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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끼리 죽이게 하고..." 70년 전 제주엔 '피바람' 불었다

[인터뷰] 학살당한 부모, 오빠와는 생이별... 김이선씨가 겪은 제주 4·3

등록|2018.03.26 11:56 수정|2018.03.26 11:56

김이선 씨열두 번째 4.3 증언 본풀이 마당에 증언자로 나선 김이선(82) 씨 ⓒ 제주의소리


"멀리서 걸음만 봐도 오빠인 줄 알았어요. 우린 서로 울지 않았어요. 왜 웁니까. 살앙(살아서) 보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15살 어린 나이로 제주 4.3을 겪은 김이선 씨(86세, 여). 김씨의 부모님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후 형제들과도 생이별하게 됐다. 개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는 4.3의 비극이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을 기록한 인터뷰.

- 15살에 4·3을 겪었다고 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우리 조천리는 왜정시대 때부터 유명하지 않습니까. 일본놈들이 '아다마노 좃덴(머리는 조천)'하듯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드글드글 많았습니다.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학교 세우고 면장이 되고, 마을 전체가 기운이 펄펄 났습니다.

우리 오빠는 해방되자마자 활동을 했지요. 1947년 3.1대회 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어두울 때 새벽밥 해 먹고 짚신 동여매고 제주시에 있는 북초등학교까지 갔습니다. 14km 거리를 뛰면서 갔지요. 작은오빠는 연설을 그렇게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찍 주목을 받았어요. 아마 만세운동(*47년 3.1대회) 후 집에 들어와 보질 못했습니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은 오빠 때문인가요?
"무자년(1948년) 가을걷이가 끝날 때쯤 작은오빠를 찾아내라고 어머니,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조천수용소에는 마을 사람들이 차 있었는데, 아버지는 음력 48년 12월 6일에 수용소 1번으로 학살되었습니다. 장례식도 못 치르고 집에 있던 우리들이 첫 삭제(*사후 1년 동안 초하루, 보름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수용소에 갇힌 어머니가 감시원을 대동해서 나왔습니다. 눈이 온 천지를 덮은 날이었지요. 삭제 마치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감시원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간 어머니도 며칠 후에 수용소 사람들과 같이 학살되었습니다.

그때 작은오빠는 제주시에 있는 고모할망(할머니) 집 밖 거리에 숨어있었습니다. 부모 죽었다는 기별 듣고 어머니 묻어두고 밤에 걸어서 제주시로 가서는 낮에 다시는 조천마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주시에 사는 오빠 만나서 '나 이젠 집에 가쿠다(갈께요)'하면 오빠도 울고 나도 울고 하면서 헤어졌는데, 어느 날 부모 죽은 고향에 더 있기 싫다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인천 삼촌 집 공장에서 일하며 지내던 중 뒤 해에 6.25가 나니 행방불명이 되어 사망 신고도 못 하고 지냈습니다."

- 큰오빠는 어떻게 지냈나요?
"큰오빠는 대동청년단장을 하며 마을 치안에 협조했지요. 6.25가 나기 며칠 전 밭에서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데 조천지서에서 사람이 왔어요.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큰오빠에게 '잠깐이면 됩니다' 해서 목에 걸었던 수건을 마루에 툭 던지고 나가셨지요. 그 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수소문하니 제주경찰서로 넘어갔다는 겁니다. 나는 관덕정 옆에 있는 경찰서로 밥을 해서 날랐습니다. 오빠는 만나지 못해 간수에게 전해달라고만 했고 빈 그릇이 나오면 가져오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오빠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니까 담당 경찰관이 딱한 표정으로 말하는 겁니다. '밥은 다른 사람이라도 주면 되는데 옷은 줄 수도 없고...' 하면서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밤에 경찰서 앞에 차를 딱 세워서 '석방시킨다'고 하니 모두 뛰어나와 허겁지겁 '쓰리쿼터'에 올라탔는데, 그 사람들을 부두에서 배로 2~3시간 가는 바다 깊숙이 들어가 돌로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는 겁니다. 예비검속으로 잡아갔다가 육지 사정이 다급해지니 누군가 명령을 했겠지요. 그 경찰관이 고마웠습니다. 그 사람은 서북청년단으로 들어와 조천리 여자하고 결혼한 사람이었어요. 후에 바다에 옷 짓고 가서 큰오빠 혼 불러다 가까운 신작로에 산 터 잡아서 비석도 세웠습니다. 헛묘(*시신이 없는 묘)지요."

- 작은오빠를 다시 만나게 된 사연도 듣고 싶습니다
"생사를 모르던 오빠가 혹시 북에 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했습니다. 2007년 여름, 살아있다는 소식이 오고 그쪽에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꿈인가 하던 중 전화 통화도 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7월 4일로 상봉 날이 정해지면서 우리는 사전에 약속했습니다. 절대 울지 말기. 울다 보면 그 짧은 시간이 다 지날 것 아닙니까. 필요한 것을 물었더니 시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만나기까지 물건을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뺏기지 않을 것 위주로, 생필품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줄 분량까지 계산해서 숫자를 늘렸습니다. 치약도 사과 박스로 하나, 비누도 한 박스, 학용품, 라면…. 현금은 안될 것 같아 금덩이로 만들어 수건 사이에 넣었습니다.

북한에서 전자시계는 소용 없단 얘길 듣고 서울로 올라와 골동품 집을 수소문해서 태엽 시계도 구해서 넣었고요. 58년 만에 만나는 날, 멀리서 걸음만 봐도 오빠인 줄 알았어요. 우린 서로 울지 않았어요. 왜 웁니까. 살앙(살아서) 보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 오빠를 만나고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었나요?
"다 사람은 살게 마련이니까요. 오빠는 북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7명 낳고 손주도 6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아주 좋구나, 없는 사람 살기는 참 좋다. 여기서는 없는 사람은 교육이고 뭐를 못 하는데 거기서 오빠는 대학을 세 번이나 나왔다고 해요. 머리만 있으면 뭘 하고 싶다허면 딴 과 들어가서 또 하고 또 하고.

