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이 필요한 어른들을 위한 처방전
[매일 육아하며 배웁니다 11] 더 적게 벌고, 더 적게 소유하기
아이를 키우면, 어른들끼리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일들을 겪습니다. 오직 육아하는 이때만, 부딪칠 수 있습니다. 애 키우는 동안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좌절감에 글을 씁니다. '너희만 크냐? 엄마도 같이 크자'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육아일상 속 메시지를 담아 글을 씁니다. - 기자말
둘째를 낳고 바로 복직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인구 8만, 강원도 작은 도시에 사는 덕분이다. 사는 곳은 보증금 5800만 원에 월세 6만 원이라 거주비가 저렴했다. 또 법대로 육아휴직을 누려도, 돌아갈 자리가 있는 직장인 데다 남편도 일을 해서 벌이가 있다. 다행히 휴직을 '선택' 할 수 있었다.
대신 당분간 소득을 잃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직장으로 돌아가면 매달 200만 원 씩 더 벌 수 있다. 무시할 수 없는 액수다. 맞벌이가 되면 차를 한 대 더 살 수 있고,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고, 외식도 더 자주 할 수 있다.
아이들 장난감 살 때 덜 망설이게 되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접대할 때 홀가분히 지갑을 열 수 있다. 저축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휴직을 하는 대신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 물건을 포기했다.
하지만 편리한 서비스, 더 고급스러운 물건보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차를 1대만 끈다면, 30평 대 말고 20평 대에 산다면, 외식보다 집밥을 먹는다면, 장난감 아닌 부모와 논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직접 끓여 준다면, 가능했다. 적게 소비하면 저축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9개월에 접어든 둘째 딸과 또래를 키우는 조리원 동기들이 하나, 둘 복직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선생님들께서도 능숙하게 아가들을 돌봐주셨다. 33개월 큰 딸이 다니는 가정 어린이집에도 돌 전 아가들이 여럿 있었다. '영영 엄마와 헤어지는 게 아닌, 잠깐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 뿐'이라는 조언까지 들으니 얼른 복직해서 살림에 보태야하나, 마음은 수 천 번 흔들렸다.
그러다 며칠 전,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온 뒤, 육아휴직을 더 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선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게 별 의미 없었다. 주어진 시간에 걷고, 산딸기 따 먹고, 들꽃을 바라보고, 산새 소리와 개울 소리에 귀 기울이면 행복했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으니, 큰 딸도 마음 놓고 뛰어 다녔다. 내게 계속 재잘대며, 노래하고, 웃고, 비누방울 날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경험을 돈으로 교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면 될 뿐이었다.
둘러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삶을 누리는 방법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 외에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4살, 2살 딸들은 장난감을 더 많이 갖기보다 부모에게 사랑 받고 함께 하는 순간들을 더 좋아했다. 부모가 장난감을 거실에 잔뜩 늘어놓고 "재밌게 놀아~" 하고 뒤돌아 집안일 하던 순간보다, 같이 옆에서 걷기만 했는데 더욱 행복해했다.
아이들은 시골이 아니라도, 집 앞 놀이터, 산책로 그리고 그냥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작고 아늑한 우리 집을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이라면, 더 많은 돈을 나중으로 미루려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이들 행복하기 위해 내가 일터로 가지 않아도 된다니! 오히려 지금은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더 원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썼던 20세기 초반에는 기독교 이외의 윤리가 '금지된 것'이었다.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더 적게 벌고, 더 적게 소유하기'인 듯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좋은 옷을 입혀야, 더 좋은 차를 태워야, 더 넓은 집에서 살게 해 주어야, 훌륭한 부모라는 일방적인 가치관을 강요받고 있다. 소비 문화 속에서는 좋은 브랜드 아파트가, 부모가 타는 자동차가, 입고 있는 옷 상표만이 아이를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이 벌어 많이 베푸는 것 또한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한 맥락이겠지만,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선택을 해도 존중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우리 부부의 선택은 '악(惡)'일 수 있다. 하지만 더 적게 소유하고, 더 적게 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저녁 없는 삶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꿈꾸던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적게 소유해도 가치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 이 경험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필요로 하는 어른들을 위한 처방전이 아닐까.
