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마다 갱신하는 결혼,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다
[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⑩] 아빠와 딸, '계약결혼'을 논하다
[나의 이야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친척이기도 한 사르트르는 당시 24세로 보부아르보다 세 살 위였다. 키가 작고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먼저 끌린 것은 보부아르 쪽이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뛰어난 지적능력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회고에 따르면 보부아르의 첫 인상은 "예뻤지만 끔찍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자기 다음의 성적으로 합격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결혼을 결심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보부아르의 아버지부터 찾아갔다.
하지만 변호사였던 보부아르의 아버지는 지독한 사팔뜨기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사르트르에게 딸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 사르트르는 좌절하는 대신에 새로운 생각을 해낸다.
1929년 봄날 루브르박물관에 놀러갔을 때 그는 안마당 벤치에 앉은 보부아르에게 그 새로운 생각을 불쑥 끄집어냈다.
"우리 결혼합시다."
갑작스런 구혼에 당황한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난 지참금도 없는데."
"아니, 내 말은 계약결혼을 하자는 거요."
사르트르는 자신이 생각한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상대방에게 충실하되 각자 생활의 자유와 연애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것이 계약결혼의 핵심내용이었다.
죽을 때까지 이어진 계약결혼
마침내 보부아르는 그해 10월, 사르트르가 제안한 2년간의 계약에 합의한다. 이것은 장차 두 사람이 펼치게 될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한 계약결혼이기도 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지만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라 믿었고 이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계약결혼을 한 것이었다.
"대단하네요."
내가 말하자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대단했지. 그 계약을 한 게 1929년의 일이었다니까."
"보통 결혼을 하면 다른 이성을 용납하기 힘든데 두 사람은 어떻게 대처했어요?"
"서로 간에 완전 자유를 허락했지."
"그럼 바람도 피웠겠네요."
"그렇지. 사르트르도 보부아르도 각각 바람을 피웠어. 보기에 따라선 난잡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시대에 연애의 자유와 결혼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진짜 결혼이었을까요?"
나는 아빠의 논지를 마일드하게 반박했다. 그러자 아빠는 기존 논지를 고수하셨다.
"계약결혼이었다니까."
"자유의 대가도 있었겠죠.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분노 같은."
나의 재공격.
"있었겠지.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고 또 자유를 즐겼다더라. 보부아르가 남긴 말이 있어.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건 사르트르와의 관계다'라고."
"가식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사르트르도 비슷한 말을 남겼어. '나는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수많은 소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점점 더 가식 같이 느껴져요. 자신들의 존재감을 대중한테 어필하려고 만들어 낸 말일 수도 있어요."
거듭되는 반격에 아빠는 대화의 판을 엎을 것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정말 그런 거였다면 지금 우리 대화도 시간낭비겠지."
"그러게요. 전 메르시(Merci) 매장에나 들려야겠어요."
나도 판을 깨는 발언을 했다.
메르시는 마레지구에 위치한 인테리어 소품과 의류 편집숍으로 파리 시내에서 유명한 쇼핑장이기도 했다. 쇼핑도 하고 싶고 맛집도 탐방해보고 싶은 젊은 딸과 나이든 아빠의 관심사는 달랐다. 여행 중 그 점을 여러 번 느꼈지만 당초 테마 여행을 정한 것은 나였기에 아빠의 의사를 존중해온 나였다.
그러나 아빠가 판을 깨신다면 나도 그 판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신 아빠가 목소리를 낮추신다.
"그럼 같이 가보자꾸나. 그곳이 어디냐?"
만일 그 이상 밀고 나간다면 정말 파탄의 길로 빠져 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나도 톤을 낮추었다. 아빠도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셨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말씀을 이으셨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만 집중하시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보는데 하나는 공간의 문제다. 서로 결혼했는데도 한집에 살진 않았지. 함께 살지 않으니 식사나 청소, 빨래 같은 일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일도 일어나질 않았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부부의 사랑이 남녀 간의 에로스(eros)와 실존주의 철학을 서로 관철해낸다는 일종의 필리아(philia) 같은 동지애가 섞인 어떤 것이었을 거야. 그런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2년마다 갱신하는 계약결혼을 죽을 때까지 되풀이할 순 없었겠지."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결혼은 아니었네요."
나는 여전히 뻗대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두 사람 사이는 좋았다더라."
"친구로서요? 부부로서요?"
