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 사이에서 잠잤다는 어린 신부, 오죽하면...
'일본어' 공부로 시작된 할머니의 인생사... 열여섯 소녀의 꿈
"뭐 읽는다고 하데, 책 좀 들고 와봐라."
"무슨 책? 할머니, 무슨 책?"
"일본어 배운담서! 그 책!"
아까 엄마가 외출하실 때, 내가 '잇떼랏샤이(다녀오세요)'라고 외친 소리를 할머니께서 들으신 모양이다. 최근 일본어를 취미삼아 배우면서 얼른 익히려고 일상 속에서 자주 쓰고 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 표정이 꽤 흥미로워 보인 듯싶더니만, 오늘은 내가 배우는 일본어 교재가 궁금하신 듯하다.
1929년생인 우리 할머니는 일제강점기가 한창일 때 목포에서 태어나셨다.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아신다곤 들었지만, 내심 기대 반 신기함 반으로 쪼르르 책을 갖다 드렸다.
80년이 지나도 또렷한 기억
"아, 요, 츠, 키, 쥬..."
"와, 할머니. 이거 다 읽으실 줄 알아요?"
"알지, 히라가나, 가타카나 다 읽을 줄 알지. 잊을 리가 있나."
"할머니, 이건 어떻게 읽게?"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잘 부탁드립니다.)
교재 내용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시는 할머니를 보며 감탄을 터트리자, 할머니가 수줍은 소녀처럼 홍홍 웃음을 지으신다. 히나가라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손으로 짚으시며, 오랜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할머니는 생각이 많아지신 듯했다.
'다 기억나제... 다 기억나.'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유난히 우울했다. 아흔 살의 할머니, 남의 언어인 일본어를 80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소학교 내내 일본어를 배웠어. 교장 선생님은 물론 선생님들도 일본인이었지. 수업시간이든, 쉬는시간이든 온통 일본어를 썼지. 한 번이라도 조선어(우리말)를 썼다간 혼쭐나고 청소를 시켰지.
남자들은 배울 만큼 다 배웠는디, 그땐 여자들은 '여자가 뭔 배움이냐' 하면서 일본어 가르치는 소학교도 졸업 못혔어. 그때 여자는 겨우 세 명만 졸업혔지. 나는 6학년 때까지 운이 좋아 다녔는디, 그때야 조선어를 배웠어.
나는 일본어를 정말 잘혔어. 공부를 잘 혔고, 무용도 열심히 혔지. 그래서 일본인 교장이 나를 엄청 이뻐혔지. 그 집에 자식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를 자기 집에 데려오곤 했어. 끼니를 못 챙겨 먹으문 거서 밥을 묵었고, 아침엔 그 집에서 자고 학교로 등교도 혔어. 교장 마누래가 나에게 일본식 옷도 많이 해 입혔어. 다른 아들은 사쿠라 열매(벚꽃 열매) 못 따게 혔는데, 나는 양껏 딸 수 있었어. 친딸처럼 이쁨 받았제.
그런디 어느 날 학교에서 무용극을 혔는디, 내가 꽤 잘혔거든. 앞에 일본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자식 없는 경찰부장이랑 교장이 나를 양녀로 들일라 했어. 우리 아부지가 죽기 살기로 안 된다고 버텼제. 나가 그때 억지로 양녀로 끌려갔으문, 나는 지금 일본인이었을 거여."
모범생이던 할머니는 유난히 고운 얼굴과 타고난 재능을 지녀, 자식 없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양녀로 들이려 안간힘을 쓴 모양이다. 셈도 잘하셨던 똑똑이 할머니는, 동네 또래 아이들이 가게에서 돈 계산을 할 때 늘 주산을 도맡으셨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배경과 극심한 여성차별 속에서도, 할머니는 배움에 열정적이었던 흔치 않는 여학생이었다. 분명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있었을 열여섯 꿈 많은 소녀였으리라.
할머니 안에는 여전히 열여섯 소녀가 살고 있다
"열여섯에 학교를 졸업혔지. 그런디 그때 금산 쩍 살던 어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어. 집안에 돈 없는 사정상 어매가 나를 촌으로 시집을 보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제."
"그런 게 어딨어. 할머니는 그때 혼인하고 싶었어요?"
"좋고 말고가 어딨어. 그땐 선택하고 말고가 없었지, 그냥 당연한 거였제. 그렇게 얼굴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부렸어. 좋아하던 책만 딸랑 챙기들고서. 나는 여태꺼정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 아무것도 모르는 쪼매난 애가 촌에 뚝 하고 떨어진 거여. 논매고 밭매고 잡초 뜯고, 다 첨이었제. 그꺼정 좋아하던 무용도 다신 할 수 없었어. 매일 밤 울었제. 엄청 울었제.
