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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가난뱅이가 쓴 고통스러운 부자 이야기

[리뷰] 미국의 대부호 진 폴 게티 일가를 다룬 존 피어슨의 <올 더 머니>

등록|2018.03.07 15:03 수정|2018.03.07 15:03
태평하고 여유로운 성격으로 자타공인, 별 근심걱정 없이 사는 친구가 있다. 그녀 말인즉슨,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다만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뿐이라며 도인의 풍모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천성처럼 보일 때가 많다. 소인배인 나로선 가닿지 못하는 영역이니 그럴 테다.

천성이든, 도력이든 간에, 늘 천하태평인 그녀를 한순간에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그녀의 시어머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부가 살 집의 위치, 어렵게 낳은 아이의 이름, 심지어 구입할 승용차의 종류와 색깔까지 결정권을 휘두르는 시어머니다보니, 고부관계에 관한 이야기에서만큼은 그녀 역시 누구 못지않은 소인배가 되고 만다.

그녀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온전히 그녀의 편이 되어줄 수 없다. 그 모든 문제에서 빠뜨리면 안 될 한 가지, 그러나 엄청나게 커다란 한 가지가 있으므로. 바로 돈이다. 그들 부부는 경제적으로 시댁에 의존하고 있다.

돈으로 타인의 자유를 사고팔 순 없으나, 부모자식 간엔 다른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한다. 경제적 독립을 빼놓고 완벽한 독립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독립하지 않은 자녀로서는 양육자인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하는 것.

물론, 독립한 자녀로서도 부모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 양상이 다를 것이다. 요목조목 자세히 말하자면 더욱 복잡해진다. 확실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영향력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거기에 어느 사회에서나 복잡한 가족 문제까지 더해지면, 세상 제일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 <올 더 머니> 책표지 ⓒ 시공사


<올 더 머니>. 제목부터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드러낸다. 실제 인물인 미국의 석유사업가이자 대부호 진 폴 게티를 축으로, 그 자신이 '왕조'라고 불렀던 게티 일가의 번영은 물론 숨길 수 없던 가문의 그늘과 현재까지의 모습을 담은 논픽션이다. 본문 전에 실린 가계도의 복잡함에 심호흡을 하게 되지만, 다행히 가계도를 들춰볼 필요 없이 수월하게 읽힌다.

진 폴 게티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그 자산이 투자를 통해 더욱 많은 돈을 벌어왔기에, 그 스스로도 얼마나 부유한지 알 수 없었을 정도로 대부호라고 한다. "미국의 모든 성인과 아이에게까지 10달러 지폐를 한 장씩 나눠주고도 여전히 부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p18) 정도라고. 책은 그가 어떻게 그런 부를 거머쥘 수 있었는지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조지 프랭클린 게티는 열성적인 감리교 신자였고, 20대 초반에 금주 서약을 한 뒤로 평생 술을 먹지 않았으며, 마치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대표적 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가난한 농장집 아들로 태어난 조지는 보험업에 종사해 상당한 자산을 쌓고, 그 자본으로 석유사업에 투자해 백만장자가 된다.

진 폴 게티는 조지가 40대 후반에, 그것도 첫째 딸을 병으로 잃은 뒤 갖게 된 아들이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성공을 목도하게 된다. 백만장자의 아들이자 유일한 상속자가 될 진 폴 게티는, 음주와 사치, 무분별한 연애와 여러 번의 결혼문제까지 일으키며 아버지 조지를 실망시키게 된다.

"돈은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도덕성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돈 덕분에 폴은 사실상 이중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삶이었다." (p57)


아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까. 조지는 아들이 아닌 아내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아들에게는 손자보다 적은 금액의 회사 지분만을 남겨 사실상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은 셈이 된다. 저자는 진 폴 게티의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돈에 대한 집착이 이 일로 시작되었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사랑은 결코 곁가지가 아니었으며, 게티는 평생에 걸쳐 돈과 연애하면서 탐욕스럽게 부를 손에 넣고, 엄청난 양으로 불리는 등 60년 넘는 시간을 들여 자신이 충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황금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p19)


저자는 치밀하게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시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부의 저수지가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 세대에서 가장 파괴적인 재산"(p26)이 되어버렸다고 규정하는 등 곳곳에서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을 모아보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전이 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기술한 놀라운 연대기가 형성된다." (p28)


그 연대기를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한 아들은 자살하고, 한 아들은 알코올과 헤로인 중독, 또 다른 아들은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다음 세대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 손자는 마피아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뒤, 마약과 알코올 중독, 재산 탕진을 일삼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여동생은 에이즈로 고통 받는다. 빠질 수 없는 재산 분쟁도 있어서, 1980년대의 한 기자는 게티라는 이름이 "가족기능장애라는 단어와 동의어"(p27)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순탄치 못한 이 연대기를 저자는 씁쓸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게티의 평생을 통틀어 사람의 시체는 차곡차곡 쌓였다."(p26)


실제를 기록한 400여 페이지의 책은 이 파란만장한 가족의 삶을 치밀하게 조명한다. 진 폴 게티가 손자의 목숨이 걸린 납치 사건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도 책의 중요한 한 축으로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많은 재산이 꼭 좋을 리는 없다는 빤한 결론에 가닿기도 한다. 재산이 없으니 재산 싸움 할 것도 없어 얼마나 좋냐, 하는 오래된 우스갯소리가 생각나기도. 그러나 평탄하게 잘 살고 있는 게티 일가의 구성원도 있는 것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모든 것은 각자 하기 나름이라는, 새롭지 않지만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교훈에 다다른다.

결론과 무관하게 책은 흥미로웠다. 실존하는 인물들과 실재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이토록 치밀하게 구성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저자는 고통스러운 가난뱅이인 자신이 고통스러운 부자의 이야기를 썼노라고 서문에 밝힌 바 있다. 세상엔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사는 시공사라는 것을 덧붙이며, 끝으로 책의 본문에 앞서 삽입된 문장을 옮긴다.

"돈은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돈, 또는 돈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돈은 언제나 머리에서 나온다. 그 머리가 조리 있게 돌아가는 머리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 새뮤얼 버틀러, <노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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