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떠도는 귀신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사연
[독도탐방기] 유일한 샘터 물골... 독도 지킨 어부들의 아픔 서린 곳
▲ 독도에서 유일하게 먹을 물이 나는 물골 모습. 하루에 1천리터의 먹을 물이 흘러나와 해수담수화 시설이 없던 시기에 독도주민의 생명수였을 뿐만 아니라 어민들의 급수원이었다. 날아든 바다새들이 죽어 물이 오염되자 철망을 쳤다. ⓒ 오문수
물골! 마실물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도 북쪽에 위치한 물골은 지하수가 빠져나와 해식동 내에 물이 고인다. 주변에 형성된 주상절리를 따라 유수 등이 모여 하루에 1천리터 정도의 식수가 나는 곳이다.
적은 양이지만 독도에서 유일하게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해수담수화 시설이 없었던 시기에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현재는 파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로 제방(1966.11.22.)을 쌓았다.
하지만 제방으로 인해 습기가 차고 물골 안으로 들어온 조류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죽는 경우가 있어 지하수 오염이 발생하자 철망을 설치했다. 강한 파랑의 파식작용으로 물골 앞에 쌓인 자갈들은 어른 머리만큼 큰 왕자갈들이다.
▲ 갈매기 아래 탕건봉이 보인다. 탕건봉 왼쪽 바다 가운데 보이는 섬들이 강치들이 살았던 가제바위다. 물골로 내려가는 바위주변에는 식생이 잘 발달해 바다새들의 천국이었다 ⓒ 오문수
▲ 물골에서 대한봉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 군데군데 응회암 조각들이 굴러떨어져 약간 위험했다. 흙자갈들이 분포해 개밀, 갯제비쑥, 땅채송화 등의 식생이 잘 발달해 괭이갈매기, 바다제비, 흑비둘기, 슴새들의 천국이다 ⓒ 오문수
물골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쯤 가면 봉우리 형상이 탕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탕건봉이 있다. 탕건봉 상부의 기반암은 조면안산암으로 주상절리가 발달해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탕건봉 하부에는 바다에서 온 염분에 의한 풍화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난 타포니가 형성돼 숭숭 구멍이 뚫리거나 부식된 바위들이 위험해 보였다. 바다에는 붕괴된 응회암들이 쌓여있어 암석이 떨어질까 겁났다.
물골 상부의 연약지반에는 흙자갈들이 많아서인지 개밀, 갯제비쑥, 땅채송화 등이 자라고 있어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흑비둘기, 슴새들의 천국이 되고 있었다.
강치가 살았던 가제바위
물골 500여 미터 앞에는 수면위로 약간 솟아오른 10여개의 바위들이 있다. 이른바 바다사자들의 서식처였던 가제바위다. 수면위로 약간만 드러난 바위는 물개나 바다사자들이 서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가제바위에 대한 유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 오른쪽에 탕건봉이 보이고 바다 가운데 10여개 보이는 섬이 가제바위로 강치들의 서석처였다. 19세기초 4~5만 마리에 달했던 독도 강치는 일본어부들의 남획으로 1950년대에 멸종되고 말았다. ⓒ 오문수
▲ 물골 앞 바다에 갈매기들이 날고 있다. 갈매기 뒤로 아스라히 보이는 섬들이 강치가 살았던 가제바위다 ⓒ 오문수
"6월 26일 가지도(可支島)에 가서 보니 가지어(可支漁:가제, 강치, 바다사자) 네댓마리가 놀라 뛰어나왔다. 생김새는 수우(水牛)를 닮았고, 포수가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
동행한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가 울릉도 주민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강치(바다사자)의 꼬리가 나무 가지처럼 갈라져 '가지처럼 생긴 고기'라는 의미에서 가지어(可支漁)가 됐고, 이후 음운변화를 겪어 '가제바위'가 됐다는 설에 수긍이 갔다.
바다사자 몸길이는 수컷 2.4m, 암컷 2.0m이고 몸무게는 수컷 390㎏, 암컷 110㎏이다. 19세기 초반까지 4~5만마리가 독도 인근바다에 살았지만 일본어부의 남획으로 사라져버렸다.
▲ 가제바위 위에 있는 강치들. 일본 오키섬 죽도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김문길 교수가 수집해 제공했다. 김문길 교수 설명에 의하면 1910년경에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하고 있다 ⓒ 김문길
▲ 독도에서 조업 중인 일본 어부들 모습. 뒤에 삼형제굴바위가 보인다. ⓒ 김문길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는 김문길 교수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1904년부터 나카이 요사부로의 일본 다케시마어렵회사에 속한 어부들이 강치를 잡기 시작했다. 일본은 1904~1956년에 걸쳐 1만6614마리를 남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잡은 강치 이빨로 반지를 만들고 가죽은 가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일본 오키섬 죽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기는 기름으로 사용하고 산채로 잡은 강치는 서커스단에 팔았다.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 들어와 막사를 치고 한 달 내지 세달 동안 200마리 정도를 잡아 돌아갔고 195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멸종되고 말았다.
