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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도 찾아간 대저택... 기도실에선 매일 청탁이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 피렌체의 건물들② 부와 권력의 상징, 팔라초

등록|2018.06.21 09:14 수정|2018.07.04 20:22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본다. [편집자말]
우리는 피렌체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흔적을 느낀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주요 인물들과 사건 등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와 함께 주요 건축물들을 살펴보는 것도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피렌체에서 접하는 주요 건축물 중 종교 시설 외에 대표적인 것이 '팔라초(Palazzo)'이다.

팔라초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팔라타노스 언덕에 큰 주거지를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귀족이나 부유층의 대저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부유층의 주거 양식에는 빌라(Villa)도 있는데, 주로 부자들이 교외에 소유한 별장을 가리킨다)

이런 어원 때문인지 여러 여행 책자에서 팔라초를 '궁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궁전보다는 그대로 '팔라초 베키오', '팔라초 피티'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얘기한다. 실제 거의 모든 팔라초의 주인들은 왕이나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팔라초가 집중적으로 지어지던 15세기의 피렌체는 표면적이나마 공화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나 역시 궁전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팔라초 혹은 저택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연하겠지만 팔라초에는 주인의 욕망과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피렌체 지배층의 주거 양식인 팔라초를 살펴보면 당시 정치와 사회를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팔라초가 등장하기까지의 피렌체

12세기까지 부유층들은 높은 탑에 주거 공간을 결합한 '탑상 주택'에서 살았다. 탑이 얼마나 많았던지 14세기 라포(Lapo daCastiglionchio)라는 피렌체 사람은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피렌체에는 탑이150개가 넘는다'고 적었다. 어떤 탑의 높이는 거의 70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높았다.

이렇게 탑이 많아진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이었다. 11세기가 지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자 도시에 있는 신흥 상인 계층이 부를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시에 부가 몰리자 주로 농장과 영지를 기반으로 하던 전통 귀족들도 도시로 진출한다.

자연스레 신흥 상인과 전통 귀족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혈연 혹은 계약 관계로 맺어진 연합체를 이루었는데 이를 '콘소르테리아(consorteria)'라고 불렀다. 콘소르테리아는 신흥 상인들의 연합체인 코무네(comune)와 대척점에 있었다.

이 시기의 정치적 투쟁이란 지금처럼 온순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피와 피를 부르는 유혈 충돌의 연속이었다. 길에서 반대파를 만나면 바로 칼을 꺼내서 맞붙기도 했다. 전통 귀족들은 공격과 방어를 위해 자신들의 영지에서처럼 성채를 짓고 싶었지만 도시는 농촌처럼 땅이 넓지 않았다.

그래서 지은 것이 높은 탑이었다. 이 탑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를 배치해 적들에게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았다. 지금도 피렌체의 몇몇 오래된 저택들의 창문에는 큼직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적들이 공격해 오면 이 구멍에 간이 발코니를 설치하고 궁수가 활을 쏘았다.

기벨린과 겔프의 오랜 투쟁에서 신흥 상인들이 주축인 시민정부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권력을 잡았다.(관련 기사 : 병 고쳐준다는 이 그림, '시민혁명' 불쏘시개 되다) 시민정부는 정적이었던 전통 귀족들에 대한 보복에 나선다.

시민정부는 1293년 '정의의 법(Ordinance of Justice)'을 제정하는데, 이 법을 바탕으로 47개 귀족 가문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했다. 또한, 귀족의 상징이던 탑의 건설도 금지했으며 기존에 있던 탑들도 모두 잘라내게 했다. 그래서 현재는 팔리초 베키오나 바르젤로 미술관 같은 공공 건물에서만 탑상 주택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새롭게 권력을 잡은 지배층은 자신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팔라초이다.

포레지 가문의 탑상 주택 꼭대기에 잘린 탑의 흔적이 보인다. 창문에는 간이 발코니를 설치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 박기철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팔라초

팔라초는 15세기에만 피렌체에 백여 채가 건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부유층들은  자신과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앞다투어 팔라초를 지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예술이 재발견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인물의 지위와 세계관은 건축을 통해 표현된다'는 고대 로마의 건축관이 유행했다. 팔라초 한 채의 건축비가 현재 우리 돈으로 수십에서 수백억 원에 달했지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조반니 루첼라이는 (중략) 장부에다 적기를, "나는 돈을 번 것보다 더 많이 쓴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며, 내 영혼의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특히 집을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에 더욱 만족한다"고 했다.(손세관 지음, 피렌체-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125쪽)


팔라초는 막대한 건축비와 큰 규모에 비해 초기에는 거주인원이 적었다. 기본적으로 단일 가구를 위한 단독주택으로 주인과 직계가족, 그리고 몇 명의 하인이 있었을 뿐이다. 위에 나온 조반니 루첼라이의 팔라초에도 처음에는 직계가족 외에 남자 네 명과 여자 다섯 명만 고용되어 있었다.

피렌체에 있는 팔라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Palazzo Medici Ricardi)'이다. 1444년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미켈로초(Michelozzo di Bartolommeo, 1396-1472)에게 설계를 의뢰한다. 메디치 가문은 1456년 쯤에 입주했지만 세부 장식까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469년이었다.

