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와 같은 점이 있다면
[강원국의 글쓰기 20] 글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중국의 당송 8대가 중 한 사람인 소동파가 <적벽부>를 다 썼을 즈음, 친구가 찾아왔다. 소동파가 친구에게 "방금 시 한 편을 단숨에 지었다"며 보여줬다. 소동파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방석 밑을 보니 수도 없이 고쳐 쓴 종이 더미가 있었다.
명문을 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한 작품을 수십 년 동안 붙들고 고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십 수백 편을 쓰는 것이다. 수많은 글을 쓰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나라면 전자에 도전하겠다. 후자는 요행수를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60년 가까이 썼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60년간 쓰고 고치고 다듬으면 괴테처럼 못 쓰겠는가.
우리가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와 같은 점이 있다면, 그들이나 우리나 초고가 엉망이라는 사실이다. 헤밍웨이가 그랬다. "나의 모든 초고는 걸레다." 다른 점도 있다. 헤밍웨이나 톨스토이는 열심히 고쳤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 쓰는 사람은 잠깐 쓰고 오래 고친다. 못 쓰는 사람은 오래 쓰고 잠깐 고친다. 쓰다가 진이 빠져 고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꼴도 보기 싫다. 쓰기는 재미없고 힘들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백지를 응시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고치기는 재미있다. 틀린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 글이 점차 개선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다.
나는 글을 두 단계로 나눠 쓴다. 1단계로 쓰고, 2단계로 고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쓰면서 고친다. 머릿속으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래서 글쓰기가 힘들다. 쓰면서 고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머릿속에 있는 걸 쥐어짜 꺼내기도 바쁜데, 그것을 고치기까지 하다니. 일단은 쓰고 나서 고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자. 찾아볼 것도 많고 확인할 것도 많다. 여기에 공을 들이자.
고치기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 하수는 단어와 문장부터 고치려 든다. 고수는 전체 구조부터 본다. 하수는 첫 줄부터 고치지만, 고수는 중간부터도 보고, 끝에서 앞으로 반대로도 본다. 그래서 하수는 <수학의 정석> 1장만 공부하듯 첫 문단만 갖고 논다. 고수는 초고를 단지 고치기 위해 쓴 글쯤으로 여긴다.
또 하수는 초고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그것에 얽매인다. 그래서 고수는 글을 쓰고 나면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수는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고수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지, 설득력이 있는지, 흐름은 매끄러운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한다. 또한 문맥 중심으로, 문단 별로 떼어서, 문장에 집중해서, 그리고 더 맞는 단어에 주안점을 두고 본다. 하수는 맞춤법에 매달린다.
고수는 고칠 게 있다고 확신하고 본다
하수는 퇴고에 관해 핑계가 많다. '초안 쓰느라 진이 빠졌다', '귀찮다', '시간 없다', '고쳐봤자 거기서 거기다', '고칠 게 없다' 등. 반면 고수는 핑계 댈 시간에 고친다. 하수는 쓰면서 고치느라 끝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에너지 고갈을 핑계로 흐지부지 끝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고수는 일단 쓴 후에 고치기 때문에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일은 없다. 고수는 글을 쓴 후 일정 시간 묵혀둔다. 쓴 사람에서 읽는 독자로, 연기자에서 감독으로, 작가에서 평론가로 변신하는 시간이다.
쓰고 나면 글과 멀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글이 익숙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칠 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간은 세 가지 혜택을 준다. 글을 낯설게 하고, 내 역할을 바꿔주며, 생각을 숙성시킨다. 시간이 없으면 문밖이라도 나갔다 온다. 그러나 묵혀두는 시간이 너무 길면 안 된다. 감을 잃지 않는 지점까지라야 한다. 하수는 쓰자마자 곧바로 보기 때문에 고칠 게 없다고 한다. 당연하다. 방금 그렇게 썼다면, 그리 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고.
고수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보고, 출력해서 종이로도 보고, 소리 내 읽어도 본다. 처음에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부분을 손으로 체크하고,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 체크한 부분을 고친다. 하수는 모니터로만 본다. 손, 눈, 입, 귀를 사용하는 고수와 눈만 쓰는 하수는 결과에서 차이가 크다. 고수는 짧게 여러 번 본다. 언뜻 보면 더 잘 보인다. 힘도 들지 않는다. 하수는 길게 한 번 본다.
