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까, 말까...' 생각이 많을 때 나를 움직이는 법
[미련 없이, 그곳! 산티아고 순례길 23]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루이텔란
힘들 때 택하는 정공법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인가. 이 한적하고 평화롭고, 햇살은 눈부시지만 그늘은 시원한 작은 시골 마을인 루이텔란(Ruitelan)에서 취하는 휴식이. 땀 흘리고 걸은 뒤 샤워하고 햇살 좋은 야외에 빨래를 널고 책 한 권 들고 맞은편 바에 앉았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아직, 오늘 여정을 끝내지 못한 순례자들의 걸음걸이를 본다.
굳이 순례자들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바는 길거리에 있기 마련이다. 지나가는 그들이 잠시 멈추고 1유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왼쪽 발바닥에 소독약을 바른 뒤 햇볕에 말렸다. 그리고 젤로 된 파스를 손에 덜어 왼쪽 발목을 주물렀다. 양쪽 다리에 균일하게 힘을 싣지 못하기 때문에 왼쪽 발목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매일 반복되지만 이제 이것도 걷고 난 뒤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다 걷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일이니 오늘 해야할 일을 무사히 끝냈구나, 하는 고마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평화를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고민을 거치고 거쳐야 했다.
전날, 급작스런 왼쪽 발목 통증 때문에 바깥 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폰페라다(Ponferrada)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한국인 여자 순례자가 내 쪽으로 오면서 물었다. 혹시 버스 타고 갈 생각 없어요? 같이 왔던 친구가 다리가 아파서 내일 버스를 탄다고 했다. 혼자 보내기가 미안해서 버스 탈 동무를 찾고 있었다.
버스라.
만시야(Mansilla)에서 레온(Leon)까지 한 번 경험으로 됐다. 걷는 사람과 버스 타는 사람 입장, 둘 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구간은 주도로 옆길이라 버스 타는 것에 어느 정도 합리화를 할 수 있었다. 내일은 마을 뒷산 프라델라 봉(930m)을 넘어야 했다. 힘들수록 비켜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왼쪽 발목 고통도 컸다. 확실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배낭을 다음 목적지까지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한국인 '그녀'의 충고였다. 허리가방을 메고 스틱을 짚어가며 가볍게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쉬고 싶을 때 쉴 수가 없었다. 배낭이 배달된 그곳까지 꼭, 가야했다.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배낭을 맡기는 것도 어색했다. 그녀는 한 번 배낭을 맡기게 되면 계속 맡기게 된다, 라고 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밖에 하루 더 머무는 방법도 고려해보았다.
몇 가지 차선책이 있어선지 마음만은 편했다. 복도 침대여도 열시가 지나고 나니 시끄럽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일찍 출발할 부담감에 억지로 잠을 청했을 텐데, 느긋하게 밀린 산티아고 기록을 남겼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들었고 몇 번 뒤척이다가 5시에 일어났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떠나도 담담했다. 만시야에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정성껏 시간을 들여 발 밴딩을 했다. 전날 H팀 리더인 훈이 사다 준 인스턴트 빠에야를 데우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준비했다.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래도 6시 30분이었다. 다행히 발목 부기는 없었다.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낭을 메고 스틱을 들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 뜨기 전이었다. 노란 빛이 알베르게를 감싸고 있었고 맞은편 산은 시커멓게 다가왔다. 갑자기 피가 끓었다. 태양에 시커멓게 얼굴이 타도 걷고 났을 때의 만족한 쾌감을 나는 알고 있었다. 생각이 많을 때는 정공법을 택하던 나였다.
'걷자! 배낭을 메고! 그것도 우회 루트가 아니라 산 하나를 넘자!'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를 떠나 트라바델로(Trabedelo)로 가려면 930m 프라델라 봉(Alto Pradela)을 넘어야 했다. 고지를 피해 가는 우회 루트도 있었다. 주도로를 쭉 따라가면 된다.