처음에는 두오모 성당의 돔 설계로 유명한 브루넬레스키(FilippoBrunelleschi, 1377-1446)에게 설계를 맡겼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제출한 설계 모형은 코시모가 보기에 너무 화려했고 반대파의 비판을 불러왔다. 이에 거부감을 느낀 코시모는 미켈로초에게 설계를 다시 맡긴다. 제안이 거부당한 브루넬레스키는 몹시 화를 내며 자신의 모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린다.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에 드러난 코시모의 욕망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는 팔라초 건축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는다. 피렌체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수많은 팔라초들이 메디치 저택을 모방하여 건축되었다. 메디치의 정적들은 팔라초 메디치보다 더 크고 웅장한 저택을 짓기 위해 애를 썼다. 대표적인 정적 루카 피티(Luca Pitti)는 '팔라초 피티(Palazzo Pitti)'를 지을 때 '중정에 메디치 저택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짓고 싶어했다.

메디치 저택을 처음 마주하면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분명 3층 건물인데 현대 8층 건물과 맞먹을 정도로 층고가 높다. 처음 이 저택 1층의 동남쪽은 로지아 형태로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1517년 로지아를 폐쇄하고 벽으로 막았다.

외관을 살펴보면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다른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다. 특히 1층은 가공하지 않은 돌들을 쌓아 올린 형태인데, 매우 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방식을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이라고한다. 루스티카(Rustica)는 '거친, 촌스러운, 다듬어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 말로는 '거친 돌 쌓기' 방식이라고도 부른다.

코시모는 저택의 외관을 검소하게 짓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권력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이런 그의 욕망은 저택 2층과 3층에서 나타난다. 2층과 3층에 있는 창문들은 가운데에 문설주가 있는 둥근 아치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중세 시대부터 피렌체 주교 등 최고 권력자들만이 쓰던 양식이었다. 겸손한 듯 보이지만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임을 나타내고 싶었던 코시모의 욕망이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 후손들은 여기에 살면서 메디치 은행으로 '출퇴근'했다. 지금이야 집에서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최초로 '직주분리'의 개념을 설계에서부터 반영한 건물이었다.

이후 리카르디 가문이 1659년에 이 건물을 매입하고 규모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이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로 불리게 되었다.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 거리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층고가 엄청나게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1층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인데 2층과 3층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느낌이다. ⓒ 박기철


2층과 3층의 모습 둥근 아치형 창문이 보인다. 이런 형태는 정부 청사인 팔라초 베키오에서도 볼 수 있다. 처마의 돌림띠 장식은 수많은 팔라초에 적용되었다. ⓒ 박기철


건물로 본 권력의 이동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큰 상징성을 갖는다.

이 일대가 지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관광명소가 모여 있는 곳이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예전에는 매춘부와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심 외곽의 낙후된 동네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근처의 산 로렌초 성당에 헌금이나 기부금이 풍족할 리 없었다. 자연히 성당은 자금난 때문에 유지 보수를 못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1443년을 전후하여 코시모는 이 지역의 재개발을 추진한다.

그는 이곳에 있던 자신의 집 근처 건물 스물 두 채를 사들여 허물고 팔라초 메디치를 지었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산 마르코 수도원과 산 로렌초 성당의 복구에 막대한 금액을 후원한다. 그 덕분에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코시모의 개인 기도실이 생겼다. 또한 산 로렌초 성당은 메디치 가문의 전용 예배당처럼 사유화되었고, 코시모는 이곳 지하에 묻혔다.

주변 건물과 도로가 정비되면서 이 일대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힘을 발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원광대 성제환 교수는 당시의 이 일대를 '메디치 복합공간(MediciComplex)'이라고 지칭한다. 메디치 복합공간은 단순한 지역 개발이 아니라 피렌체 권력의 중심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보여준다.

중세 말기까지 피렌체의 권력은 주교와 전통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두오모 성당 근처에 있는 주교의 관저 주변에 모여 살면서 '두오모 복합공간(Duomo Complex)'을 형성했다. 자연히 이 일대가 당시 피렌체 권력의 중심이었다.

이후 신흥 상인들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권력의 중심은 팔라초 베키오와 오르산미켈레 교회가 있는 '시뇨리아 복합공간(Signoria Complex)'으로 이동한다. 그러다 15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장악하면서 메디치 복합공간이 피렌체 권력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코시모는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었지만 피렌체의 정부를 좌지우지했다.(관련 기사 : 지하에서 은총받는 비선실세, 무덤까지 '특혜') 공식 정부 청사인 팔라초 베키오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메디치 저택이 실질적인 정부청사의 역할을 했다.

1459년 교황 피우스 2세는 코시모를 만나기 위해 메디치 저택에 잠시 들른다. (중략) 코시모를 만나고 나온 교황은 "피렌체의 모든 정치적인 문제들은 코시모의 저택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코시모는 칭호만 없었지 실제로는 피렌체의 왕이었다. 메디치 저택은 왕에게나 걸맞은 궁전과 같다"라고 말을 할 정도로 메디치 저택은 웅장했고 정치의 중심지였다.(성제환 지음, 당신이 보지 못한 피렌체, 문학동네, 161쪽)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청탁을 들고 이 저택을 찾아왔다. 저택의 기도실은 접견실로 쓰였다. 마치 영화 '대부'에서 사람들이 마피아 보스를 찾아가 부탁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메디치 가문이 던지는 말 한 마디는 법보다도 위에 있었다.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는 분명히 훌륭한 건축물이다. 또한 권력의 이동과 공화주의의 왜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일대를 둘러본다면 좀 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라초 베키오 피렌체 정부 청사였지만 중요한 결정은 메디치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가운데 문설주가 있는 둥근 아치형 창문들이 보인다. 현재도 피렌체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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