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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잊지 못한 백운동 별서 정원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⑥] 백운동 별서 정원(상)

등록|2018.04.04 08:51 수정|2019.07.19 15:56
[기사수정 : 2019년 7월 19일 오후 3시 55분]
 
"이 정원은 천하의 산수 가운데에 풍경이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조성하면 그만이다. 주위의 산들이 연꽃 모양으로 이 땅을 껴안고 빙 둘러 에워싼다. 산의 안은 움푹 파이고 산의 밖은 우뚝 솟아서 시끄러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다. 이곳과 통하는 길은 없다. 다만 산의 서남쪽 산허리에 겨우 사람의 몸 하나만 드나들 수 있는 굴이 하나 뚫려 있을 뿐이다. 어두컴컴한 굴을 한참이나 가서야 동구洞口에 도달할 수 있다. 동구의 바깥에는 시내가 흘러 인간 세상의 계곡과 통한다. 그러나 시내 위에 걸린 하늘의 넓이가 겨우 우물만 하고 산꼭대기의 샘물이 곧장 아래로 쏟아져 폭포수를 이루어 동구 바로 앞에 떨어진다. 이 폭포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발을 드려놓은 듯해 드나들지 않으면 그곳에 입구가 있음을 결코 눈치 채지 못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으로 통하는 길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던 황주성이 지은 <장취원기將就園記>에 나오는 글이다. 황주성(黃周星, 1611~1680)은 명나라에서 호부주사를 지낸 인물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호주에 은거했는데, 청나라를 무너뜨릴 희망이 없자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장취將就'라는 말은 <시경>의 "장차 내가 이루고 싶지만 오히려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네 將予就之 繼猶判渙"에서 따온 말이다. 장취원은 앞으로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상상 속의 정원이다. 은자(隱者)가 즐기고자 한 삶의 공간이지만 허구의 공간인 장취원은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에 대한 갈구를 드러낸 공간이다. 이 상상 속의 정원이 실재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백운동 별서백운동은 상상 속의 정원이 실재하는 느낌의 신비스러운 별서 공간이다. ⓒ 김종길


백운동 비밀 정원

월출산은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줄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이 월출산 아래에 옛 사람이 꿈꾸던 이상향이 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이 아닌, 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 그곳은 백운동 원림이다.

하늘에는 월출산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걸려 있고, 땅에는 초록의 차밭이 물결치며 시원스레 펼쳐진 곳. 드넓은 차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면 두어 채의 민가만 보일 뿐 더없이 한적한 산골. 짙은 동백 숲 사이로 어렴풋이 뚫린 어둑한 오솔길 끝에 세상 밖의 풍경 백운동 별서가 있다.
 

월출산과 차밭백운동은 월출산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와 물결치는 차밭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있다. ⓒ 김종길


흔히 별서는 마을과 적절하게 거리를 둔 곳에 있다. 시선 차단을 위해서다. 별서는 원래 숲이 있는 곳에 터를 잡거나, 대나무와 동백나무 등으로 숲을 조성하거나, 어느 정도 흐르는 하천을 이용하여 터를 잡기도 한다.

백운동 별서는 동백나무와 비자나무의 상록수림으로 일차로 안운마을과 차폐되고, 별서 옆을 흐르는 계곡물에 의해 다시 격리된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별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설혹 별서 가는 길을 안다손 치더라도 동백 숲 터널을 지나 계류를 건너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신비스러운 별서 공간에 놀라게 된다.
 

백운동 별서백운동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의 상록수림으로 일차로 안운마을과 차폐된다. ⓒ 김종길

 

백운동 별서백운동은 별서 옆을 흐르는 계곡물에 의해 다시 격리된다. ⓒ 김종길


별서 정원의 시작

백운동 별서 정원은 고려시대 백운암이 있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강진의 백운동은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간다는 백운동은 당시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명원이었다.

백운동 별서 정원을 최초로 조성한 사람은 이담로(李聃老, 1627~1701)였다. 김응정(金應鼎, 1527~1620)은 백운동에 정선대(停仙臺)를 지어 처음 발자취를 남겼다. 원주 이씨 집안에는 백운동이 원래 연안 이씨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집안의 사패지(賜牌地)였는데, 이담로 때에 이르러 백마 한 필과 맞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원주 이씨가 강진에 대대로 살게 된 것은 16세기 초 강릉부사를 지낸 이영화(李英華, ?-1517) 가 해남 최씨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 처가인 해남으로 옮겨 왔고, 그의 손자 이남(李楠, 1505-1555)이 강진군 금당리에 터를 잡아 입향조가 되면서 시작됐다. 이남의 현손인 이담로는 강진 원주 이씨 백운동의 입산조가 되어 본격적으로 별서를 조성했다.
 

