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00원과 중학교 참고서, 공무원 합격에 든 비용
마국 그랜드 캐니언 레이스에서 '영어완전정복'을 떠올리다
죽을 만큼 힘들 때 인간은 두 분류로 행동한다. 포기하는 자와 견뎌 내는 자. 전자는 '이깟 게 뭐라고' 하며 포기의 명분을 미리 정해 놓고 그 길로 간다. 반면 후자는 견뎌내면 앞이 보일 거라는 신념과 기대로 폭발적 에너지를 발산하다.
내가 선택한 게 길이 된다. 금전적 보상이나 가치 유무를 떠나 때론 맞닥뜨린 현실에서 조건 없이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지난 15년 넘게 지구상 7곳의 사막과 9곳의 오지를 횡단했다. 히말라야 임자체(6189m)도 목전까지 올랐다. 거리로 치면 3500km가 넘는다. 어디든 힘들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중 2012년에 참가한 미국 그랜드 캐니언 271km 레이스(Grand to Grand Ultra 271km Race)는 포기의 지뢰밭을 피해가며 간신히 결승선을 밟았다. 그랜드캐니언 북동쪽에서 시작된 레이스는 5박 7일 동안 시온캐니언의 외곽을 돌아 버진강 지류를 넘나들다 브라이스캐니언 2636m 높이에 위치한 핑크 절벽(Pink Cliffs)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구상 가장 앞선 문명국가의 거대한 자연에서 최악의 절망과 최고의 행복 모두를 맛봤다.
레이스는 10kg이 훌쩍 넘는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떼밀리듯 시작됐다. 첫날부터 빗줄기를 가르며 광야를 달리다 마른번개를 피해 몸을 사리고, 발바닥은 몸이 풀리기도 전에 물집으로 뒤덮였다. 발톱은 죄다 죽어 흐물거렸다. 어이없이 주로를 잃고 3시간 넘게 헤매다 녹초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신의 걸작인 첨탑(Hoodoo)들이 숲을 이룬 시온캐니언의 장관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주로의 푯대를 찾느라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꼬박 이틀 동안 돌과 모래투성이인 사구지역에 갇혀 달리다 간신히 탈락 위기를 넘겼다.
작렬하는 태양보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에 홀로 남겨진 것이, 밤새 코요테 무리에 쫓기는 것보다 황야의 어둠이 내뿜는 정적이 더 두려웠다.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련만... 레이스 내내 뛰다 걷다 심지어 기다시피 안간힘을 썼다.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내게 익숙한 문명세계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새벽녘 용케 선수들의 보호소인 CP에 도착했지만 종일 달려온 그 길을 기억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나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만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은 고난의 시기를 만날 때, 간혹 자신이 겪은 과거의 더 호된 경험을 떠올리며 지금의 시련을 이겨내려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영어완정정복>의 겉표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레이스 넷째 날 새벽, 밤새 추위와 공포에 떨며 협곡과 사구지역 76km를 헤매다 도착한 CP에서 무너지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도 그랬다. 잠결에 어린 시절 보았던 중학교 영어 참고서인 <영어완전정복>의 겉표지가 떠올랐다.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다
1986년 가을, 탈선의 방정식을 못다 풀고 입대했던 군대를 제대했다. 여전히 방향을 잃고 빈둥거리던 1987년 봄, 불현듯 '자본금 안 드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마지막 심정으로 어머니께 부탁 말씀을 드렸다. '반찬은 필요 없으니 맨 도시락에 하루 5백 원씩 몇 달만 지원해 달라'고.
다음날 서울 안국동의 정독도서관을 찾아갔다. 입장료 50원, 교통비 90원*왕복=180원, 아부라기 국물 50원*2그릇=100원 그리고 솔담배 450원. 500원으로 하루 경비의 수지가 맞지 않아 담배는 모래판에 꽂혀있는 꽁초를 뽑아 폈다.