고수는 장소와 시간을 바꿔가면서 본다. 하수는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 고수는 쓴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다. 하수는 지적이 두려워 혼자 끙끙댄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고수는 고칠 게 반드시 있다고 확신하고 본다. 하수는 혹시 고칠 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본다. 나아가 고수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고 있고, 하수는 무엇이 틀렸는지 모른다.
글을 고치려고 해도 고칠 것이 안 보인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둘 중 하나다. 초안을 완벽하게 썼거나, 무엇을 고쳐야 할지 모르거나. 나는 세 가지를 고친다. 먼저, 빠진 것이 없는지 본다. 놓친 게 있으면 채워 넣는다.
다음으로, 뺄 것이 없는지 본다. 빼도 되는 것은 무조건 뺀다. 동어반복도 그중 하나다. 예를 들면 '완전히 근절', '다른 차이점', '어려운 난관', '오랜 숙원', '보는 관점', '개인적인 사견', '미리 예약', '지나치게 과소평가', '약 100명 정도', '대강의 개요', '새로운 신제품', '고맙고 감사하다' 등이다. '을/를/이/가/의'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했다'는 '생각했다'로, '공부를 했다'는 '공부했다'로, '생각이 났다'는 '생각났다'로, '합의가 됐다'는 '합의됐다'로, '경제의 민주화'는 '경제 민주화'로 쓰자. 나는 버스 광고 문안에서 이런 '을/를/이/가/의'가 눈에 띄면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순서를 바꿀 것은 없는지 살펴본다. 순서만 바꿔도 글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을 앞에 넣을지, 뒤에 넣을지 늘 고민한다. 글을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내용일 경우에는 앞에 두는 게 맞다. '초두효과'를 겨냥한다. 잘 모르는 내용일 때는 뒤에 넣는 미괄식 구성을 통해 '최근효과'를 노린다.
글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글 쓰다 보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알면서 범하기도 하고, 모르는 가운데 범하기도 한다. 알면서 범하는 것은 실수다. 실수가 반복되면 글을 잘 쓸 수 없다. 모르면서 범하는 오류가 더 문제다. 무엇이 오답인지 모르는 경우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공부와 퇴고다. 공부해서 무엇이 틀렸는지를 알고, 퇴고를 통해 찾아 고쳐야 한다. 오류를 바로잡기만 해도 잘 쓸 수 있다.
네 가지 오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맞춤법 오류를 잡아낸다. 오탈자와 띄어쓰기 같은 작은 오류가 글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둘째, 사실의 오류를 잡아낸다. 지명, 인명, 연도, 수치를 비롯해 사실관계를 체크한다. 셋째, 문장의 오류, 즉 비문을 잡아낸다. 넷째, 논리의 오류를 잡아낸다. 비약은 없는지, 개연성이 있는지 따져본다.
퇴고는 얼마만큼 해야 할까. 그렇게 물으면 나는 차를 운전할 때 언제 브레이크를 밟느냐고 물어본다.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밟을 것인지는 각자 감으로 안다. 차의 제동 성능이 어떤가, 운전자의 성격이 급한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 허용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운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안전을 중시하는 등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퇴고를 멈추는 시간도 글 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번 쓴 글은 꼴도 보기 싫다는 사람, 더 이상 고치면 나빠질 것 같은 시점까지 고치는 사람 등 다양하다. 글을 오래 쓰다 보면 마감까지 남은 시간과 원고의 중요도, 쓴 원고의 질, 평소 글에 대한 자신의 기대수준이 반영돼 자기도 모르게 '이만하면 됐다'며 펜을 놓는 순간이 온다. 이 지점을 잘 아는 사람이 프로다.
글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오답을 적게 쓰면 잘 쓰는 것이다. 오답을 줄이는 과정이 퇴고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오답노트가 머릿속에 있다. 거기에 맞춰 글을 고친다. 머릿속에 오답 체크리스트가 없으면 고칠 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1년 정도 했다. 일곱 권의 책을 편집하면서 교정, 교열, 윤문 작업을 했다. 교정은 명백하게 틀린 부분을 고치는 일이다. 오탈자 등을 찾아 고친다.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외래어표기법에 어긋나는 것을 수정한다. 교열은 어색한 부분을 바로잡는 일이다. 주술관계나 병치관계, 수식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수정해 문맥을 가다듬는다. 윤문은 말 그대로 반짝이게 닦는 일이다. 틀리진 않았지만 좀 더 쉽고 명료하게 다듬는다. 더 잘 어울리는 단어와 표현을 찾고 문장과 문단 순서를 바꾼다. 그 당시 책상에 붙여놓은 나의 퇴고 체크리스트를 소개한다.
