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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고대하던 그날, 내가 본 '여명의 황새울' 작전

2006년 5월 4일, 잊히지 않는 폭력 진압...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등록|2018.05.05 16:03 수정|2018.05.05 16:03
12년 전 5월 4일,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 불과 12살 어린 소년이었지만 지금까지 그 모습과 소리들이 머리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대추리 평화마을과 미군부대를 찾아갔고, 대추리 평화마을 이장님과 나눈 이야기 그리고 12년 전 생생했던 기억을 되짚어 보려고 한다. - 기자말

2006년 5월 4일을 기억한다. 내가 살고 있었던 뒷동네, 우리 집과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던 마을, 대추리에 이른 아침부터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름하여 '여명의 황새울 작전'.

마을 사람들은 대추리의 황금빛 논밭을 일컬어 '황새울'이라 불렀다. 그 평화로운 시골 마을 논밭이 작전명이 되기 전까지, 이 땅은 그저 농사 지으며 오순도순 살던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어린이날을 고대하던 12살 초등학생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행정대집행이 일어나기 근 한 달 전부터 매일 같이 시위대와 기자들 그리고 갑옷, 헬멧, 방패 등으로 중무장한 전의경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 대추리로 향했으니까.

먼발치에선 흙먼지가 자주 날렸던 기억이 난다. 사실은 그때 이들이 지나가기만 하면 왜 흙먼지가 날렸는지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흙먼지는 단순한 '걸음의 흔적'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과 평화로운 시골 마을 '황새울'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 2006년 5월 4일 경찰이 대추분교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평택범대위 지도부가 대추분교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 2006년 5월 4일 오전 경찰들이 대추분교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여러명의 경찰들이 쓰러진 한명의 시위자를 집단구타하고 있다. ⓒ 권우성


흙먼지에 가려 가까이에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참혹했던 그날의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동네, 우리 집과 대추리가 그 정도로 가까웠다. 경찰과 군인을 피해 논밭을 밟으며 도망치던 그 누군가의 소리, 경찰의 곤봉에 맞아 쓰러지며 내던 짧은 외마디 비명 소리, 그리고 피를 흘리며 다시 우리 집 앞으로 도망치던 울분의 소리. 나는 그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민주정권이다. 참여정부이다. 시장이 여당 출신이고 국회의원도 여당출신이다 하는 소리들은 의미 없는 말들이었다. 그저 고상한 말장난들이었으리라. 그들이 한 건 없다. "해결해 줄테니 우리만 믿어라, 합의문에도 평택시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니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했지만, 다가올 지방선거와 총선 공천에만 눈이 멀었는지 중앙 정부를 설득하고 주민들을 위로 하기는커녕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그렇게 용산 미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주둔을 명목으로 밀어부친 결과 '대추리'라는 마을 하나가 없어졌다. 또한 대추리와 인근해 있던 마을인 도두리와 본정리, 내리, 송화리, 안정리 등 마을들이 분진과 소음 등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던 노성리를 포함한 평택시 팽성읍 전역과 인접한 도시인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일대가 미군 헬기와 전투기, 사격 소리 등으로 인해 소음 등을 포함한 간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학교를 다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전투기 소리, 헬기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모습이, 무슨 일이냐며 전쟁 났냐며 당황해 하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사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내 머리 위에는 늘 헬기와 전투기가 떠다녔으니까. 나에게는 그런 소리가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소음들이었다. 나는 늘 그렇게 머리 위에 미군의 첨단 무기들을 이고 살았다.

지금의 미군기지는 어떠한가?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가 2020년까지 평택 미군기지에 통합 이전을 완료한다고 한다. 사실 미8군 사령부가 작년 평택에 내려옴에 따라 실질적인 이전은 완료된 셈이고, 미군들 수요에 맞는 편의시설을 짓는 것이 최종 단계에 있다.

미군부대와 인접한 동네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원룸과 렌탈 하우스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부동산이 판을 치고 각종 신도시와 도로가 정비, 재개발 되고 있다. 평택시청과 시장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평택이 앞으로 '국제화 중심 도시', '제 2의 이태원' 이 될 것이라며 미군기지 홍보와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토종씨앗 지킴이 마을 대추리' (2018.05.04)미군기지 이전 등으로 인해 터전을 쫓겨나 인근 동네인 '노와리'에 정착한 '대추리 평화 마을' 을 알리는 팻말이다. ⓒ 신원택


대추리 평화마을의 마을 안내도대추리 평화마을을 알리는 마을 안내도 팻말이 마을 입구에 서있다. ⓒ 신원택


당시 투쟁했던 주민들은 생존권을 빼앗겨 한순간 나앉게 되었고, 살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에 '대추리 평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행정구역상 이름은 '노와리'이다. 그렇게 평화마을에 들어간 게 44가구. 지근 거리에 고향을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받지 못했고, '대추리'라는 이름도 돌려 받지 못했다. 그렇게 고향 땅의 이름을 고대하던 마을 주민들은 어느덧 백발이 된 노인이 되거나, 이제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다.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성공적으로 각자 상생을 성공적으로 도모하였다. 혹자는 통일이 빠르게 다가올 거라고 한다. 통일이 되도, 주한미군이 철수해도 이들이 돌아갈 고향 마을 '대추리'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이를 잊지 않는 한 '대추리'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대추리 평화마을을 알리는 장승.대추리 평화마을(노와리) 입구에 마을을 알리는 나무 장승이 서있다. ⓒ 신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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