공부는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게 상책이다. 며칠 후 정독도서관 정문 앞 헌책방에서 <영어완전정복> 6권을 집어 들었다. 1학년 1학기 책의 본문 첫 페이지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된다. 3학년 2학기 책까지 총 3천 페이지 가까운 이놈들을 꼼짝 않고 정독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다시 정독을 했다. 보름이 걸렸다. 또다시 일주일 걸려 3번째 정독을 마치고 나니 천하를 얻은 것만큼 기뻤다. 벽돌 하나하나로 초석을 쌓는 심정으로 불같이 책과 씨름한 끝에 대학입시와 공무원 채용시험 모두 합격했다. 학원비 한 푼 안 들이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투자 자금 없이 시작한 사업치고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건 참고서 <영어완전정복>에 적힌 한 구절의 문구였다.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가는 책표지 여백에 적힌 낙서였다. 옛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면 먼저 보던 학생이 끄적거린 게 분명했다.
"최후의 승리! 그것은 부단히 노력한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다!"
올라설 수 없을 것 같던 바닥끝에서 내 청춘의 큰 산 하나를 넘어섰다. 그 사건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여전히 내 가슴에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선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지만 오한이 엄습했다. CP에 지펴진 모닥불은 거의 사그라졌다.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너무 거대한 자연 앞에 서니 대자연과의 동화보다 내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가 간절했다. 변화무쌍한 그랜드캐니언에서 살아남는 건 대자연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 나를 극복해야 자연 앞에 우뚝 설 수 있다. 담대한 나로 마음을 고쳐먹어야 나약한 나를 이겨낼 수 있다.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찾아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사막과 오지를 달리다 보면 엄청난 모래 산을 넘어야 하고, 광활한 광야와 협곡을 건너기도 한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사막의 밤을 홀로 달리다 죽음의 문턱에서 숨을 헐떡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이 자리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슬럼프는 한계에 다다른 자만이 겪는 '행복한' 비명이다. 최선을 다했기에 한계까지 다다른 것이다. 바람은 움직임으로 존재하고, 도전의 결과는 기록으로 존재한다.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견뎌낼 것인가. 선택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내가 선택한 게 길이 된다. 금전적 보상이나 가치 유무를 떠나 때론 맞닥뜨린 현실에서 조건 없이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 출발! Grand to Grand Ultra 271km Race ⓒ 김경수
나는 지난 15년 넘게 지구상 7곳의 사막과 9곳의 오지를 횡단했다. 히말라야 임자체(6189m)도 목전까지 올랐다. 거리로 치면 3500km가 넘는다. 어디든 힘들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중 2012년에 참가한 미국 그랜드 캐니언 271km 레이스(Grand to Grand Ultra 271km Race)는 포기의 지뢰밭을 피해가며 간신히 결승선을 밟았다. 그랜드캐니언 북동쪽에서 시작된 레이스는 5박 7일 동안 시온캐니언의 외곽을 돌아 버진강 지류를 넘나들다 브라이스캐니언 2636m 높이에 위치한 핑크 절벽(Pink Cliffs)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구상 가장 앞선 문명국가의 거대한 자연에서 최악의 절망과 최고의 행복 모두를 맛봤다.
레이스는 10kg이 훌쩍 넘는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떼밀리듯 시작됐다. 첫날부터 빗줄기를 가르며 광야를 달리다 마른번개를 피해 몸을 사리고, 발바닥은 몸이 풀리기도 전에 물집으로 뒤덮였다. 발톱은 죄다 죽어 흐물거렸다. 어이없이 주로를 잃고 3시간 넘게 헤매다 녹초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신의 걸작인 첨탑(Hoodoo)들이 숲을 이룬 시온캐니언의 장관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주로의 푯대를 찾느라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꼬박 이틀 동안 돌과 모래투성이인 사구지역에 갇혀 달리다 간신히 탈락 위기를 넘겼다.
