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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판 수양대군' 조카 죽이고 왕위 빼앗은 헌덕왕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홍수로 인해 왕릉의 훼손과 석물들이 흩어진 사연

등록|2018.04.13 11:07 수정|2018.04.13 11:07
경주를 가로지르는 '북천'은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북천을 '알천(閼川)'으로 적고 있다. 앞서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홍수로 인해 알천의 물이 불어나 입궁이 지체되었기 때문인데, 옛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알천의 빈번했던 홍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알천제방수개기경주시 동천동 산56-1번지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조선시대에 홍수에 대비해 알천의 제방을 개수했음을 알 수 있다. ⓒ 김희태


이와 함께 경주시 동천동에 자리한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의 개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벽에 새겨진 알천제방수개기는 숙종 때인 1707년에 알천의 제방을 개수한 내용과 해당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벽에 새겨놓았다. 알천의 빈번한 홍수는 의외의 한 인물이 잠든 능역에 흔적을 남겼는데, 바로 오늘 소개할 헌덕왕릉이다.

헌덕왕릉전면에서 바라본 헌덕왕릉, 현재의 모습은 1970년대의 정비 과정을 통해 조성되었다. ⓒ 김희태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조선고적도보>에는 헌덕왕릉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신라 중대 이후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신라 왕릉 가운데 그 훼손 정도가 가장 심하다. 사진에서 난간석은 2개를 제외하면 남아있지 않고,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탱석과 판석 등도 그 훼손 정도가 다른 왕릉에 비해 심한 편이다.

기존의 왕릉처럼 헌덕왕릉에도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석물이 설치가 되었지만, 홍수로 인해 흩어졌다. 현재 십이지신상 중 쥐(子), 소(丑), 토끼(卯), 호랑이(寅), 돼지(亥) 등 다섯 상만 남아있으며, 헌덕왕릉의 것으로 전하는 석물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헌덕왕, 혼란스러웠던 시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이름은 언승으로, 소성왕의 친동생이다. 헌덕왕은 자신의 친형인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기에 흔히 신라판 수양대군으로 불린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수양대군(=세조)과 헌덕왕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점이라면 조선의 경우 장자 계승의 종법질서가 있었던 반면 신라와 고려는 왕의 형제도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헌덕왕이 명분도 없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점은 분명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다.

공산성 강당지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의 관청이 설치된 곳으로, 김헌창의 난이 종결된 웅진성이 지금의 공주 공산성이다. ⓒ 김희태


결국 이러한 행동은 결국 김헌창의 난(822년)으로 대표되는 반란과 혼란스러운 정국을 만들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아들로, 웅천주를 중심으로 무진주와 사벌주, 청주, 완산주가 반란에 합류할 만큼 그 기세가 컸다.

당시 헌창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닌 신라의 분열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기세를 몰아 김헌창의 군대는 지금의 성주로 집결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헌덕왕은 신속한 대처를 통해 중앙군을 달구벌(대구)로 파견해 군사적 대치를 이루게 한 뒤, 선발대를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보내 점령에 성공하며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예상외의 신속한 반격에 반란군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김헌창의 세력은 점차 쪼그라들며 종국에는 웅진성에서 항전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성이 함락되려 하자 김헌창은 스스로 자결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반란이 진압된 뒤 헌덕왕은 김헌창의 시신을 찾아내 훼손했다.

헌덕왕릉의 십이지신상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헌덕왕릉, 하지만 홍수로 인해 현재 쥐, 소, 토끼, 호랑이, 돼지 등 5상만 남아있다. ⓒ 김희태


또한 김헌창과 관련된 친족들을 죽이는 등 정국은 또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에게 식읍으로 인정되었던 '명주군국'은 해체 되었으며, 이후에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 도적 수신 등과 모의하여 모반을 획책하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한편 외치에서는 당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북방의 방어를 위해 패강에 장성을 쌓는 등의 치적이 있었지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치적보다 반란과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우레 등의 기사가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부적 혼란의 원인에는 명분 없이 왕위를 찬탈했던 헌덕왕의 실책이 한몫을 했으며, 헌덕왕의 시대가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헌덕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동생인 '수종(秀宗)'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흥덕왕이다.

홍수로 인해 흩어진 헌덕왕릉의 석물

<삼국사기>는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헌덕왕릉이 있다고 했는데, <삼국유사>는 '천림촌(泉林村)' 북쪽에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에서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위의 세 기록에 등장하는 헌덕왕릉의 위치는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실제 헌덕왕릉의 남쪽에서 폐사지의 흔적이 확인되면서, 해당 폐사지를 천림사로 추정하면서 헌덕왕릉의 위치가 비정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분황사 모전석탑에 세워진 석사자상, 반대편의 2기와는 그 형태가 다른 이 석사자상을 헌덕왕릉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 김희태


앞선 원성왕의 예처럼 헌덕왕릉에도 십이지신상이 조성된 왕릉과 석물 등이 배치가 되었지만, 잦은 홍수로 인해 훼손과 소실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헌덕왕릉의 석물 가운데 일부는 분황사나 경주고등학교 등 뜬금없는 장소에서 확인된다. 먼저 분황사에는 헌덕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는 석사자상 2기가 전해지고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면에 세워져 있는데, 다른 2기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주고등학교 석물 일부경주고등학교의 교정에 있는 석물의 일부, 역시 헌덕왕릉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호인상의 일부로 추정된다. ⓒ 김희태


분황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경주고등학교 교정에도 헌덕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는 석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남아있는 형태를 보면 호인상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알천의 빈번했던 홍수는 헌덕왕릉의 석물이 흩어진 사연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안식을 얻지 못했던 헌덕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명분 없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던 헌덕왕의 시대는 결국 신라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를 상징하듯 그의 동생인 흥덕왕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지며, 신라의 국운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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