"허 참,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도 있다만."
"네?"
"결혼이란 말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들의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가령 사르트르는 죽기 1년 전인 74세의 나이에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과 연애를 시작했거든. 너도 알지?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쓴?"
불안감에 쫓기던 나는 대학생 때 읽은 사강의 작품이 기억나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생겼다.
"네, 알아요."
"사르트르와 사강의 나이 차는 30년이었다. 두 사람은 열흘에 한번 정도 만나 데이트를 즐겼는데, 이때 시력을 잃은 사르트르는 식사조차 혼자 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사강이 스테이크를 대신 썰어주었다더군. 그런데도 사르트르는 사강과의 만남을 소년처럼 즐거워했고, 사강도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고 회상한 글을 읽어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과 그를 존경하던 사강의 사랑은..."
"플라토닉이었겠죠?"
내가 말하자 아빠가 나를 보고 웃으셔서 나도 따라 웃었다. 갈라졌던 틈새가 여기서 다시 봉합되었다.
"보부아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어요?"
"그럼, 살아 있을 때였지. 사르트르가 죽고 6년 뒤에 보부아르가 같은 무덤에 묻혔어."
"네? 같은 무덤에요?"
"그래."
"이승에선 한 번도 함께 산 일이 없는 부부가 저승에서 처음으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게 된 거네요. 아이러니에요."
"아이러니지. 하지만 살았을 때 두 사람이 거의 날마다 드나든 장소가 있었다. 바로 이 되마고야."
"부부 함께요?"
"되마고 주인이었던 폴 부발이란 사람이 이런 회고담을 남겼어. '그 사람은 종종 여자를 데리고 오기도 했는데 와서는 서로 다른 테이블에 떨어져 앉곤 했다. 그리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무언가를 계속 쓰는 것이었다.'"
"장사 안 되는 손님이었다는 얘기네요. 데리고 왔다는 여자는 보부아르이고요?"
"그렇지. 따로 앉은 건 그 여자도 글을 쓰기 위해서였어. 작가들은 카페에서 글을 썼다고 해. 까뮈가 출세작 <이방인>을 쓴 곳도 바로 이 되마고이고. 지금보다 작가 위상이 높았던 당시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써도 용인이 되는 사회분위기였던 모양이야,"
"궁금한 건요, 여긴 헤밍웨이가 자주 드나들던 카페인데 보부아르나 사르트르와 만났을까요?"
카페 되마고
"글쎄다. 사르트르가 결혼한 해는 1929년인데, 그해 11월 군대에 가고 병역을 마친 뒤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루아브르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거든. 그러니까 파리의 되마고를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이었다고 봐야지. 그런데 1차대전 후 파리에 왔던 헤밍웨이가 미국에 돌아간 건 1928년이야. 그러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려고 다시 파리에 들린 것은 1937년이고. 이때 되마고를 들러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를 만났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헤밍웨이는 그 무렵 이미 유명작가가 되어 있었던데 반해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는 아직 무명작가였거든. 사르트르의 <구토(La Nausée)>가 발표된 게 1938년이고, 보부아르의 <초대받은 여자(L'Invitée)>가 발표된 건 1943년이야."
"못 만났을 확률이 높군요."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2차대전 중 카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어디로요?"
"아까 들렸던 카페 드 플로르로. 그거 다 마시면 우리도 자리를 좀 옮겨볼까?"
아빠에게서 얼굴을 돌려 옆 테이블을 둘러보니 일본 여자 둘은 관광객인 듯 핸드폰 사진을 찍고 있었고, 또 한 테이블에서는 묵직한 안경을 낀 곱슬머리 노인이 신문을 보며 잔을 들고 있었다. 몇몇 테이블에서는 남녀들이 불어나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손을 올렸다 내렸다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단정하게 빗겨진 머리카락의 사르트르와 눈꼬리가 처져 온화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보부아르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콧수염을 기른 파리시절의 헤밍웨이는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친근하지만 어딘가 냉랭한 분위기의 아빠와 나도 있었다.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친척이기도 한 사르트르는 당시 24세로 보부아르보다 세 살 위였다. 키가 작고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먼저 끌린 것은 보부아르 쪽이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뛰어난 지적능력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였던 보부아르의 아버지는 지독한 사팔뜨기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사르트르에게 딸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 사르트르는 좌절하는 대신에 새로운 생각을 해낸다.
