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과 끝은 책입니다
산과 들에 봄기운이 올라오는 요즘이면 각종 매체에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기획을 전한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에세이부터 꽃놀이 가기 좋은 곳을 소개하는 여행 책까지, 굳이 떠나지 않아도 이미 즐겁고, 덕분에 떠나게 된다면 더욱 행복할 이야기가 속속 도착하니, 어느덧 책을 건너뛰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그야말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실천하는 내 모습이 엉뚱하여 피식 웃음이 난다. 재작년 즈음일까. 편집자 친구들과 군산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금요일 아침에 출발지에 모였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같은 책을 손에 들고 왔는데, 책을 읽고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국내 여행이라 하루하루 일정을 정해도 무리가 없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 통하는 이들과 떠나는 여행은 어떻게든 즐거운 법이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역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일 텐데, 나는 운전을 맡아 여행 책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이 책이 제법 잘 만들어졌다는 친구들의 평가에 부응하여,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겨우 서너 쪽을 살펴본 이 책의 다른 시리즈까지 여행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을 마쳤던 것이다. 시리즈의 다른 여행지는 순천, 공주, 목포였고, 나는 2년이 지난 이번 봄에야 목포를 찾아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물론 순천과 공주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네덜란드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여행은 책입니다
오는 5월 초에는 노동절과 어린이날 대체 휴일이 이어져 휴가를 며칠 보태면 나름의 황금연휴를 만들 수 있기에, 오랜만에 유럽, 그중에서도 베네룩스에 가볼 생각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생각만 하거나 책만 사 모은 게 아니고 왕복 비행기 표부터 예약했다. 그러니 무조건 떠나야 하고, 떠나려면 준비를 해야 하고, 준비라면 당연히 책? 당황스럽지만 결론은 늘 이렇다.
베네룩스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주변에서 베네룩스가 어디냐고 되묻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일컫는 이 말이, 마치 포츠담 선언이나 모스크바 3상회의처럼 옛날 말로 느껴진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싶었으나, 역시 세상은 상식이 지배하는 법. 베네룩스로 검색을 하니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이나 다녀온 이들의 에세이는커녕 마땅한 여행 책도 찾기가 어려웠다.
작전 변경! 우선 비행기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암스테르담, 그러니까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다시 책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네덜란드>다. 부제는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인데, 유럽에서 오래 생활하며 그곳을 오갔을, 그리고 경제사를 연구했기에 네덜란드의 부흥기를 잘 알고 있을 저자의 안목이 믿음을 주었고, "제방이 무너지면 모든 사람이 물에 빠지는 여건에서 서로 협동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평가를 읽으니, 왜 한국의 미래를 이곳에서 찾지 않는 것인가 싶어, 나라도 살펴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두 번째 키워드는 암스테르담이다.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준비과정을 즐기지 않기 때문인데(물론 여행을 핑계 삼아 책을 사 모으는 일은 언제든 환영이다), 이번 여행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는 일정 대부분을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보낼 게 분명하니, 암스테르담에 관한 책은 (읽지 않는다 해도) 꼭 필요하다.
대략 세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고 당연히 구매를 완료하여 책상 위에 쌓여 있다)는데, 미국의 역사학자 러셀 쇼토가 곳곳을 살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이야기를 취재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도시 전체가 창의적인 놀이터라 불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틈새의 매력적인 공간을 담아낸 <암스테르담 - 60명의 예술가×60개의 공간>,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학자 배윤경이 암스테르담의 건축물을 구역별로 나눠 겉모습과 구조를 함께 담아낸 <암스테르담 건축기행>이다.
그럴 줄 알면서도 왜 굳이, 책은 여행이니까요
출발이 한 달 남았으니 세 권의 책을 읽기에도 빠듯한 일정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책으로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이 나왔을 고흐는 이제야 그가 남긴 편지글을 펼쳐보는 참이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활동한 플랑드르 화가들의 책은 의외로 여러 권이 나와 있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앞선 네 권의 책 옆과 위에는 <고흐 그림여행>,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에 <플랑드르 화가들>과 <플랑드르 미술여행>이 놓였고, 마땅한 벨기에 관련 책이 없어 일단 준비해둔 <벨기에 디자인 여행>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떠나기 전에, 어쩌면 돌아와서도, 아마도 영영 이 책들을 읽어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 분명한데 멈출 수가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마치 관련한 책을 사 모을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되는 듯, 나는 떠나기 전날까지 맞춤한 책이 없을까 찾아보고 사 모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책으로 떠나는 여행'인지 '여행으로 떠나는 책'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들 가운데 몇 권이나 여행 가방에 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곳에서도 다 읽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몇 벌의 옷을 빼고서라도 책을 넣으려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여행은 이번에도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나려나 보다.