내가 하도 울어싸니, 마을 사람들이 내가 친정으로 쫓겨날지 안갈지 내기도 했다니께. 근디 버텼어. 내가 말여, 할아부지가 한자를 못 읽으문 나가 일본어를 써 갖고 발음도 알려줬어. 시어미랑 시아비랑 같이 밤낮으로 나가 일도 혔어. 이래, 팔십 년을 산 거여 나가. 어릴 땐 공부도 잘혔고, 이뻤고, 무용도 잘혔는디. 어릴 적 그렇게 사랑받았는디, 이래 '반푼이'가 되어버렸네."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반푼이' 그 단어 하나가 얼마나 가시처럼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열일곱, 어리디어린 나이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남자에게 시집 갈 것을, 평생 허리 굽도록 논과 밭을 일궈야 함을, 어린 그녀는 알았을까. 그 꿈 많던 소녀는 열여덟에 네 남매의 어머니가 되셨다.
"다행히 시엄매가 나를 친 딸처럼 예뻐해 줬제. 나가 울믄 '아가, 아가' 하면서 달래줬제. 어린 나이에 시집온 나가 안쓰러웠나벼. 방이 부족하니께 할아버지가 밤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놀고 오믄, 시엄매랑 시아버지 사이에서 잠을 잤어, 진짜 딸 멩키로. 평생 나랑 말싸움 한 번 한 적 없어. 다른 며늘아가 들어와도, '너랑 같드나, 너랑 같드나' 하며 나를 보듬어줬제. 여태꺼졍 시엄매 덕분에 살아왔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일본어책을 내게 건네며 길고 긴 인생 스토리를 끝내려고 하자, 내가 문득 넌지시 물었다.
"할머니 만일 좋아하는 남자랑 혼인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으면, 그때로 돌아갈 거야?"
"안 혀. 욕 한 번도 안 하고 먹여 키운 내 새끼들이 있는디 어딜 가."
주름진 할머니의 웃음이 막 피어난 꽃처럼 환하다. 동그란 얼굴에 티 없는 미소, 열 일곱 할머니의 흑백사진이 떠올라 나도 덩달아 웃었다. 우리 할머니가 있었기에 우리 아빠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있었다.
눈부시고 찬란한 인생이 아니였더라도,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어머니였다. 낡은 세월 속에 꺾여버린 청춘이었더라도, 아직 할머니 속엔 꿈 많은 열여섯의 소녀가 살고 있다.
"무슨 책? 할머니, 무슨 책?"
"일본어 배운담서! 그 책!"
아까 엄마가 외출하실 때, 내가 '잇떼랏샤이(다녀오세요)'라고 외친 소리를 할머니께서 들으신 모양이다. 최근 일본어를 취미삼아 배우면서 얼른 익히려고 일상 속에서 자주 쓰고 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 표정이 꽤 흥미로워 보인 듯싶더니만, 오늘은 내가 배우는 일본어 교재가 궁금하신 듯하다.
1929년생인 우리 할머니는 일제강점기가 한창일 때 목포에서 태어나셨다.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아신다곤 들었지만, 내심 기대 반 신기함 반으로 쪼르르 책을 갖다 드렸다.
80년이 지나도 또렷한 기억
▲ 일본어교재를 읽어보시는 할머니할머니가 일본어교재를 찬찬히 뜯어보시며 읽어보시고 계시다. ⓒ 송혜림
"아, 요, 츠, 키, 쥬..."
"와, 할머니. 이거 다 읽으실 줄 알아요?"
"알지, 히라가나, 가타카나 다 읽을 줄 알지. 잊을 리가 있나."
"할머니, 이건 어떻게 읽게?"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잘 부탁드립니다.)
교재 내용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시는 할머니를 보며 감탄을 터트리자, 할머니가 수줍은 소녀처럼 홍홍 웃음을 지으신다. 히나가라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손으로 짚으시며, 오랜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할머니는 생각이 많아지신 듯했다.
'다 기억나제... 다 기억나.'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유난히 우울했다. 아흔 살의 할머니, 남의 언어인 일본어를 80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소학교 내내 일본어를 배웠어. 교장 선생님은 물론 선생님들도 일본인이었지. 수업시간이든, 쉬는시간이든 온통 일본어를 썼지. 한 번이라도 조선어(우리말)를 썼다간 혼쭐나고 청소를 시켰지.
남자들은 배울 만큼 다 배웠는디, 그땐 여자들은 '여자가 뭔 배움이냐' 하면서 일본어 가르치는 소학교도 졸업 못혔어. 그때 여자는 겨우 세 명만 졸업혔지. 나는 6학년 때까지 운이 좋아 다녔는디, 그때야 조선어를 배웠어.