나는 산을 넘기로 했다. 아스팔트길은 평평해도 되레 발바닥이 쉬 피로해졌다. 지루하기도 했다. 가지고 온 책에도 산을 넘는 방법을 추천하고 있었다. 마을 외곽에 있는 부르비아(Puente de rio Burbia) 다리를 건너자 순례자 한 무리가 우회 루트로 향했다. 나는 오른쪽 가파른 자갈길로 올라섰다.
산을 내려가면 도착하는 트라바델로(Trabedelo)까지 세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 동안 나는 엔돌핀으로 충만했다. 올라갈수록 전날 묵었던 도시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고 산 건너편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햇살이 점점 영역을 넓혔다. 쫓겨가듯 계곡으로 몰려간 그늘은 계곡을 더 깊게 만들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이 산야를 전세 내버렸다. 모두들 우회도로를 택한 듯했다. 나는 울창한 산길이 더 좋았다. 흙냄새 나는 흙길은 포근한 감촉으로 발바닥을 어루만져 주었다. 전날, 날카로운 고통을 참아가며 한 발 한 발 내디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리고 오세브레이로(O'cebreiro)를 6km 남겨 둔 루이텔란에서 멈췄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오세브레이로에서 하룻밤 자기를 원했다. 그곳은 순례자들로 북적거릴 거였다. 나는 조용한 곳을 원했다(하지만 6km라지만 1300m 고지라 힘든 코스였다. 머물기를 잘했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경험상으로, 휴식이 필요하거나 생각할 장소로는 한적한 시골 알베르게가 좋다는 것을 안다.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 Coto)도 그랬고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Murias de Rechivaklo)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루이텔란(Ruitelan)에 있는, 페케뇨 파탈라(Pequeno Patala) 알베르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여유로움은(신발 바깥쪽) 보이지 않은 것들의 힘(신발 안쪽)이다. 그것은 많은 '큽큽한 발 냄새' 즉,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 때문인 것이다.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고민하기도 결심하기도 하면서 실행을 한 덕이다. 순수하게 흘리는 땀과 긍정적인 자기 마취... 펼쳐놓기도 두려운 이러한 흔적들이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인 것이다.
바에서 여유를 부리며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카디스(Cadiz) 출신 고등학교 남학생과 가족 그리고 독일인 20대 여성과 전에 만났던 스페인 여자 선생인 마리아호세도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제공하는(8유로) 식사를 하면서 내일 여정의 힘듦과 다음 숙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가방을 다음 목적지까지 배달하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주인 남자의 제안이었다.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도 따뜻했다. 이제 푹 쉴 일만 남았다.
까미노는 꽃길이다
1400m 고지인 폰세바돈(Foncebadon)에서 머물 때 나이 드신 두 분의 프랑스 여자 순례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사람은 두 달 째 걷고 있었고 다른 순례자는 이번이 두 번째 여정이라고 했다.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수다가 장난 아니어서 나는 좀 떨어져 가려고 노력했는데 다행히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그 나이 또래의 남자 순례자가 끼어들었다. 그 셋은 한 팀이 되어 하산했다. 어찌나 깨가 쏟아지는 대화를 하는지 20대 청춘도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
오늘, 발카르세(La Portela de Valcarce)를 막 진입했을 때 레옹(Lehon)에서 시작해 두 달 째 걷고 있다는 순례자와 그 남자 순례자가 짝을 지어 걷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여자분은 어디 계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참 앞서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도로 옆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 나란히 앉아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다. 순간, 길이 환해지면서 눈이 부셨다.
Camino는 꽃길이다. 꽃길!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인가. 이 한적하고 평화롭고, 햇살은 눈부시지만 그늘은 시원한 작은 시골 마을인 루이텔란(Ruitelan)에서 취하는 휴식이. 땀 흘리고 걸은 뒤 샤워하고 햇살 좋은 야외에 빨래를 널고 책 한 권 들고 맞은편 바에 앉았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아직, 오늘 여정을 끝내지 못한 순례자들의 걸음걸이를 본다.