오빠 아들들이 청와대 같은 데서 근무하니까 이산가족 중에 오빠에게만 인사드리러 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디라도 마찬가지. 자식이 권력이 있으면 부모도 더 대접받고, 이름이 없으면 인사 오는 사람도 없고. 오빠가 젊어서는 평양에서 일하다가 환갑이 넘으니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었어요. '나 애기들 돈 먹지 안 햄져게, 연금 받는 돈이면 충분허다'고 해요. 올케는 죽었는데, 제주사람만 묻는 공동장이 있어서 고향을 떠나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연을 다 써서 비석을 세웠다고 합디다. 여기서도 북에서 내려와 죽은 이들이 가는 공동장이 있을 겁니다."

- 오빠를 만난 지 10년이 흘렀군요. 그 후 사는 것은 어땠습니까?
"오빠가 생생한 대로 있고 자식들도 그런 외삼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원이 없습니다. 오빠가 헤어지면서 '큰누님은 나이가 있으니 어렵지만 이선이는 또 한 번 만나진다'고 하던데 100살까지 살면 만나질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부모 죽고 장대 같고 자랑스럽던 오빠들 없어지니, 그동안은 결혼을 해봐도 무슨 좋은 일이 생겨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작은오빠 만나고 돌아와서 부모님 산소 비석을 싸안듯이 한 위치에 <남매상봉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마을에서 얼마나 서로 죽였습니까"

남매상봉 기념비서기 2008년 3월 7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자녀들 삼가 세우다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 오빠가 고향에 올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비석을 하셨나요?
"아닙니다. 오빠는 고향에 오지 않을 겁니다. 수술을 네 번이나 했으니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4·3에 대해서는 맨날 골암실거우다마는(말하고 있을 겁니다만) 고향은 바라보기도 싫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 보면 우리 부모 죽인 사람인가 생각해져서 더 괴롭다고. 우리 마을에서 얼마나 서로 죽였습니까. 위에서 시켰으니 그들도 안 할 수가 없었지만, 친척끼리 죽이게 했습니다.

수용소에 갇혀서도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활동을 했으니 조금도 섭섭지 않허주마는(않지만) 여기 다른 부모들은 아들이 공부도 못 해보고 활동도 안 허고 그저 청년인 것뿐인데, 아들 산에 올렸다고 가두니 그게 더 억울한 일'이라고요. 그 사람들을 어느 날 나오라고 해서 조천지서 앞 밭에서 몇 차례 총살 시켰습니다. 그 큰 밭이 지금 그냥 있습니다. 비도 세워야 할 건데, 거기서 죽은 가족들이 더러 남아있어요."

- 조천만세동산 기념관 지을 때 김이선씨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기미년 독립만세도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시작되었지요. 4·3사건에 조천청년들 안 죽었으면 조천이 왕 될건데 지금은 조천이 꼴등 아닙니까. 그땐 똑똑헌 사람들이 다 사상 활동을 했으니까. 개인이 잘 살자고 헌 일도 아니고 바르게 살아보젠(보려고) 한 일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북한 쪽만 들었다는 뜻에서 몰매 맞듯이 다 죽여버렸지요.

남노당 사람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인가요, 다 사람이지. 그때 북한 쪽만 좋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딱 바른길을 걸어보젠 허단보난(하다보니까) 한쪽으로만 몰아가서 다 죽여버린 것 아닙니까. 난 그런 일에 대해선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조천리에는 팽팽한 사람이 없어요. 이런 꼴찌 마을이 돼버린 게 너무 억울해서 더 나섰지요.

조천리에 항일 기념관 부지 마련할 때 맨 처음 밭을 내놓았습니다. 관에서 땅 사는 데도 마을에서 땅 파는 데도 노력했습니다. 리장이나 군수가 7~8번 가도 해결 못 하면 내가 나섰습니다. "야 우리 괸당(친척)은 땅 680평 공짜로도 내놔신디 넌 베락같이 돈 받고 팔아주는 것도 못 하면 사름이야?"하면서 도장 받아다가 군유지를 줘서 해결해서 성역화를 만들었지요. 면장이 나를 추천해서 나 때문에 해결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비석 문구

2007년 5월 12일 대한민국 적십자 주최 제15차 이산가족 상봉일

아버지의 장녀 일선 차녀 이선 삼녀 복선 조카 신배 창배 외손 김석환 박영선 숙질이 북한으로 가서 58년 전 헤어져 만나지 못하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 권배 오빠를 만났습니다. 22세에 이별한 오빠를 만나보니 백발이 성성한 80세였고 슬하에 3남 4녀 7남매, 증손도 4남 2녀 6남매를 두고 있었습니다. 행여 살아 계실까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인내의 세월 수없이 흐르던 눈물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이 권배 오빠를 만나 번창한 가족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니 봄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집니다. 슬프다 제주민의 통한이 서린 4·3 동란으로 아버지 51세, 어머니 49세 그 젊은 나이에 애통하게 돌아가셨으나 손자 7남매, 증손 6남매, 13명의 후손들이 이 하늘 아래 훌륭하게 자라 어머니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손 13명의 이름을 비에 새겨 아버지 어머니 묘 앞에 세우노니 이제 받아들이시고 누구보다도 벅찬 감격과 기쁨만 간직하고 극락왕생하기를 두 손 모아 비옵니다.

서기 2008년 3월 7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자녀들 삼가 세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양성자 씨는 제주4.3 연구소 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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