교수는 "조사하러 온 위원들을 데리고 유치준씨가 죽은 현장을 같이 가 보기도 했다. 부마항쟁 때 그곳은 완전히 전쟁터였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하는 난리통이었다. 그런 정황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유치준 사망과 관련한 위원회의 조사 문제점을 지적했다. 남 교수는 "왜 유치준씨가 당시 그 장소에 있었는지, 그 때 그 장소가 격렬한 시위 장소였는지, 당시 진압 경찰과 군인 등이 그 자리에 어떻게 포진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망한 유치준씨는 당시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경찰이 발견하고도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행려자로 취급해 임의로 즉시 검시를 실시했으며, 그것도 마산의료원이 아닌 개인 병원에서 했다. 그런 것에 대한 조사를 해야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경찰은 사체 검시 뒤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마산 성호동 서원곡에 가매장했다가 이후 가족들한테 통고했다"며 "여러 문제들을 위원회는 조사조차 하지 않았고 외면했다. '타살 문제'만 놓고 맴돌면서 '증거 타령'을 계속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오는 4월 12일 회의를 열어 보고서 채택 여부를 결정짓는다.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보고서를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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