굳이 순례자들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바는 길거리에 있기 마련이다. 지나가는 그들이 잠시 멈추고 1유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왼쪽 발바닥에 소독약을 바른 뒤 햇볕에 말렸다. 그리고 젤로 된 파스를 손에 덜어 왼쪽 발목을 주물렀다. 양쪽 다리에 균일하게 힘을 싣지 못하기 때문에 왼쪽 발목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매일 반복되지만 이제 이것도 걷고 난 뒤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다 걷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일이니 오늘 해야할 일을 무사히 끝냈구나, 하는 고마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평화를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고민을 거치고 거쳐야 했다.
▲ 프라델라 봉(Alto Pradela)에서 바라보니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가 아주 만만하게 보인다. ⓒ 차노휘
전날, 급작스런 왼쪽 발목 통증 때문에 바깥 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폰페라다(Ponferrada)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한국인 여자 순례자가 내 쪽으로 오면서 물었다. 혹시 버스 타고 갈 생각 없어요? 같이 왔던 친구가 다리가 아파서 내일 버스를 탄다고 했다. 혼자 보내기가 미안해서 버스 탈 동무를 찾고 있었다.
버스라.
만시야(Mansilla)에서 레온(Leon)까지 한 번 경험으로 됐다. 걷는 사람과 버스 타는 사람 입장, 둘 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구간은 주도로 옆길이라 버스 타는 것에 어느 정도 합리화를 할 수 있었다. 내일은 마을 뒷산 프라델라 봉(930m)을 넘어야 했다. 힘들수록 비켜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왼쪽 발목 고통도 컸다. 확실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배낭을 다음 목적지까지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한국인 '그녀'의 충고였다. 허리가방을 메고 스틱을 짚어가며 가볍게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쉬고 싶을 때 쉴 수가 없었다. 배낭이 배달된 그곳까지 꼭, 가야했다.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배낭을 맡기는 것도 어색했다. 그녀는 한 번 배낭을 맡기게 되면 계속 맡기게 된다, 라고 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밖에 하루 더 머무는 방법도 고려해보았다.
몇 가지 차선책이 있어선지 마음만은 편했다. 복도 침대여도 열시가 지나고 나니 시끄럽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일찍 출발할 부담감에 억지로 잠을 청했을 텐데, 느긋하게 밀린 산티아고 기록을 남겼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들었고 몇 번 뒤척이다가 5시에 일어났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떠나도 담담했다. 만시야에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정성껏 시간을 들여 발 밴딩을 했다. 전날 H팀 리더인 훈이 사다 준 인스턴트 빠에야를 데우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준비했다.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 프라델라 봉(Alto Pradela)을 걷고 있다. ⓒ 차노휘
그래도 6시 30분이었다. 다행히 발목 부기는 없었다.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낭을 메고 스틱을 들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 뜨기 전이었다. 노란 빛이 알베르게를 감싸고 있었고 맞은편 산은 시커멓게 다가왔다. 갑자기 피가 끓었다. 태양에 시커멓게 얼굴이 타도 걷고 났을 때의 만족한 쾌감을 나는 알고 있었다. 생각이 많을 때는 정공법을 택하던 나였다.
'걷자! 배낭을 메고! 그것도 우회 루트가 아니라 산 하나를 넘자!'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를 떠나 트라바델로(Trabedelo)로 가려면 930m 프라델라 봉(Alto Pradela)을 넘어야 했다. 고지를 피해 가는 우회 루트도 있었다. 주도로를 쭉 따라가면 된다.
나는 산을 넘기로 했다. 아스팔트길은 평평해도 되레 발바닥이 쉬 피로해졌다. 지루하기도 했다. 가지고 온 책에도 산을 넘는 방법을 추천하고 있었다. 마을 외곽에 있는 부르비아(Puente de rio Burbia) 다리를 건너자 순례자 한 무리가 우회 루트로 향했다. 나는 오른쪽 가파른 자갈길로 올라섰다.