1929년 봄날 루브르박물관에 놀러갔을 때 그는 안마당 벤치에 앉은 보부아르에게 그 새로운 생각을 불쑥 끄집어냈다.
"우리 결혼합시다."
갑작스런 구혼에 당황한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난 지참금도 없는데."
"아니, 내 말은 계약결혼을 하자는 거요."
사르트르는 자신이 생각한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상대방에게 충실하되 각자 생활의 자유와 연애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것이 계약결혼의 핵심내용이었다.
죽을 때까지 이어진 계약결혼
▲ 발자크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1929년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둘은 상대방에게 충실하되 각자 생활의 자유와 연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계약결혼에 합의한다. ⓒ wiki commons
마침내 보부아르는 그해 10월, 사르트르가 제안한 2년간의 계약에 합의한다. 이것은 장차 두 사람이 펼치게 될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한 계약결혼이기도 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지만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라 믿었고 이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계약결혼을 한 것이었다.
"대단하네요."
내가 말하자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대단했지. 그 계약을 한 게 1929년의 일이었다니까."
"보통 결혼을 하면 다른 이성을 용납하기 힘든데 두 사람은 어떻게 대처했어요?"
"서로 간에 완전 자유를 허락했지."
"그럼 바람도 피웠겠네요."
"그렇지. 사르트르도 보부아르도 각각 바람을 피웠어. 보기에 따라선 난잡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시대에 연애의 자유와 결혼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진짜 결혼이었을까요?"
나는 아빠의 논지를 마일드하게 반박했다. 그러자 아빠는 기존 논지를 고수하셨다.
"계약결혼이었다니까."
"자유의 대가도 있었겠죠.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분노 같은."
나의 재공격.
"있었겠지.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고 또 자유를 즐겼다더라. 보부아르가 남긴 말이 있어.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건 사르트르와의 관계다'라고."
"가식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사르트르도 비슷한 말을 남겼어. '나는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수많은 소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점점 더 가식 같이 느껴져요. 자신들의 존재감을 대중한테 어필하려고 만들어 낸 말일 수도 있어요."
거듭되는 반격에 아빠는 대화의 판을 엎을 것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정말 그런 거였다면 지금 우리 대화도 시간낭비겠지."
"그러게요. 전 메르시(Merci) 매장에나 들려야겠어요."
나도 판을 깨는 발언을 했다.
▲ 메르시(Merci) 매장파리 마레지구에 위치한 메르시 쇼핑장은 인테리어 소품과 의류 편집샵으로 유명하다. ⓒ 강재인
메르시는 마레지구에 위치한 인테리어 소품과 의류 편집숍으로 파리 시내에서 유명한 쇼핑장이기도 했다. 쇼핑도 하고 싶고 맛집도 탐방해보고 싶은 젊은 딸과 나이든 아빠의 관심사는 달랐다. 여행 중 그 점을 여러 번 느꼈지만 당초 테마 여행을 정한 것은 나였기에 아빠의 의사를 존중해온 나였다.
그러나 아빠가 판을 깨신다면 나도 그 판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신 아빠가 목소리를 낮추신다.
"그럼 같이 가보자꾸나. 그곳이 어디냐?"
만일 그 이상 밀고 나간다면 정말 파탄의 길로 빠져 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나도 톤을 낮추었다. 아빠도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셨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말씀을 이으셨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만 집중하시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보는데 하나는 공간의 문제다. 서로 결혼했는데도 한집에 살진 않았지. 함께 살지 않으니 식사나 청소, 빨래 같은 일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일도 일어나질 않았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부부의 사랑이 남녀 간의 에로스(eros)와 실존주의 철학을 서로 관철해낸다는 일종의 필리아(philia) 같은 동지애가 섞인 어떤 것이었을 거야. 그런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2년마다 갱신하는 계약결혼을 죽을 때까지 되풀이할 순 없었겠지."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결혼은 아니었네요."
나는 여전히 뻗대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두 사람 사이는 좋았다더라."
"친구로서요? 부부로서요?"
▲ 1955년 중국 천안문 광장에 참석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둘은 2년마다 갱신하는 계약결혼을 죽을 때까지 되풀이했다. ⓒ wiki commons
"허 참,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도 있다만."
"네?"
"결혼이란 말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들의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가령 사르트르는 죽기 1년 전인 74세의 나이에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과 연애를 시작했거든. 너도 알지?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쓴?"
