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교육열은 전쟁도 무색케 만들었다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38] 불타버린 교실... 야외수업 받던 학생들
당시 전란을 치른 대부분의 고장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부모들의 교육열은 대단해 학교에서는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심지어는 3부제 수업까지도 시행했다. 전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경우는 한 학급의 학생 수가 100명 내외로 전교 학생 수가 1만 명 가까워 당시 세계 최대라는 불명예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옛 친구들 초대로 모처럼 고향 구미에 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정담을 나눴다. 고향에 사는 한 친구는 "대통령까지 배출한 모교 구미초등학교가 입학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얘기에 동창들은 모두들 넋을 잃었다. 대도시로 변한 내 고향조차도 그렇다니,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구 감소 절벽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쓰면서 인터넷으로 구미초등학교 학생 현황을 검색해 봤다. 전교생이 105명으로, 지난날 1개 학년의 학생 수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비단 구미초등학교만의 현황이 아니다. 이즈음 웬만한 시골학교는 폐교됐거나 폐교 직전의 상태다.
이번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38회에서는 전란 중에도 왕성했던 교육 현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로 꾸며 봤다. - 기자의 말
▲ 1953. 10. 22. 서울, 전란으로 학교 교실이 잿더미가 되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불탄 교실 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 1950. 10. 서울 은평, 전쟁으로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 1950. 11. 1. 전쟁 중이었지만 원산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게 학교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 ⓒ NARA
▲ 50. 11. 1. 원산,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 NARA
▲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 1951. 미국의 원조로 만든 교과서를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읽고 있다. ⓒ NARA
▲ 1951. 미국의 원조로 만든 초등학교 각종 교과서들 ⓒ NARA
▲ 1952. 7. 전쟁 중 한 피란지 임시 초등학교의 운동장 조회시간이다. 동구 밖 밭에다가 임시로 천막을 치고 학교를 열었다. ⓒ NARA
▲ 1952. 11. 24. 마산의 한 중학교 교실. ⓒ NARA
▲ 1952. 11. 25. 마산, 미군의 원조를 받고 있는 한 여자중학교 수업시간. ⓒ NARA
▲ 1953. 6. 5. 서울, 초등학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 1954. 3. 9. 경기도 문산. 한 중학교 임시 교실. ⓒ NARA
▲ 1954. 5. 13. 한 초등학교의 수업시간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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