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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래피로 쓴 서각문패 어때요?

고향으로 돌아와 재능기부 하는 캘리그래피 작가, 전남 진도 진성영씨

등록|2018.06.20 09:16 수정|2018.06.20 09:16

▲ 선상에서 만난 캘리그래피 작가 진성영 씨. 재능기부로 만든 서각 문패를 들고 지난 7일 죽항도로 가고 있다. ⓒ 이돈삼


"섬마을의 정취가 묻어나는 글씨로 이름을 썼고, 서각으로 문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패를 달아주러 갑니다."

지난 6월 7일 전라남도 진도의 조도 신전항에서 만난 캘리그래피 작가 진성영(47)씨의 말이다. 그의 손은 예쁜 보자기 하나를 다소곳이 보듬고 있다. 진 작가는 이날 작은 배를 타고 신전항에서 가까운 죽항도로 갔다. 죽항도 포구에는 송천식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마중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송씨의 집이었다. 진 작가가 손에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단아한 서각 문패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패에는 '함께라서 행복합니다 송천식·박흔영'이라고 씌어 있다.

▲ 죽항도 포구에서 만난 진성영 작가와 송천식 씨. 서각 문패를 들고 자세를 한 번 취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주 섰다. ⓒ 이돈삼


▲ 진성영 작가와 죽항도 주민 송천식 씨가 서각 문패를 함께 걸고 있다. 지난 6월 7일 진도군 조도면 죽항도의 송 씨 집에서다. ⓒ 이돈삼


진 작가가 서각 문패와 현판을 달아주기 시작한 건 올 초부터다. 서울에서 살다가 지난해 고향으로 내려온 뒤,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찾은 일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닳고 헤진 문패를 보게 됐고, 캘리그래피로 쓴 문패가 섬마을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는 손으로 쓴 글씨를 가리킨다. 밋밋한 글자를 손글씨로 독특하면서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글자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진 작가의 재능기부 계획을 전해들은 광주 어울공방 최선동 작가가 선뜻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의 재능기부는 진 작가가 캘리그래피로 글씨를 쓰면, 최 작가가 편백나무에 새겨서 보내오고, 진 작가가 마을이나 집에 직접 달아주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 지난 7일 작업실에서 만난 진성영 캘리그래피 작가. 언제라도 손글씨를 쓸 수 있는 작업 도국 비치돼 있다. ⓒ 이돈삼


섬마을로 돌아온 박진우·김현숙씨 집에 지난 1월 서각 문패를 달아주면서 시작된 진 작가의 재능기부는 매달 한두 군데씩 이어지고 있다. 닳고 헤져 잘 보이지 않던 진도군 조도면 명지마을의 복지회관 현판도 바꿔줬다.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한데 살고 있는 진도군 군내면 안농마을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은 서각 현판을 기증했다. 안농마을에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 100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

진 작가가 지금까지 서각 문패와 현판을 달아준 곳은 진도군 관내 20여 군데에 이른다. '사랑이 꽃피는 집 박종영·김점단' '자연산 복탕집 김옥진·이정애' '신나게 행복하게 강경오·김양숙'... 문패와 현판을 전달받은 주민들도 '정성이 가득 들어간 글씨와 현판이 집과 회관의 분위기까지 밝혀준다'며 반기고 있다.

진 작가도 "작지만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마음 뿌듯하고, 보람도 있다"면서 "앞으로도 진솔한 마음과 섬마을의 정취, 바다내음 물씬 묻어나는 글씨로 문패와 현판을 달아주면서 캘리그래피의 매력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 고향에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 진성영 작가가 지난 7일 그의 작업실에서 손글씨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를 써보이고 있다. ⓒ 이돈삼


▲ 그 동안 진성영 작가가 쓴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 등을 새긴 머그컵. 그의 작업실에서 볼 수 있다. ⓒ 이돈삼


진 작가는 지난해 8월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서울에서 캘리그래피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SBS 수목드라마 <나쁜 남자>,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KBS 대기획 <의궤, 8일간의 축제>, MBC 다큐멘터리 <바다愛 물들다>... 우리에게 익숙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서체도 그의 작품이다.

가수들의 음반 표지 제목과 각종 포스터, 책 표지 글씨도 많이 썼다. 전남도청 소식지 <전남새뜸> 등 신문과 사보, 잡지의 제호도 헤아릴 수 없이 썼다. 그의 글씨는 하나같이 생동감 있고 맛깔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캘리그래피는 가독성이 높아야 합니다. 글자가 정확히 보이고, 내용이 쉽게 전달되어야죠. 시선을 붙잡을 수 있도록 차별성도 갖춰야 하고요. 물 흐르듯 유연함과 리듬감도 살아있어야 하고요. 선의 움직임과 형태를 통한 조형미에다 나만의 개성도 담고 있어야죠."

진 작가가 들려주는 좋은 캘리그래피의 조건이다. 전라남도 진도에 딸린 작은 섬, 조도에서 나고 자란 진 작가는 전라남도에서 대학을 다니고, 한때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영상 촬영 일을 했다.

캘리그래피를 접한 건 10년 전, 서울의 한 회사방송국에 프로듀서로 근무할 때였다. 서예가 초정 권창륜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캘리그래피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동안 캘리그래피의 모든 것을 담은 책 <캘리그라피를 말하다> 등 여러 권의 책도 펴냈다.

▲ 진성영 작가가 펴낸 캘리그래피 관련 책들. 그동안 서울에서 활동했던 진 작가는 지난해 고향 진도로 돌아와 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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