1. 문장을 더 자를 순 없는가.
2. 뺄 것은 없는가.
3. 더 맞는 단어는 없는가.
4. 반복되는 단어는 없는가.
5.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없는가.
6. 인명, 지명, 연도, 외래어 오류는 없는가.
7. 문장과 문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가.
8. 주어-술어, 목적어-술어 호응은 맞는가.
9. 와/과, 하고/하며 전후의 문구는 대등한가.
10. 수식어와 피수식어 관계는 적절한가.
11. 주어와 목적어 누락은 없는가.
12. 서술어는 간략하고 다양한가.
13. 불필요한 피동형은 없는가.
14. 어색한 조사와 어미 사용은 없는가.
15. 문장과 문단 순서를 바꿀 곳은 없는가.
16. 상투적 표현은 없는가.
17. 부연 설명이 필요한 곳은 없는가.
18. 각 문단은 그 자체로 완결한가.
19. 하고자 하는 말이 드러나는가.
20. 독자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잘 쓴 글은 없다
이렇게 체크리스트에 맞춰 고치는 습관을 들이면 세 가지를 얻는다. 첫째, 쓰면서 체크리스트가 자꾸 생각나 아예 그렇게 쓰게 된다. 그러면 더 높은 수준으로 체크리스트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에 따라 내 글쓰기 실력이 향상된다.
둘째, 조직의 문서 작성 효율이 올라간다. 상사가 체크리스트를 갖고 있으면 일관되게 글을 고칠 수 있다. 그래야 부하 직원이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어느 때는 통과됐던 내용이 어떤 때에는 지적 대상이 되고, 같은 내용인데 김 대리가 쓰면 통과되고 이 대리에게는 짜증 내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헷갈린다. 스트레스를 받고 시간을 낭비한다. 상사 자리에 체크리스트를 붙여두면 아마 직원들이 와서 보고 그에 맞춰 글을 쓸 것이다.
셋째, 자신만의 문체가 생긴다. 시내에 다니다 보면 어떤 건물은 어느 회사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회사 고유의 기업이미지 매뉴얼(CI)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체크리스트는 그런 역할을 한다. 자신만의 체크리스트에 맞춰 고치는 노력을 지속하면 글만 봐도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그래서 누군가 퇴고의 종착지는 문체의 완성이라고 했다.
글쓰기 능력은 글 고치기 능력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잘 쓴 글은 없다. 잘 고쳐 쓴 글만 있다. 글쓰기는 고치기 승부다. 만약 지금 만족스러운 글을 못 쓰고 있다면 아직 덜 고친 것이다. 또한 글쓰기 능력은 고치기를 통해 향상된다. 퇴고는 가장 좋은 글쓰기 공부다. 글쓰기는 첨삭을 통해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며, 퇴고야말로 스스로에게 하는 첨삭지도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퇴고의 연속이다. 직장생활 26년 동안 여덟 차례 옷을 바꿔 입었다. 증권사 신입사원 시절, 여직원 등쌀에 못 이겨 그만둘까 생각했다. 신혼이던 당시, 아내에게 여직원의 괴롭힘을 얘기하며 울 뻔했다. 나약한 영혼이었다. 그러다가 과장으로 진급해서 M&A팀으로 발령이 났다. 담당 임원의 극진한 배려로, 당시 최고 각광받던 부서로 갔고, 동기들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고, 내게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사표 내기 직전, 회장비서실에서 불러줬다. 회장비서실에서는 실제로 사표를 냈다.
두 달여 방황 끝에 돌아와 청와대에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께 구두 사직서를 냈다가, 대통령 배려에 감동해 생각을 접었다. 효성그룹에 가서 한달 보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벤처기업에서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위암 선고를 받았다. 그만뒀다. 다시 중견기업을 그만두고 출판사에 갔다. 그리고 출판사를 그만뒀다. 들어가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마치 쓰고 고치는 글쓰기와 닮았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일단 쓴 원고처럼 훌쩍 저지르고, 평생 퇴고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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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