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루 섬에는 '죽음의 공장'이 있습니다
쓰레기 취급받는 사람들,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결과
비극의 섬 나우루에 관한 이야기는 어지간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섬이 최근 들어 새로운 비극의 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나우루는 남태평양에 있는 인구 1만 명 정도의 작고 외딴 섬나라다. 한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차고 넘쳤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우루 사람들은 어느 날 섬에 인광석이라는 자원이 지천으로 묻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평양을 오가는 수많은 철새의 배설물이 오랜 세월 땅에 스며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광석은 비료 등을 만드는 데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현대농업의 필수 자원이다. 인광석을 캐내 팔기만 하면 엄청난 돈을 손쉽게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는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땀 흘려 일할 필요가 없어졌고, 모든 게 공짜로 주어졌다.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에도 못 미치는 좁은 섬에서 집집마다 자동차를 몇 대씩 굴렸다.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마저 나라가 월급 주고 고용한 외국인 이민 노동자가 대신 해주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용돈을 몇백만 원씩이나 주는 게 예사였다. 그 와중에 먹거리도 바뀌었다. 수입해온 패스트푸드와 가공음식이 이들의 식탁을 점령했다.
그 결과 이곳 사람 대부분은 비만에 시달리게 됐고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병에 걸렸다. 방탕한 세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치명타는 인광석 고갈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무분별하게 캐내기만 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땅은 다 파헤쳐져 폐허로 변했다. 사치와 환락의 삶을 떠받쳐주던 돈줄은 말라버렸다. 파괴된 자연과 고갈된 자원.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과 비참한 가난. 오늘날 나우루는 자연을 마구 약탈하면서 미래를 팔아넘긴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극의 섬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곳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망해가던 나우루 정부는 텅 빈 나라 곳간에 얼마간의 돈이라도 채우려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한테서 돈을 받고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는 데 동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스리랑카,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생한 난민이 계속 밀려들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다. 이들 난민을 나라 바깥으로 쫓아내려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나우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바다를 정찰하다가 난민들이 탄 배를 발견하면 바로 포박하여 3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우루로 끌고 간다.
끌려간 난민들은 삼엄한 경비로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강제로 갇힌다. 수용소 막사는 쥐와 벌레가 들끓고 살인적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게다가 비좁은 공간에 많은 난민을 한꺼번에 몰아넣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난민들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인정해주지 않고 이런 수용소에 길게는 5년 동안이나 무작정 가둬 둔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단식 농성을 벌이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죽음의 공장'이라 부른다. 고귀한 인간이 그야말로 더럽고 쓸모없고 귀찮기만 한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과잉과 잉여의 문명을 넘어
유한한 자원을 마구잡이로 탕진하고 일확천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사람과 자연이 동시에 결단난 곳이 나우루다. 이런 곳에 이제는 인간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일이 나우루에서만 벌어지는 걸까?
오늘날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는 사람과 생명마저도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독특한 시스템이다. 칼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걸 상품으로 바꾸어버리니 버려지는 물건, 곧 쓰레기가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쓰레기의 대열에 인간도 낄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삶의 상품화,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사람과 삶의 '쓰레기화'이기도 하다.
모든 쓰레기는 '잉여'에서 생겨나고, 잉여는 '과잉'에서 나온다. 모든 물질이 순환하는 자연에는 쓰레기가 없다. 자본주의를 과잉과 잉여의 문명이라 일컫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성장사회와 소비사회인 탓이다. 성장사회란 양적인 경제성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다. 소비사회란 많이 가지고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걸 떠받드는 사회다. 하나로 결합된 이 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스템이다. 물건 쓰레기는 물론 '사람 쓰레기'도 넘쳐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독재자는 무자비하게 인간마저도 비생산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어떻게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지는 것은 뉴스가 되는데 집 없는 노인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제는 심지어 쓰이지도 않은 채 그냥 '찌꺼기'처럼 버려지고 있다."
만성적 실업, 불안정한 노동자,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 불법 이주자, 떠돌이 노숙자, 슬럼가 빈민, 버려진 난민…. 자본주의의 횡포가 거세지고 양극화와 불평등이 깊어지면서 잉여 인간은 갈수록 늘고 있다. 과잉과 잉여의 문명으로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쓰레기의 문명이다. 쓰레기로 취급받는 사람이 대량으로 생겨나는 것은, 그러므로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필연적이고도 구조적인 결과다.
버려지는 물건만이 쓰레기인가? 아니다. 온실가스와 방사능 물질도 쓰레기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물건 쓰레기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위험한 쓰레기다. 이에 더해 수많은 사람마저 쓰레기로 여겨지고 버려진다. 쓰레기는 단순한 환경문제의 하나가 아니다. 경제문제도, 기술적 문제도 아니다. 심오한 인간 운명의 문제, 거대한 문명의 문제다.