연합군최고사령부의 독도폭격사건으로 우리 어민들이 희생돼
울릉군에서 발간한 에코 관광가이드북인 <울릉도 독도> 179페이지에는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해방 후인 1947년 9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독도를 미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했다.
그 이듬해인 1948년 6월 8일 B29폭격기가 예고도 없이 4차례 폭격을 해 우리 어민들이 희생됐다. 폭격의 증거로 2006년 독도 해안 청소 때 물골 근처에서 포탄 파편들이 발견됐다. 독도아카데미가 발간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 34페이지의 내용이다.
▲ 동행한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와 필자가 물골 주위 바위에 기록된 암각서 20여개를 찾았지만 일본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 오문수
▲ 물골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기록된 암각서 20여개가 발견됐지만 일본어로 기록된 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오문수
"1948년 6월 8일, 예고없이 진행된 미공군의 독도에 대한 폭격으로 인해 동해안의 어민들이 희생됨(당시 150여명이 피격되었다는 증언도 존재). 사건 이후 한국 언론은 앞 다투어 사건 경과의 피해사항을 보도함과 동시에 폭격의 불법성을 강력히 규탄하였으며 미군정은 사건에 대한 조사와 구호반을 파견했으며 이후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짐. 사건의 진상규명 및 보상과정에서의 주체는 대한민국이었으며 미국 역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 공식적인 사건처리 방안을 논의함"
예고 없는 폭격? 믿기 힘든 이야기다. B29 조종사들이 하얀 옷을 입고 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을 못 보았을 리가 없지 않을까.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와 함께 물골 주위 바위에 기록된 암각서를 조사한 후 100여 미터 떨어 가제굴(배석진 굴)로 갔다. 탕건봉 아래에 위치한 가제굴은 파도에 침식된 해식동굴로 입구는 좁지만 안에는 2~3미터 높이에 깊지는 않았다. 물골에 살았던 배석진씨와 같이 어울려 살았던 김성도씨의 이야기다.
▲ 김성도씨 집 앞에서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가 김성도씨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뒤에 김성도씨 부인 김신열씨가 보인다. ⓒ 안동립
"배석진씨가 물골에서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도 해녀들을 데리고 살았지. 해녀 30명이면 해녀를 태우고 갈 사공들이 10명쯤 됐어요. 독도 미역을 사가지고 육지에 가서 팔았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망했지. 물골 물은 염분이 2%정도 들어있어 밥을 해도 약간 짭짤해요. 물골 물로는 커피를 못 끓여요. 가제바위에서 잡은 강치도 먹어 봤는데 굉장히 맛있었어요."
김성도씨 부인 "물골에는 귀신 나오니 졸지 마래이"
풍랑 때문에 독도에 꼼짝없이 갇힌 동아지도 안동립대표와 나는 TV 아니면 말동무가 없는 김성도씨의 말상대가 됐다. 안동립대표와 내가 건넌방에서 묵고 있으니 김성도씨가 우리 방으로 오거나 우리가 건너가면 흥미로운 얘기를 해줬다. 이른바 물골 귀신이야기다.
나는 귀신을 본 적 없다. 과학적 근거도 없다. 하지만 안동립 대표는 14년 동안 김성도씨 집에 기거하며 김성도씨 부부가 들려준 귀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제굴 입구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좁다. 하지만 안쪽은 천장도 높고 10여 명이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내가 먼저 동굴로 들어가자 안동립대표가 뒤에서 소리쳤다.
▲ 고인이 된 배석진씨가 해녀들과 기거하며 살았던 가제굴(배석진 굴). 입구 오른쪽에 돌담이 보인다. 독도에서 50여년 산 김성도씨 증언에 의하면 배석진씨는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들여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했다고 한다. 당시 물골 인근에는 40여명이 살았다고 한다. ⓒ 오문수
"그만 들어가요."
"에이! 무슨 소리야. 어두운 동굴 끝까지 살펴보게 빨리 스마트폰 플래쉬 켜요."
머뭇거리던 안동립 대표가 후래쉬를 켜고 뒤따라온다. 내 심산은 동굴 속에서 수저나 가재도구 및 강치뼈라도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담을 쌓은 흔적만 보이지 남아 있는 게 없다. 숙소로 돌아와 셋이 저녁을 먹는 동안 김성도씨가 물골 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골에는 혼령이 많아요. 미군 폭격에 죽고 물질하다 죽은 해녀들도 있었어요. 부부가 물골에 미역 채취하러 갔는데 가제바위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어서 오라는 신호를 보내 둘이 아무 말도 않고 돌아온 적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인다는데 우리 눈에는 보인다니까."
안동립 대표가 김성도씨 부인인 김신열씨한테 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골에서 물질하다 피곤해서 누우면 누가 자꾸 불러요. 내가 잘 안 속는데 하루는 돌아볼 뻔 했단 말이야. 물골가서 졸면 안 되요."
그제서야 안동립 대표가 가제굴(배석진 굴) 앞에서 머뭇거리며 뒤따라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두 분 다 나이 들어 기가 허해진 때문일까?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물골에 얽힌 아픈 역사를 듣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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