▲ "슬픔이여 안녕" 의 저자 프랑수아즈 사강사르트르는 죽기 1년 전인 74세의 나이에 30년 나이차이가 나는 사강과 연애를 시작했다. ⓒ flicker,Christo Drummkopf
불안감에 쫓기던 나는 대학생 때 읽은 사강의 작품이 기억나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생겼다.
"네, 알아요."
"사르트르와 사강의 나이 차는 30년이었다. 두 사람은 열흘에 한번 정도 만나 데이트를 즐겼는데, 이때 시력을 잃은 사르트르는 식사조차 혼자 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사강이 스테이크를 대신 썰어주었다더군. 그런데도 사르트르는 사강과의 만남을 소년처럼 즐거워했고, 사강도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고 회상한 글을 읽어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과 그를 존경하던 사강의 사랑은..."
"플라토닉이었겠죠?"
내가 말하자 아빠가 나를 보고 웃으셔서 나도 따라 웃었다. 갈라졌던 틈새가 여기서 다시 봉합되었다.
"보부아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어요?"
"그럼, 살아 있을 때였지. 사르트르가 죽고 6년 뒤에 보부아르가 같은 무덤에 묻혔어."
"네? 같은 무덤에요?"
"그래."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무덤결혼해서는 다른 집에 살았던 둘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혔다. ⓒ wiki commons
"이승에선 한 번도 함께 산 일이 없는 부부가 저승에서 처음으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게 된 거네요. 아이러니에요."
"아이러니지. 하지만 살았을 때 두 사람이 거의 날마다 드나든 장소가 있었다. 바로 이 되마고야."
"부부 함께요?"
"되마고 주인이었던 폴 부발이란 사람이 이런 회고담을 남겼어. '그 사람은 종종 여자를 데리고 오기도 했는데 와서는 서로 다른 테이블에 떨어져 앉곤 했다. 그리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무언가를 계속 쓰는 것이었다.'"
"장사 안 되는 손님이었다는 얘기네요. 데리고 왔다는 여자는 보부아르이고요?"
"그렇지. 따로 앉은 건 그 여자도 글을 쓰기 위해서였어. 작가들은 카페에서 글을 썼다고 해. 까뮈가 출세작 <이방인>을 쓴 곳도 바로 이 되마고이고. 지금보다 작가 위상이 높았던 당시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써도 용인이 되는 사회분위기였던 모양이야,"
"궁금한 건요, 여긴 헤밍웨이가 자주 드나들던 카페인데 보부아르나 사르트르와 만났을까요?"
카페 되마고
▲ 1927년의 헤밍웨이와 그의 아들1차대전 후 파리에 왔던 헤밍웨이는 1928년 미국에 돌아갔다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려고 1937년 다시 파리에 방문한다. ⓒ wiki commons
"글쎄다. 사르트르가 결혼한 해는 1929년인데, 그해 11월 군대에 가고 병역을 마친 뒤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루아브르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거든. 그러니까 파리의 되마고를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이었다고 봐야지. 그런데 1차대전 후 파리에 왔던 헤밍웨이가 미국에 돌아간 건 1928년이야. 그러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려고 다시 파리에 들린 것은 1937년이고. 이때 되마고를 들러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를 만났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헤밍웨이는 그 무렵 이미 유명작가가 되어 있었던데 반해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는 아직 무명작가였거든. 사르트르의 <구토(La Nausée)>가 발표된 게 1938년이고, 보부아르의 <초대받은 여자(L'Invitée)>가 발표된 건 1943년이야."
"못 만났을 확률이 높군요."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2차대전 중 카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어디로요?"
"아까 들렸던 카페 드 플로르로. 그거 다 마시면 우리도 자리를 좀 옮겨볼까?"
아빠에게서 얼굴을 돌려 옆 테이블을 둘러보니 일본 여자 둘은 관광객인 듯 핸드폰 사진을 찍고 있었고, 또 한 테이블에서는 묵직한 안경을 낀 곱슬머리 노인이 신문을 보며 잔을 들고 있었다. 몇몇 테이블에서는 남녀들이 불어나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손을 올렸다 내렸다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단정하게 빗겨진 머리카락의 사르트르와 눈꼬리가 처져 온화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보부아르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콧수염을 기른 파리시절의 헤밍웨이는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친근하지만 어딘가 냉랭한 분위기의 아빠와 나도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