나우루는 남태평양에 있는 인구 1만 명 정도의 작고 외딴 섬나라다. 한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차고 넘쳤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우루 사람들은 어느 날 섬에 인광석이라는 자원이 지천으로 묻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평양을 오가는 수많은 철새의 배설물이 오랜 세월 땅에 스며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광석은 비료 등을 만드는 데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현대농업의 필수 자원이다. 인광석을 캐내 팔기만 하면 엄청난 돈을 손쉽게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는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땀 흘려 일할 필요가 없어졌고, 모든 게 공짜로 주어졌다.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에도 못 미치는 좁은 섬에서 집집마다 자동차를 몇 대씩 굴렸다.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마저 나라가 월급 주고 고용한 외국인 이민 노동자가 대신 해주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용돈을 몇백만 원씩이나 주는 게 예사였다. 그 와중에 먹거리도 바뀌었다. 수입해온 패스트푸드와 가공음식이 이들의 식탁을 점령했다.
그 결과 이곳 사람 대부분은 비만에 시달리게 됐고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병에 걸렸다. 방탕한 세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치명타는 인광석 고갈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무분별하게 캐내기만 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땅은 다 파헤쳐져 폐허로 변했다. 사치와 환락의 삶을 떠받쳐주던 돈줄은 말라버렸다. 파괴된 자연과 고갈된 자원.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과 비참한 가난. 오늘날 나우루는 자연을 마구 약탈하면서 미래를 팔아넘긴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극의 섬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곳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망해가던 나우루 정부는 텅 빈 나라 곳간에 얼마간의 돈이라도 채우려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한테서 돈을 받고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는 데 동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스리랑카,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생한 난민이 계속 밀려들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다. 이들 난민을 나라 바깥으로 쫓아내려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나우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바다를 정찰하다가 난민들이 탄 배를 발견하면 바로 포박하여 3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우루로 끌고 간다.
끌려간 난민들은 삼엄한 경비로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강제로 갇힌다. 수용소 막사는 쥐와 벌레가 들끓고 살인적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게다가 비좁은 공간에 많은 난민을 한꺼번에 몰아넣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난민들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인정해주지 않고 이런 수용소에 길게는 5년 동안이나 무작정 가둬 둔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단식 농성을 벌이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죽음의 공장'이라 부른다. 고귀한 인간이 그야말로 더럽고 쓸모없고 귀찮기만 한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과잉과 잉여의 문명을 넘어
유한한 자원을 마구잡이로 탕진하고 일확천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사람과 자연이 동시에 결단난 곳이 나우루다. 이런 곳에 이제는 인간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일이 나우루에서만 벌어지는 걸까?
오늘날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는 사람과 생명마저도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독특한 시스템이다. 칼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걸 상품으로 바꾸어버리니 버려지는 물건, 곧 쓰레기가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쓰레기의 대열에 인간도 낄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삶의 상품화,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사람과 삶의 '쓰레기화'이기도 하다.
모든 쓰레기는 '잉여'에서 생겨나고, 잉여는 '과잉'에서 나온다. 모든 물질이 순환하는 자연에는 쓰레기가 없다. 자본주의를 과잉과 잉여의 문명이라 일컫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성장사회와 소비사회인 탓이다. 성장사회란 양적인 경제성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다. 소비사회란 많이 가지고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걸 떠받드는 사회다. 하나로 결합된 이 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스템이다. 물건 쓰레기는 물론 '사람 쓰레기'도 넘쳐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독재자는 무자비하게 인간마저도 비생산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어떻게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지는 것은 뉴스가 되는데 집 없는 노인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제는 심지어 쓰이지도 않은 채 그냥 '찌꺼기'처럼 버려지고 있다."
만성적 실업, 불안정한 노동자,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 불법 이주자, 떠돌이 노숙자, 슬럼가 빈민, 버려진 난민…. 자본주의의 횡포가 거세지고 양극화와 불평등이 깊어지면서 잉여 인간은 갈수록 늘고 있다. 과잉과 잉여의 문명으로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쓰레기의 문명이다. 쓰레기로 취급받는 사람이 대량으로 생겨나는 것은, 그러므로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필연적이고도 구조적인 결과다.
버려지는 물건만이 쓰레기인가? 아니다. 온실가스와 방사능 물질도 쓰레기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물건 쓰레기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위험한 쓰레기다. 이에 더해 수많은 사람마저 쓰레기로 여겨지고 버려진다. 쓰레기는 단순한 환경문제의 하나가 아니다. 경제문제도, 기술적 문제도 아니다. 심오한 인간 운명의 문제, 거대한 문명의 문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장성익님은 환경저술가 입니다.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습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합니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월간<참여사회>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