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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한 문장들' 그 속에 깃든 의미

[책과 나 사이에 있는 것들 1]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등록|2018.05.18 08:01 수정|2018.05.18 08:01
학창시절 나는 문방구의 단골손님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매일 둘러보는 곳이 문방구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예쁜 문구를 살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문구점의 진열대를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나서야 집에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검은색 잉크병이 눈에 들어왔다. 잉크병을 살살 흔들어 보았다. 검은 물이 찰랑 거렸다. 내 마음에서도 뭔가 꿈틀거렸다. 나무 펜대와 펜촉도 샀다. 문방구 주인에게서 펜대에 펜촉 끼우는 법을 배웠다. 1930년대의 낭만을 직접 만져보는 느낌이었다. 그 시절 작가들은 이렇게 글을 썼겠지 하는 상상을 했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 위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펜과 종이의 마찰음으로 빚어지는 글자들. 이상과 현실의 마찰로 부대끼는 청춘의 시간들. 뾰족한 펜 끝에서 이어지는 까만 잉크에 내 마음을 담아보려 했다. 처음엔 윤동주의 <자화상>을 따라 썼다. 산울림의 <청춘>이라는 노랫말도 써보았다.

어떤 날에는 손가락에 검은 잉크 자국이 물들었다. 비누로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자국은 불안한 내 마음만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다 비워낸 잉크병을 보면 속이 후련해졌다. 투명한 잉크병의 바닥을 보려고 글자를 끄적거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혼자서 뭔가를 끄적였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불안함에 어울릴 만한 글자들을 찾아다녔다. 그 끄적거림은 낙서 같은 시였고, 일기 같은 수필이었다. 방에 틀어 박혀 내 멋대로 썼다. 내 겨드랑이에서 새롭게 매달릴 가지 하나가 돋아났다. 나를 위한 글쓰기.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 받는다." (60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말이 있다. 전업 작가가 아닌 일반인이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무작정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풍겨지는 애잔함을 각별하게 받아들이는 한 사람이 있다. <청춘의 문장들>의 작가 김연수이다. 그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글을 쓸 수 없는 전업 작가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났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 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 ⓒ 마음산책


<청춘의 문장>의 책머리에서 작가는 미처 말하지 못한 청춘의 자화상이 있다고 고백했다. 생략된 부분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짐작해주기를 바랐다. 작가 자신이 책의 문장을 여러 번 곱씹으며 살폈듯이, 독자들도 짐작해보기를 권했다.

"그리워라는 말에는 지금 내게 당신이 빠져 있다는 뜻이 담겼다는 걸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중략) 그렇게 우리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도넛과 같은 존재니까." (9쪽)

제과점 집 아들로 태어난 그가 자신을 구멍이 뻥 뚫린 도넛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애써 감춰놓고서 뭘 짐작해보라는 것인가. 소설 작품으로만 만나왔던 작가 김연수의 개인사를 알게 되리라는 설렘으로 부풀었던 내게 부드러운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대학 3학년 때는 시인으로, 대학 4학년 때는 소설가로 등단하면서 순탄할 것만 같은 그의 문학 인생에 어떤 뿌리 깊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왜 시 대신 소설 장르로 방향을 바꿨는지도 궁금했다. 이 모든 걸 다 내 몫으로 남겨놓다니, 고수도 저런 고수가 없지 않은가.

짐작은 자신의 경험에서 싹튼다. 차마 이 책에 다 쓰지 못한 청춘의 이야기란 읽는 독자들마다 다 다르게 떠올려질 것이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재료삼지 않는다면, 짐작은 해 볼 수가 없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그 끈이 이어질 수 있다면, 짐작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오독이나 오해 따위는 모른 척 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알려주는 것일까.

<청춘의 문장들>에는 한문으로 쓰인 시나 산문, 일본어로 쓰인 5.7.5조의 짧은 시 하이쿠와 젊은 시절 좋아하던 노랫말 등이 실려 있다.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라는 시에서 작가가 주목한 구절은 '君不見'이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그동안 '天生我材必有用'의 시구만을 읊조리며 하늘이 내어주신 재능이 무엇일까만을 궁금해 했던 터였다. 그가 7번 국도를 타고 자전거 여행을 할 때 황영조 마을의 바닷가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였다.

"나는 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더 없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84쪽)


젊은 시절, 하늘이 내주신 재능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받아들여서일까.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다. 학창시절 백일장은커녕 작문 시간에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다는 그의 수줍은 이야기에서 재능이란 하늘이 내어주는 게 아니라 혼자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챘다.

출판사의 독자모니터 모집에 응모해 그가 독자모니터가 된 것. 그런 그에게 글을 잘 읽었다는 시인의 격려가 담긴 메모지를 받게 된 것. 다시 만난 그 시인이 글을 잘 쓴다며 번역을 권해서 천문학과 대신 영문학과에 진학한 것. 그 속에서 필연을 만드는 우연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방황하고 번뇌했을지가 짐작됐다.

청나라 사람 장호(張湖)가 남긴 글 중에서 작가가 집중한 대목은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문장이었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장호가 사람됨에 있어 중요하게 여긴 벽을 두고, 작가는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문학을 하는 이유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함임을 밝혔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내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왜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매달리며 그가 찾아낸 소망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졸업 후 바로 전업 작가의 길로 뛰어들지 못하고 3년 동안 잡지사 일을 한 그의 젊은 날은 망설임과 망막함의 나날들이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건져 올린 그만의 절실함이란 누리면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을 청춘이라고 이름 지었던 작가는 지금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어디쯤인가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만은 아닐 테다. 문맥을 짚고 정황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글자 속에 담긴 기쁨과 회환을 헤아리는 걸 자기 몫이라고 했던 작가의 노력 덕분에,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한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수한 되새김의 흔적들이 엿보였다. "한문에는 봉사 단청 구경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한시의 한글풀이만으로 그런 문맥을 짚어낸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경험을 쏟아붓고, 배경 지식을 꺼내어, 읊조리고 읊조린 한 구절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부분에서는 뭉클한 감동마저 일었다. 고이 간직한 문장 몇 구절만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도 세상 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게 문장을 읽으려고 애썼는지, 그가 얼마나 진득하게 그 문장이 자기 것으로 이해될 때까지 두고두고 음미해왔는지가 보였다.

여전히 세상은 난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그 문맥을 짚어보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사람됨의 확장일 것이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짐작해보는 것. 납득되지 않는 불편함을 간직한 채 그 책의 문장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내는 것. 내면의 깊이를 넓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이 책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청춘의 한 시절과 그때의 사람들과 그 책과 그 노래가 만나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 속에서, 삶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출하게 간추려질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문장 하나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한 줄의 문장을 읽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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