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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에 불을 붙인 채 구청으로 걸어간 청년

"무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살아남은 광주 시민군, 홍기일의 절규

등록|2018.05.14 14:55 수정|2018.05.14 14:55

▲ 죽도봉에서 보이는 순천 동천강 ⓒ 참여사회


"사진이고 뭐고 없어요. 가져가면 돌려주지를 않아."

통화할 때마다 듣기만 하던 분이 세 번째 통화 만에 자신의 말을 툭 꺼내셨다. 많이들 다녀갔지만, 가져간 자료는 돌아오는 법이 없더라는 그녀의 말에는 오랜 세월 뱉어내지 못한 그녀의 마음도 함께 담겼다. 그녀는 1991년 5월 18일 분신했던 노동자 이정순의 동생 이옥자였다. 제작을 결심한 때부터 '뵙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인터뷰이였는데, 인터뷰는커녕 고인의 사진 한 장 얻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두 해가 지나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드린 인터뷰 요청에도 답을 듣지 못했는데, 이틀이 지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려오씨요." 한달음에 찾은 곳은 순천 죽도봉이었다. 그녀의 언니가 남긴 어린 시절 사진의 배경에도 죽도봉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순천 동천이 흐르고 있었다. 촬영을 간 날은 한여름이어서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매미 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여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던 차에 이옥자 씨가 말했다.

"우리도 우리지만 기회되믄 홍기일이란 사람의 이야기도 감독님만큼은 알았으면 하요."

스무살의 광주 청년, 홍기일

홍기일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만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나가면 죽는다는 부모의 만류에도 한사코 광주 시내로 나갔다고 현재 여든일곱의 노모인 조창님 씨는 증언한다. 저간의 사정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그는 광주의 살육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총상을 입었던 그는 화순에 있는 고모 집에서 1년 동안 약국만 다니면서 가료(加療)를 했다고 한다.

"껍데기가 벗겨져 부렀어요."

당시 그의 왼쪽 종아리 피부는 벗겨져 있었는데, 그 정도 상처라면 1년 동안 숨어서 치료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에게만큼은 그 모든 일을 비밀에 부쳤다. '아들은 일하러 갔다'고 그렇게만 일러두었다. 남편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85년 8월 15일, 광주 전남도청 앞

광주 학살의 원흉이 최고 권력을 누리는 동안, 홍기일은 건설 일용노동자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1985년은 그가 사우디에서 미장공으로 일한 뒤 귀국한 해였다. 그해 8월 15일 12시가 넘어 광주YMCA 앞 버스승강장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유인물을 나눠주던 청년을 목격한다.

무심결에 받은 종이를 들고만 있을 뿐 펼쳐볼 생각 없는 덥고 나른한 낮이었다. 그러다가 하얀 연기 덩어리가 무슨 소리를 지르며 도로를 지나는 것이다. 갑자기 놀라움으로 순식간에 휘둥그러움을 뒤로 하고 여러 소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 2009.8.17. <나주신문> 독자투고 중

홍기일은 광주 YMCA 앞 차도에서 구호를 외치고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린 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동구청 쪽을 향했다. 그의 노모는 그가 분신하기 며칠 전부터 수건을 자꾸 빨았다고 했다. 여러 장의 수건에는 거뭇거뭇한 것이 묻어 있었는데 며칠 동안 그 일이 반복되었다고 했다. 노모는 그것을 유인물을 찍어내느라 그랬다고 추측한다.

85년 당시의 인쇄기는 복사기가 아니라 등사기가 보편적이었다. 등사원지 한 장으로 수백 장 정도를 인쇄할 수 있는데, 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는 시간이 꽤 걸리는 데다, 원통에 원지를 붙이는 윤전식도 아니고 수동식 등사기였다면 종이를 한 장씩 밀어내고 제친 다음 다시 밀어야 하는 매우 불편한 인쇄기였다.

그는 알고 지낸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등사기를 며칠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오직 혼자만의 노동으로 찍어 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가 아니었던 그는 그만큼 시간도 걸렸을 것이고 여기저기 묻은 잉크도 홀로 닦아내야 했을 것이다.

▲ 노동자 홍기일의 모습 ⓒ 참여사회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그의 유서에는 80년 광주의 기억이 새겨져 있었다.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이름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버님 누군가 누군가가 우리 모두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빈부의 격차를 떠나 산다는 의미의 지혜가 이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선 성냥이 필요합니다."

그가 분신한 시점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 한가운데였다. 그가 병상에 있었던 일주일 내내 경찰이 상주했다. 경찰과 타협 말라는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 절차는 경찰의 주도 아래에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돌이켜보면, 이정순의 동생 이옥자 씨와의 인터뷰가 있던 날도 여름 한가운데였다. 그녀는 언니의 알뜰한 삶을 회상할 때는 또렷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지만, 유가족으로서의 고립된 삶에 대한 이야기에 다다르자 말을 멈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촬영에 가시 같았던 매미 소리만이 그녀의 흐느낌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권경원님은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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