▲ 그랜드캐니언에도 어마무시한 사구지역이 있다 ⓒ 김경수
▲ 시간과 바람이 만들어낸 풍화의 역작을 가르며... ⓒ 김경수
작렬하는 태양보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에 홀로 남겨진 것이, 밤새 코요테 무리에 쫓기는 것보다 황야의 어둠이 내뿜는 정적이 더 두려웠다.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련만... 레이스 내내 뛰다 걷다 심지어 기다시피 안간힘을 썼다.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내게 익숙한 문명세계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새벽녘 용케 선수들의 보호소인 CP에 도착했지만 종일 달려온 그 길을 기억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나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만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은 고난의 시기를 만날 때, 간혹 자신이 겪은 과거의 더 호된 경험을 떠올리며 지금의 시련을 이겨내려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영어완정정복>의 겉표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레이스 넷째 날 새벽, 밤새 추위와 공포에 떨며 협곡과 사구지역 76km를 헤매다 도착한 CP에서 무너지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도 그랬다. 잠결에 어린 시절 보았던 중학교 영어 참고서인 <영어완전정복>의 겉표지가 떠올랐다.
▲ 내게 지독한 추억이 어린 교재 <영어완전정복> ⓒ 김경수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다
1986년 가을, 탈선의 방정식을 못다 풀고 입대했던 군대를 제대했다. 여전히 방향을 잃고 빈둥거리던 1987년 봄, 불현듯 '자본금 안 드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마지막 심정으로 어머니께 부탁 말씀을 드렸다. '반찬은 필요 없으니 맨 도시락에 하루 5백 원씩 몇 달만 지원해 달라'고.
다음날 서울 안국동의 정독도서관을 찾아갔다. 입장료 50원, 교통비 90원*왕복=180원, 아부라기 국물 50원*2그릇=100원 그리고 솔담배 450원. 500원으로 하루 경비의 수지가 맞지 않아 담배는 모래판에 꽂혀있는 꽁초를 뽑아 폈다.
공부는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게 상책이다. 며칠 후 정독도서관 정문 앞 헌책방에서 <영어완전정복> 6권을 집어 들었다. 1학년 1학기 책의 본문 첫 페이지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된다. 3학년 2학기 책까지 총 3천 페이지 가까운 이놈들을 꼼짝 않고 정독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다시 정독을 했다. 보름이 걸렸다. 또다시 일주일 걸려 3번째 정독을 마치고 나니 천하를 얻은 것만큼 기뻤다. 벽돌 하나하나로 초석을 쌓는 심정으로 불같이 책과 씨름한 끝에 대학입시와 공무원 채용시험 모두 합격했다. 학원비 한 푼 안 들이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투자 자금 없이 시작한 사업치고는 성공한 셈이었다.
▲ 초원을 질주하는 일단의 야생마들 ⓒ 김경수
▲ 이보다 잔인한 코스는 이제껏 본적이 없다. ⓒ 김경수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건 참고서 <영어완전정복>에 적힌 한 구절의 문구였다.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가는 책표지 여백에 적힌 낙서였다. 옛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면 먼저 보던 학생이 끄적거린 게 분명했다.
"최후의 승리! 그것은 부단히 노력한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다!"
올라설 수 없을 것 같던 바닥끝에서 내 청춘의 큰 산 하나를 넘어섰다. 그 사건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여전히 내 가슴에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선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지만 오한이 엄습했다. CP에 지펴진 모닥불은 거의 사그라졌다.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너무 거대한 자연 앞에 서니 대자연과의 동화보다 내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가 간절했다. 변화무쌍한 그랜드캐니언에서 살아남는 건 대자연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 나를 극복해야 자연 앞에 우뚝 설 수 있다. 담대한 나로 마음을 고쳐먹어야 나약한 나를 이겨낼 수 있다.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찾아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 마른번개 후 나는 하늘에 비친 쌍무지개를 봤다. ⓒ 김경수
▲ 나는 나의 간다.그 길은 어느새 길이 되었다. ⓒ 김경수
사막과 오지를 달리다 보면 엄청난 모래 산을 넘어야 하고, 광활한 광야와 협곡을 건너기도 한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사막의 밤을 홀로 달리다 죽음의 문턱에서 숨을 헐떡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이 자리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슬럼프는 한계에 다다른 자만이 겪는 '행복한' 비명이다. 최선을 다했기에 한계까지 다다른 것이다. 바람은 움직임으로 존재하고, 도전의 결과는 기록으로 존재한다.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견뎌낼 것인가. 선택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 나는 오지를 달리는... 대한민국 대표선수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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