백운동 별서백운동 별서 정원은 고려시대 백운암이 있던 자리에 터를 잡았다. ⓒ 김종길


이담로는 '담로'라는 이름에서 이미 노장사상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호를 백운동은(白雲洞隱)으로 쓴 걸로 보아 그가 은거하는 삶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의 6대손인 이시헌의 <가장초기>나 <원주이씨세계>를 보면 "그는 뜻과 행실이 고결하고 과거 공부를 낮게 보아 이를 버리고 월출산 아래 백운동에 별서를 지어 거문고와 서책을 홀로 즐기며 세상을 마쳤다"고 적혀 있다.

이담로는 만년에 맏아들 이태래에게 집안을 맡기고, 둘째 손자 이언길(1684~1767)이 일고여덟 살이던 1692년 전후로 백운동에 들어와 별서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678년 6월에 김창집이 강진에 내려와 백운동을 방문했다는 <몽와집>과 <남천록>의 기록, 1682년에 신명규가 지은 백운동 8영 등의 몇몇 기록을 보면 이담로가 처음 별서를 조성한 것은 훨씬 전의 일이다.
 

백운동 글씨백운동을 들어서면 냇가 바위에 백운동이라 새긴 세 글자를 볼 수 있다. ⓒ 김종길


아마 이담로는 그 이전부터 가꾸어온 백운동 정원에 아예 살 각오로 손자 이언길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담로가 원래 살던 집은 백운동 별서에서 6k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성전면 금당리에 있는 연당 고택이다. 이후 이담로는 손자 이언길과 함께 20여 년간 원림을 일구었다. 그가 백운동이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와 풍광을 적은 글인 '백운동명설'이 <백운세수첩>에 전한다.
 
"백운동은 월출산의 옛 백운사 아래 기슭에 있다. 앞쪽으로는 석대가 있어 올라가 굽어볼 수 있고 뒤편으로는 층층 바위가 옥처럼 서 있다. 소나무와 대나무에 덮인 길은 희미한데 맑은 시내에 어리비친다. 이 시냇물을 끌어와 아홉 구비를 만드니 섬돌을 타고 물소리가 울린다. 냇가 바위 위에는 백운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옛 이름을 따서 걸고 그 그윽함을 기록한 것이다."

정선대와 풍단 단풍가을에 백운동 풍단의 단풍이 아름답다. ⓒ 김종길


다산 정약용이 잊지 못한 백운동

백운동 별서 정원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다산 정약용이 쓴 백운동 12경을 꼭 읊어 보는 게 좋다.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를 보며 정원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더욱 좋다. 그리하면 지금도 그 옛날의 그윽한 운치가 별서 곳곳에 살아 있다는 걸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운동 정원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단연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18년간을 머물렀다. 그러던 1812년 가을 어느 날, 다산은 제자들과 월출산에 놀러 갔다가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잤다. 그 하루 동안 백운동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다음 날 그는 다산초당에 돌아와서도 아름다운 백운동 별서 풍경을 잊을 수 없어 '백운동 12경'이라는 시를 지었다.

다산은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와 <다산초당도>를 그리게 하여 자신이 쓴 시와 함께 <백운첩>으로 엮었다. <백운첩>은 백운동 그림, 서시와 백운동 12경을 읊은 시 13수, 발문, 다산초당 그림 순서로 구성돼 있다. 다산은 백운동과 겨뤄보고자 했던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에 다산초당 그림을 넣었다.
 

백운동도다산이 이름 붙인 백운동 12경에 초의선사는 <백운동도>를 그렸다 ⓒ 김종길

 
백운동도와 백운동 12경
다산이 이름 붙인 백운동 12경을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와 함께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경은 백운동의 으뜸 풍경인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 '옥판상기玉版爽氣', 제2경은 동백 숲 작은 길 산다경의 유차(동백)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유차성음油茶成陰', 제3경은 백 그루 매화 언덕 그윽한 향기 백매오의 '백매암향百梅暗香', 제4경은 단풍나무 붉은 빛 비친 폭포 홍옥폭의 '풍리홍폭楓裏紅瀑', 제5경은 마당을 흐르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 '곡수유상曲水流觴', 제6경은 창하벽의 붉은 글씨 '창벽염주蒼壁染朱', 제7경은 소나무 언덕인 정유강의 용 비늘 같은 소나무 '유강홍린蕤岡紅麟', 제8경은 모란을 심은 화단 모란체의 '화계모란花階牡丹', 제9경은 세 칸 초가 취미(산허리)선방의 '십홀선방十笏禪房', 제10경은 단풍나무의 붉은 비단 장막 풍단의'홍라보장紅羅步障', 제11경은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의 '선대봉출仙臺峯出', 제12경은 운당원의 우뚝 솟은 왕대나무 '운당천운篔簹穿雲'

 
덧붙이는 글 백운동 별서 정원은 두 번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백운동의 아름다운 12경을 이야기와 사진으로 소개하고, 별서 관람법과 13대째 이어온 유서 깊은 별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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