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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 곳 없던 연산군, 처가 땅에 '전세살이'

정의공주묘, 연산군묘, 김수영 문학관... 도봉구 '골든 트라이앵글'

등록|2018.03.23 15:25 수정|2018.03.23 16:30
서울 지하철 1호선 방학역에서 우이동 방향으로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간선버스 130번 방학사거리 정류장이 나온다.(정류장 번호 10196) 이 버스를 타고 다섯 정류장을 가면 연산군정의공주묘.(정류장 번호 10185)

바로 이곳이 볼만한 문화공간 3곳이 한 곳에 몰려 있는 도봉구 문화의 금삼각(金三角)지역, '골든 트라이앵글'이다.

첫 번째 만나는 곳이 정의공주묘. 정확한 명칭은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이다. 누구의 묘택일까? 먼저 정의공주를 알아 보자.

정의공주묘 전경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이렇게 밖에서도 잘 보인다. ⓒ 이양훈


공주는 조선 세종과 소헌 왕후 심씨 사이에서 8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장남인 문종의(1414년 생) 동생이고 둘째 아들인 세조의(1417년 생) 누나라 알려져 있다. 그러니 대략 1415~6년 사이 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1428년에 안맹담에게 시집갔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여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1477년(성종 8) 별세하여 15년 전 먼저 죽은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양효'란 안맹담이 죽은 뒤에 내려진 시호이고 원래는 죽성군이다. 그러니 이곳은 세종의 둘째 딸과 사위의 무덤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쨌기에 총명하여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했을까?

공주의 시가인 <죽산안씨대동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풀어 보자.

유학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운 조선은 건국의 주체세력 역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학의 특성상 종주국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독자적인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최만리의 상소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옛부터 '왕보다 신하들의 힘이 너무 세다'고 했던 조선의 왕인지라 이들의 반대를 무작정 물리칠 수도 없는 일. 세종은 한글 만드는 일을 몰래몰래 조심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가 생겨도 대놓고 물어 보고 연구해 보라 할 수도 없어 곁에 있는 최측근이나 식구들과 상의할 수 밖에 없었을 터.

그 때 어려움을 풀어준 딸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의공주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 한글 창제의 숨은 공신이었던 것. (위 기록이 전하는 <죽산안씨대동보>가 1976년에 편찬 및 출판된 집안 족보이기에 100%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공주는 또 나라의 보물까지 만들었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공주는 먼저 죽은 남편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보물 제966호.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그 정의공주와 남편의 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50호.

안맹담 신도비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인 신도비. 안맹담 신도비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것 중 최초의 귀부 이수형 신도비로 정교한 조각과 글씨가 잘 남아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 이양훈


길을 건너면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묘가 있다. 입구까지 직선거리로 약 120미터. 연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유배지인 교동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곳으로 묘를 옮겼다. 폐위된 왕이기에 대군(大君)의 예로 장례지냈고 그래서 릉(陵)이 아니고 묘(墓). 이런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가장 위쪽에, 아래에는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무덤이 있는데 중간에 전혀 연관이 없는 듯한 무덤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 의정궁주의 묘라고 하는데 그는 또 누구일까?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세종 4년(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그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렇다. 이곳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 1454년(단종 2) 궁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제사를 모실 후손이 없었다. 이에 왕명으로 임영대군에게 이 일을 맡기니 현 위치에 의정궁주 묘를 조성한 것.

그 후 세월이 흘러 중종반정이 있었고 폐위된 연산은 강화 교동에서 죽음을 맞아 그곳에 장사지냈다. 연산군의 아내였던 거창 군부인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 교동에 있던 남편 연산군의 묘를 친정 땅인 이곳으로 옮기게 해달라 요청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의정궁주묘 위쪽에 연산군 묘를 만든 것이다. (연산군묘 안내 팜플렛 인용)

즉 연산은 죽어 갈 곳이 없자 처가의 땅 한 귀퉁이를 빌려 수백 년을 잠들어 있는 것.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고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더 가볍게 여기며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던 업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묘역의 가장 좋은 곳, 제일 높은 곳에 있기는 하나 어쨌든 남의 집 전세살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폐위된 왕의 말로는 이렇듯 허무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연산군묘맨 위가 연산군 내외. 맨 아래는 딸과 사위. 가운데가 의정궁주 조씨의 묘다. ⓒ 이양훈


보너스도 있다. 연산군 묘의 바로 앞에는 그 나이가 무려 550년[±50년]으로 측정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 방학동 은행나무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바로 옆에는 600여 년 전부터 파평 윤씨가 이 마을에 집단 거주하면서 생활용수로 사용했다는 우물 원당샘도 있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니 잠깐 다리쉼을 해도 좋을 듯.

방학동 은행나무500살이 넘는 은행나무. 날이 풀리지 않아 아직 가지만 앙상하다. ⓒ 이양훈


여기서 다시 직선거리로 약 160미터.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대표적 참여시인 김수영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풀', "김일성 만세!"를 외칠 수 있어야 비로소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는 '김일성 만세', 시란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외쳤던 '시여, 침을 뱉어라',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등 읽을수록 입에 와 착착 감기는 그의 언어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였기에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가 도봉구 선영으로 와 마지막 안식을 취하고 있다. 김수영 문학관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인 듯.

김수영문학관방학동 주택가 사이에 있으며 도서관도 겸하고 있다. ⓒ 이양훈


김수영 흉상문학관 내부에는 친필 원고 등 김수영 관련 자료가 많이 있다. ⓒ 이양훈


무심히 지나친다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도 따가운 햇빛에 뜨겁게 데워진 돌무더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터. 원리를 찾고 유래를 참작하며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발끝에 채이는 돌덩이 하나도 심상히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곳이라 해도 차를 타고 긴 시간을 가야하고 도착해서도 오래 걸어야만 볼 수 있다면 그 역시 피곤에 지쳐 감동은 반감될 것.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 관광지 대부분이 이런 실정이다.

서울의 북쪽 끝. 도봉구 방학동에는 그 뜻과 의미가 남다른 볼거리, 느낄거리가 반경 200미터 안에 세 곳이나 모여 있다. 북적이지 않아 쾌적하게 둘러 볼 수 있을 뿐더러 입장료 한 푼 받지 않으니 이 또한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정의공주묘는 출입은 되지 않으나 낮은 담장 너머로 얼마든지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10분이면 끝. 세 곳을 다 둘러 보아도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사와 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져 보는 것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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