나는 일본어를 정말 잘혔어. 공부를 잘 혔고, 무용도 열심히 혔지. 그래서 일본인 교장이 나를 엄청 이뻐혔지. 그 집에 자식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를 자기 집에 데려오곤 했어. 끼니를 못 챙겨 먹으문 거서 밥을 묵었고, 아침엔 그 집에서 자고 학교로 등교도 혔어. 교장 마누래가 나에게 일본식 옷도 많이 해 입혔어. 다른 아들은 사쿠라 열매(벚꽃 열매) 못 따게 혔는데, 나는 양껏 딸 수 있었어. 친딸처럼 이쁨 받았제.
그런디 어느 날 학교에서 무용극을 혔는디, 내가 꽤 잘혔거든. 앞에 일본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자식 없는 경찰부장이랑 교장이 나를 양녀로 들일라 했어. 우리 아부지가 죽기 살기로 안 된다고 버텼제. 나가 그때 억지로 양녀로 끌려갔으문, 나는 지금 일본인이었을 거여."
모범생이던 할머니는 유난히 고운 얼굴과 타고난 재능을 지녀, 자식 없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양녀로 들이려 안간힘을 쓴 모양이다. 셈도 잘하셨던 똑똑이 할머니는, 동네 또래 아이들이 가게에서 돈 계산을 할 때 늘 주산을 도맡으셨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배경과 극심한 여성차별 속에서도, 할머니는 배움에 열정적이었던 흔치 않는 여학생이었다. 분명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있었을 열여섯 꿈 많은 소녀였으리라.
할머니 안에는 여전히 열여섯 소녀가 살고 있다
"열여섯에 학교를 졸업혔지. 그런디 그때 금산 쩍 살던 어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어. 집안에 돈 없는 사정상 어매가 나를 촌으로 시집을 보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제."
"그런 게 어딨어. 할머니는 그때 혼인하고 싶었어요?"
"좋고 말고가 어딨어. 그땐 선택하고 말고가 없었지, 그냥 당연한 거였제. 그렇게 얼굴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부렸어. 좋아하던 책만 딸랑 챙기들고서. 나는 여태꺼정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 아무것도 모르는 쪼매난 애가 촌에 뚝 하고 떨어진 거여. 논매고 밭매고 잡초 뜯고, 다 첨이었제. 그꺼정 좋아하던 무용도 다신 할 수 없었어. 매일 밤 울었제. 엄청 울었제.
내가 하도 울어싸니, 마을 사람들이 내가 친정으로 쫓겨날지 안갈지 내기도 했다니께. 근디 버텼어. 내가 말여, 할아부지가 한자를 못 읽으문 나가 일본어를 써 갖고 발음도 알려줬어. 시어미랑 시아비랑 같이 밤낮으로 나가 일도 혔어. 이래, 팔십 년을 산 거여 나가. 어릴 땐 공부도 잘혔고, 이뻤고, 무용도 잘혔는디. 어릴 적 그렇게 사랑받았는디, 이래 '반푼이'가 되어버렸네."
▲ 일본어를 읽어보시는 할머니일본어 교재에 있는 일본어를 한자 한자 막힘없이 읽어내려가시는 할머니. ⓒ 송혜림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반푼이' 그 단어 하나가 얼마나 가시처럼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열일곱, 어리디어린 나이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남자에게 시집 갈 것을, 평생 허리 굽도록 논과 밭을 일궈야 함을, 어린 그녀는 알았을까. 그 꿈 많던 소녀는 열여덟에 네 남매의 어머니가 되셨다.
"다행히 시엄매가 나를 친 딸처럼 예뻐해 줬제. 나가 울믄 '아가, 아가' 하면서 달래줬제. 어린 나이에 시집온 나가 안쓰러웠나벼. 방이 부족하니께 할아버지가 밤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놀고 오믄, 시엄매랑 시아버지 사이에서 잠을 잤어, 진짜 딸 멩키로. 평생 나랑 말싸움 한 번 한 적 없어. 다른 며늘아가 들어와도, '너랑 같드나, 너랑 같드나' 하며 나를 보듬어줬제. 여태꺼졍 시엄매 덕분에 살아왔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일본어책을 내게 건네며 길고 긴 인생 스토리를 끝내려고 하자, 내가 문득 넌지시 물었다.
"할머니 만일 좋아하는 남자랑 혼인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으면, 그때로 돌아갈 거야?"
"안 혀. 욕 한 번도 안 하고 먹여 키운 내 새끼들이 있는디 어딜 가."
주름진 할머니의 웃음이 막 피어난 꽃처럼 환하다. 동그란 얼굴에 티 없는 미소, 열 일곱 할머니의 흑백사진이 떠올라 나도 덩달아 웃었다. 우리 할머니가 있었기에 우리 아빠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있었다.
눈부시고 찬란한 인생이 아니였더라도,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어머니였다. 낡은 세월 속에 꺾여버린 청춘이었더라도, 아직 할머니 속엔 꿈 많은 열여섯의 소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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