산과 들에 봄기운이 올라오는 요즘이면 각종 매체에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기획을 전한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에세이부터 꽃놀이 가기 좋은 곳을 소개하는 여행 책까지, 굳이 떠나지 않아도 이미 즐겁고, 덕분에 떠나게 된다면 더욱 행복할 이야기가 속속 도착하니, 어느덧 책을 건너뛰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그야말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실천하는 내 모습이 엉뚱하여 피식 웃음이 난다. 재작년 즈음일까. 편집자 친구들과 군산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금요일 아침에 출발지에 모였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같은 책을 손에 들고 왔는데, 책을 읽고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국내 여행이라 하루하루 일정을 정해도 무리가 없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 통하는 이들과 떠나는 여행은 어떻게든 즐거운 법이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역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일 텐데, 나는 운전을 맡아 여행 책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이 책이 제법 잘 만들어졌다는 친구들의 평가에 부응하여,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겨우 서너 쪽을 살펴본 이 책의 다른 시리즈까지 여행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을 마쳤던 것이다. 시리즈의 다른 여행지는 순천, 공주, 목포였고, 나는 2년이 지난 이번 봄에야 목포를 찾아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물론 순천과 공주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네덜란드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여행은 책입니다
오는 5월 초에는 노동절과 어린이날 대체 휴일이 이어져 휴가를 며칠 보태면 나름의 황금연휴를 만들 수 있기에, 오랜만에 유럽, 그중에서도 베네룩스에 가볼 생각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생각만 하거나 책만 사 모은 게 아니고 왕복 비행기 표부터 예약했다. 그러니 무조건 떠나야 하고, 떠나려면 준비를 해야 하고, 준비라면 당연히 책? 당황스럽지만 결론은 늘 이렇다.
베네룩스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주변에서 베네룩스가 어디냐고 되묻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일컫는 이 말이, 마치 포츠담 선언이나 모스크바 3상회의처럼 옛날 말로 느껴진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싶었으나, 역시 세상은 상식이 지배하는 법. 베네룩스로 검색을 하니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이나 다녀온 이들의 에세이는커녕 마땅한 여행 책도 찾기가 어려웠다.
작전 변경! 우선 비행기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암스테르담, 그러니까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다시 책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네덜란드>다. 부제는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인데, 유럽에서 오래 생활하며 그곳을 오갔을, 그리고 경제사를 연구했기에 네덜란드의 부흥기를 잘 알고 있을 저자의 안목이 믿음을 주었고, "제방이 무너지면 모든 사람이 물에 빠지는 여건에서 서로 협동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평가를 읽으니, 왜 한국의 미래를 이곳에서 찾지 않는 것인가 싶어, 나라도 살펴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두 번째 키워드는 암스테르담이다.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준비과정을 즐기지 않기 때문인데(물론 여행을 핑계 삼아 책을 사 모으는 일은 언제든 환영이다), 이번 여행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는 일정 대부분을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보낼 게 분명하니, 암스테르담에 관한 책은 (읽지 않는다 해도) 꼭 필요하다.
대략 세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고 당연히 구매를 완료하여 책상 위에 쌓여 있다)는데, 미국의 역사학자 러셀 쇼토가 곳곳을 살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이야기를 취재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도시 전체가 창의적인 놀이터라 불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틈새의 매력적인 공간을 담아낸 <암스테르담 - 60명의 예술가×60개의 공간>,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학자 배윤경이 암스테르담의 건축물을 구역별로 나눠 겉모습과 구조를 함께 담아낸 <암스테르담 건축기행>이다.
▲ 네덜란드_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참여사회
▲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 러셀 쇼토 지음 / 책세상 ⓒ 참여사회
▲ 암스테르담 Amsterdam_60명의 예술가 × 60개의 공간 ⓒ 참여사회
▲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배윤경 지음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참여사회
그럴 줄 알면서도 왜 굳이, 책은 여행이니까요
출발이 한 달 남았으니 세 권의 책을 읽기에도 빠듯한 일정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책으로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이 나왔을 고흐는 이제야 그가 남긴 편지글을 펼쳐보는 참이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활동한 플랑드르 화가들의 책은 의외로 여러 권이 나와 있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앞선 네 권의 책 옆과 위에는 <고흐 그림여행>,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에 <플랑드르 화가들>과 <플랑드르 미술여행>이 놓였고, 마땅한 벨기에 관련 책이 없어 일단 준비해둔 <벨기에 디자인 여행>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떠나기 전에, 어쩌면 돌아와서도, 아마도 영영 이 책들을 읽어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 분명한데 멈출 수가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마치 관련한 책을 사 모을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되는 듯, 나는 떠나기 전날까지 맞춤한 책이 없을까 찾아보고 사 모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책으로 떠나는 여행'인지 '여행으로 떠나는 책'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들 가운데 몇 권이나 여행 가방에 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곳에서도 다 읽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몇 벌의 옷을 빼고서라도 책을 넣으려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여행은 이번에도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나려나 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박태근님은 알라딘 인문 MD입니다. 온라인 책방 알라딘에서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분야를 맡습니다. 편집자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믿으며, 언젠가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을 짓고 책과 출판을 연구하는 꿈을 품고 삽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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