둘째를 낳고 바로 복직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인구 8만, 강원도 작은 도시에 사는 덕분이다. 사는 곳은 보증금 5800만 원에 월세 6만 원이라 거주비가 저렴했다. 또 법대로 육아휴직을 누려도, 돌아갈 자리가 있는 직장인 데다 남편도 일을 해서 벌이가 있다. 다행히 휴직을 '선택' 할 수 있었다.
대신 당분간 소득을 잃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직장으로 돌아가면 매달 200만 원 씩 더 벌 수 있다. 무시할 수 없는 액수다. 맞벌이가 되면 차를 한 대 더 살 수 있고,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고, 외식도 더 자주 할 수 있다.
아이들 장난감 살 때 덜 망설이게 되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접대할 때 홀가분히 지갑을 열 수 있다. 저축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휴직을 하는 대신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 물건을 포기했다.
하지만 편리한 서비스, 더 고급스러운 물건보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차를 1대만 끈다면, 30평 대 말고 20평 대에 산다면, 외식보다 집밥을 먹는다면, 장난감 아닌 부모와 논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직접 끓여 준다면, 가능했다. 적게 소비하면 저축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장소, 도서관 ⓒ 최다혜
9개월에 접어든 둘째 딸과 또래를 키우는 조리원 동기들이 하나, 둘 복직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선생님들께서도 능숙하게 아가들을 돌봐주셨다. 33개월 큰 딸이 다니는 가정 어린이집에도 돌 전 아가들이 여럿 있었다. '영영 엄마와 헤어지는 게 아닌, 잠깐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 뿐'이라는 조언까지 들으니 얼른 복직해서 살림에 보태야하나, 마음은 수 천 번 흔들렸다.
그러다 며칠 전,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온 뒤, 육아휴직을 더 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선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게 별 의미 없었다. 주어진 시간에 걷고, 산딸기 따 먹고, 들꽃을 바라보고, 산새 소리와 개울 소리에 귀 기울이면 행복했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으니, 큰 딸도 마음 놓고 뛰어 다녔다. 내게 계속 재잘대며, 노래하고, 웃고, 비누방울 날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경험을 돈으로 교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면 될 뿐이었다.
둘러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삶을 누리는 방법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 외에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4살, 2살 딸들은 장난감을 더 많이 갖기보다 부모에게 사랑 받고 함께 하는 순간들을 더 좋아했다. 부모가 장난감을 거실에 잔뜩 늘어놓고 "재밌게 놀아~" 하고 뒤돌아 집안일 하던 순간보다, 같이 옆에서 걷기만 했는데 더욱 행복해했다.
▲ 강원도 숲 속. ⓒ 최다혜
아이들은 시골이 아니라도, 집 앞 놀이터, 산책로 그리고 그냥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작고 아늑한 우리 집을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이라면, 더 많은 돈을 나중으로 미루려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이들 행복하기 위해 내가 일터로 가지 않아도 된다니! 오히려 지금은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더 원했다.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
그러니까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 <데미안> 중. 헤르만 헤세 지음.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썼던 20세기 초반에는 기독교 이외의 윤리가 '금지된 것'이었다.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더 적게 벌고, 더 적게 소유하기'인 듯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좋은 옷을 입혀야, 더 좋은 차를 태워야, 더 넓은 집에서 살게 해 주어야, 훌륭한 부모라는 일방적인 가치관을 강요받고 있다. 소비 문화 속에서는 좋은 브랜드 아파트가, 부모가 타는 자동차가, 입고 있는 옷 상표만이 아이를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이 벌어 많이 베푸는 것 또한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한 맥락이겠지만,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선택을 해도 존중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우리 부부의 선택은 '악(惡)'일 수 있다. 하지만 더 적게 소유하고, 더 적게 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저녁 없는 삶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꿈꾸던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적게 소유해도 가치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 이 경험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필요로 하는 어른들을 위한 처방전이 아닐까.
▲ 공원 언덕에서 딸과 춤추는 남편.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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