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조교가 아니라 신 교수" 박원순의 이유 있는 '핀잔'
미투 운동을 둘러싼 말말말, 중요한 것은 피해자 중심의 시각
▲ 미투운동 ⓒ 오마이뉴스
지난 1월 <JTBC 뉴스룸>에 출연했던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됐다. 법조계, 문화계, 정치권까지 각종 증언과 고백, 의혹 등이 쏟아졌다.
미투 운동이 나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미투 운동의 방향과 과정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직장 내 성폭력의 대안으로 제시된 '펜스룰'에 대해선 또다른 차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미투 운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했다. 자료를 찾고, 방송을 보고, 인터뷰를 듣고, 전문가의 칼럼을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관련된 두 개의 사건을 통해 기준을 다시 정해봤다.
▲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보도, 당시 검찰은 성고문 대신 성적모욕행위라고 단어를 사용하도록 보도지침을 내렸고 언론을 이를 따랐다. 검찰은 권인숙씨의 주장이 공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운동권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 경향신문 PDF
1985년 위장취업으로 대학생 권인숙씨가 체포됐다.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은 위장취업을 시인했음에도 5.3 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말하라면서 수갑이 채워진 권인숙씨를 성고문했다. 권씨는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오히려 문귀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라며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다.
검찰은 권인숙씨의 고소에도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 또한 권씨의 피해자 진술을 막는 등 불공정한 방법으로 재판을 끌어갔다. 결국, 문귀동 경장은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에야 구속됐다.
퇴짜 맞은 박원순의 1심 변론서
권인숙씨의 변호인단은 조영래 변호사를 주축으로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 소속 변호사 등 199명이었다. 변호인단 중에서 변론서 집필은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가 맡았다.
박원순 변호사는 권씨의 사건을 '희한한 사건' 정도로만 생각하고 1심 변론서 초안을 작성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당시에도 변론서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박 변호사는 나름 심혈을 기울여 1심 초안서를 작성했다.
선배였던 조영래 변호사는 박원순 변호사가 보여준 1심 변론 초안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었다. 조 변호사는 박 변호사의 초안 대신, 변론서를 직접 작성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말도 해주지 않는 조영래 변호사가 섭섭했다. 그래도 필력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무시당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변론서를 보고서야 자신의 초안을 왜 채택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박원순 변호사의 변론서가 그저 재판부를 향했다면,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 외치는 절규였다.
"조영래 변호사님은 사안의 성격을 규정하는 힘이 있으셨어요. 더 나아가 그것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와 위상을 갖는 일인지까지" (내가 본 조영래, 박원순 서울시장)
피해자를 향한 권력의 횡포와 돌팔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독자적인 취재를 금지했고, '성추행'이 아닌 '성 모욕행위'라는 단어만 사용하도록 직접 보도지침을 내렸다. 재판부 또한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기였다.
당시 언론과 검찰, 경찰은 권인숙씨를 '성적 불량자', '가출자', '급진 사상에 물들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 '운동권이 공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 등으로 매도했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 요지서)
미투 운동에 참여한 피해자들의 고백을 놓고 진실 공방이 벌어진다. 물론 거짓 고백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진정으로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증언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 속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처럼 피해자를 향한 매도가 여전히 존재한다.
진실을 찾기 위한 용기 있는 고백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 용기를 꺾는 일은 없어야 한다.
▲ 2014년 한겨레 성희롱 관련 기사. 사진은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승소 축하연. 박원순 서울 시장은 당시 사건의 담당 변호사였다. ⓒ 한겨레신문 PDF
'우 조교가 아니라 신 교수 사건' 박원순의 핀잔
1993년 서울대학교 화학과 실험실에서 유급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우 모 조교는 지도 교수로부터 과도한 신체 접촉이나 성적 언동을 지속해서 받아왔다. 우 모 조교가 성희롱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자, 신 교수는 업무에 압박을 주면서 재임용 추천도 하지 않았다.
우 모 조교는 서울민사지법에 신 교수,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여 5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제기했고, 6년 간의 법정투쟁 끝에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신 교수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소송이었다. 비록 배상금은 5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직장 내 성희롱이 범죄라는 인식을 우리 사회에 심어준 사건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드러났다. 첫 번째는 2002년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이 "재계약에서 탈락한 우 조교의 앙심에서 비롯돼 억울한 사람이 매장된 사건이었다"라는 발언이다.
총 4번의 재판 중에서 3번이나 지도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교수 사회에서는 억울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박원순 서울시장 ⓒ 임병도
중앙일보 강민석 기자는 지난 3월에 박원순 시장을 인터뷰했다. 강 기자는 박 시장이 성범죄 관련 사건을 많이 변호했기에 미투 운동과 연관해 "우 조교 사건 때..."라며 얘기를 꺼냈다가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우 조교 사건이 아니라 신 교수 사건이라고 해야지요"라는 박 시장의 말은 철저히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박원순 시장도 처음부터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필자 또한 남자이기에 '젠더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미투 운동을 외면하기보다는 두 번 세 번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미투 운동을 놓고 다양한 주장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용기 있는 고백을 존중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치미디어 The 아이엠피터 (theimpeter.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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