산을 내려가면 도착하는 트라바델로(Trabedelo)까지 세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 동안 나는 엔돌핀으로 충만했다. 올라갈수록 전날 묵었던 도시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고 산 건너편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햇살이 점점 영역을 넓혔다. 쫓겨가듯 계곡으로 몰려간 그늘은 계곡을 더 깊게 만들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이 산야를 전세 내버렸다. 모두들 우회도로를 택한 듯했다. 나는 울창한 산길이 더 좋았다. 흙냄새 나는 흙길은 포근한 감촉으로 발바닥을 어루만져 주었다. 전날, 날카로운 고통을 참아가며 한 발 한 발 내디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리고 오세브레이로(O'cebreiro)를 6km 남겨 둔 루이텔란에서 멈췄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오세브레이로에서 하룻밤 자기를 원했다. 그곳은 순례자들로 북적거릴 거였다. 나는 조용한 곳을 원했다(하지만 6km라지만 1300m 고지라 힘든 코스였다. 머물기를 잘했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경험상으로, 휴식이 필요하거나 생각할 장소로는 한적한 시골 알베르게가 좋다는 것을 안다.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 Coto)도 그랬고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Murias de Rechivaklo)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루이텔란(Ruitelan)에 있는, 페케뇨 파탈라(Pequeno Patala) 알베르게도 마찬가지이다.
소싯적에 신발 바깥쪽에 신경을 쓰곤 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서, 발가락에 자주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어쩌다 그렇게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게도 되었다
큽큽한 발 냄새가 먼저 와서 들키는가 싶더니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
한때는 그렇게 바깥쪽을 향하여
온전히 빛이 나기를 바랐던 열망의 반대쪽에 자리한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이
신발을 더더욱 신발답게 하는 안쪽의 일이었음을
유심한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 정윤천 〈안쪽을 위하여〉 전문
이런 여유로움은(신발 바깥쪽) 보이지 않은 것들의 힘(신발 안쪽)이다. 그것은 많은 '큽큽한 발 냄새' 즉,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 때문인 것이다.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고민하기도 결심하기도 하면서 실행을 한 덕이다. 순수하게 흘리는 땀과 긍정적인 자기 마취... 펼쳐놓기도 두려운 이러한 흔적들이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인 것이다.
바에서 여유를 부리며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카디스(Cadiz) 출신 고등학교 남학생과 가족 그리고 독일인 20대 여성과 전에 만났던 스페인 여자 선생인 마리아호세도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제공하는(8유로) 식사를 하면서 내일 여정의 힘듦과 다음 숙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가방을 다음 목적지까지 배달하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주인 남자의 제안이었다.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도 따뜻했다. 이제 푹 쉴 일만 남았다.
까미노는 꽃길이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공립 알베르게를 떠나며 ⓒ 차노휘
1400m 고지인 폰세바돈(Foncebadon)에서 머물 때 나이 드신 두 분의 프랑스 여자 순례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사람은 두 달 째 걷고 있었고 다른 순례자는 이번이 두 번째 여정이라고 했다.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수다가 장난 아니어서 나는 좀 떨어져 가려고 노력했는데 다행히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그 나이 또래의 남자 순례자가 끼어들었다. 그 셋은 한 팀이 되어 하산했다. 어찌나 깨가 쏟아지는 대화를 하는지 20대 청춘도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
오늘, 발카르세(La Portela de Valcarce)를 막 진입했을 때 레옹(Lehon)에서 시작해 두 달 째 걷고 있다는 순례자와 그 남자 순례자가 짝을 지어 걷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여자분은 어디 계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참 앞서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도로 옆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 나란히 앉아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다. 순간, 길이 환해지면서 눈이 부셨다.
Camino는 꽃길이다. 꽃길!
▲ 까미노는 '꽃길'이다. ⓒ 차노휘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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