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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화원읍의 독립운동 유적 세 곳 답사

등록|2018.07.01 14:41 수정|2018.07.01 14:41

▲ 모교 교정에 동상으로 서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정학이 지사 ⓒ 정만진


독립운동가 정학이(鄭鶴伊)의 동상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 2580, 구주소로 천내리 417번지 화원초등학교 교내에 있다. 동상이 화원초등학교 교내에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되지만, 그는 1913년 8월 2일 화원에서 출생했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운동가 공훈록은 그의 본적을 '경상북도 달성 花園 本 611', 주소를 '日國 大阪市'로 소개하고 있다. '달성군 화원면 본리 611번지'가 본적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주소가 일본 대판시라는 기록은 그 뜻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공훈록에 따르면 정학이 지사는 '1928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일본 대판(大阪)에서 대판 지구 교포의 인권보호와 친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여 지하실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항일 조국 독립을 위한 벽보를 작성하고 인쇄물을 대판 일대에 배포하였다.

1933년 9월 2일 대판에서 피검되어 동년 1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4년 11월 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학이 지사가 일본 대판에서 순국하였다는 이유로 공훈록이 그의 주소를 '일국 대판시'로 규정한 듯 여겨진다.

정학이 열사 탄생 100주년 기념 때 동상 건립

2013년 6월 6일 '정학이 열사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가 대구 화원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정학이 지사의 동상이 그 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지사의 동상이 화원초등학교에 세워진 것은 그곳이 그의 모교이기 때문이다.

▲ 2018년 6월 11일 오전, 동상 앞에는 '외손녀' 세 글자가 쓰인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 정만진

임진왜란 당시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대구 의병 총연합 부대)의 초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정사철(鄭師哲, 1530∼1593) 선비의 12세손인 정학이는 인흥서원에서 한학 공부를 하다가 화원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그 학교 3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후 정학이는 15세인 1927년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했다. 그가 교포들의 인권을 지키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 시기는 도일 이듬해인 1928년으로 나이 16세 때였다.

그때부터 줄곧 요시찰 인물로 지사를 감시해오던 일본 경찰은 일본만이 아니라 고향 달성에까지 수배령을 내렸고, 결국 지사는 체포되어 일제 감옥에서 2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모교 교정에 서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독립지사

화원초등학교 교정에 동상으로 돌아온 정학이 지사는 운동장을 지긋이 내려보며 서 있다. 딸이 태어난 지 약 13개월 만에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 순국한 그는 지금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딸처럼 보이리라.
 
1933년 9월 2일에 태어난 딸은 지금 생존해 있다면 85세일 터, 외손녀도 어느덧 60 안팎의 나이일 것이다. 21세까지밖에 살지 않아 그 이후의 사람살이가 어떠한지 직접 겪은 바 없는 정학이 지사, 85세 된 딸과 60세가량 된 외손녀의 모습을 실감으로 떠올리지는 못하실 터이다. 그는 그저 동상 앞에 놓인 꽃처럼 후손이 그리 곱다고만 짐작하시리라. 그렇다! 당신과 같은 선열들이 피땀으로 되찾은 조국에서 사는데, 어찌 꽃처럼 곱지 않으랴!   

▲ 문씨세거지(문영박 유적)의 담장 ⓒ 정만진

문씨세거지의 독립지사 문영박

독립지사 문영박(文永樸, 1880∼1930) 유적은 달성군 화원읍 인흥3길 18-5, 구주소로 본리리 397-1번지 일대이다. 그렇게 주소로 소개를 하면 어딘지 알 수 없는 독자들도 '문씨세거지'라고 하면 아마 '아, 거기!'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문씨세거지는 대부분의 대구 시민들이 한번쯤 가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익점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이곳 문씨세거지의 집들 중 특히 유명한 건물은 수봉정사와 인수문고이다. '수봉(壽峯)'은 이곳에 거주했던 문영박 지사의 호이다. 즉 수봉정사는 문영박 지사의 후손들이 그를 기려서 1936년에 세운 건물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문중 문고인 인수문고 역시 문영박 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문영박과 그의 아버지 문봉성(文鳳成, 1854∼1923)이 중국에서 양서를 선별하고 수집하여 배편으로 목포까지 싣고 온 후 다시 인편으로 문씨세거지로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 인수문고 태동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 문씨세거지의 강당 ⓒ 정만진

문영박은 영남 지역의 큰 선비이자 부호였다. 그는 1919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직전인 1930년 12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재산을 처분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낌새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은 1927년 12월 가택 수색 끝에 지사를 체포하여 28일 동안 대구경찰서에 구금했다. 하지만 분명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일경은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지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추조문(追弔文, 추모하고 조문하는 글)'과 '특발문(特發文, 특별히 보내는 글)'을 상가로 부쳤다. 문서들은 독립 자금을 후원해준 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담은 내용이었기에 아무도 몰래 문씨세거지에 전달되어야 했다. 하지만 문서를 품고 국내로 잠입한 이교재(李敎載)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 탓에 문씨세거지의 후손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후손에게 전달되지 못한 임정의 추도문

▲ 문씨세거지(문영박 유적)의 문고 ⓒ 정만진

결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동양 평화와 유신을 크게 내세워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서이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을 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고인(문영박)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주어 무궁한 국가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는 내용의 특발문과 추조문은 이교재의 경남 창녕 집 천정에 1945년까지 숨어서 지냈다.

지사의 장례 기간 중에, 또는 타계 후 일제 강점기 어느 때에 문서들이 잘 전달되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후손들이 일제에 잡혀가거나, 혹은 문서들이 압수되는 운명을 맞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철저하게 감시를 한 일본 경찰의 행위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현수 3부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현수(李賢壽) 3부자의 생가 터는 화원읍 명곡로22길 18, 구주소로 명곡리 686번지이다.1915년 3월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1917년 9월 중국에 가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사귀게 된 데서 유래한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모친 별세 기별을 받고 잠시 귀국했던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20년 4월 임시정부 재무부 서기가 되었고, 그 즉시 임시정부 산하의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약 여섯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1920년 8월 이현수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그의 임무는 독립운동 관련 문서 배포, 독립공채 모집, 방한하는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일 등이었다.

▲ 이현수 지사 부자의 생가터 ⓒ 정만진

임정의 명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이현수

국내에 들어온 그는 달성군 유가면의 이상철, 화원면의 임원조, 가창면의 이경만에게 국내 연락기관 책임을 맡겨 활동하게 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으로 독립 청원서를 발송했다. 또 자신이 발행한 영문 잡지 《자유》를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과 언론사에 배포했다.

그는 또 달성군 달서면 출신의 정덕진(丁德鎭)과 함께 대구와 경북 각지의 친일파 군수, 면장 등 관리들과 부호들에게 경고문 등을 발송하는 한편 이를 대구 부내(府內, 요즘의 시내) 길거리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힘썼다.

1923년 1월 24일 일제 경찰의 포위망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한 그는 일단 자수를 하였다. 이때 관련자 42명도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현수는 1924년 5월까지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체포되었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한 이현수

1925년 4월 이현수는 장남 이정호(李貞浩, 1913∼1990)를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현수는 김구가 1930년에 조직한 한국독립당 광동 지부의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한성》을 발행했고, 1938년에는 무정부주의 단체 조선혁명자연맹과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남경에서 창립한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조직에서 기관지 편집위원회의 주임으로 일했다.

1942년 이현수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게 되자 임시정부의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었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 차장을 맡았다. 그 후 1945년 1월에는 내무부 차장, 5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을 맡았다.

장남 이정호도 1942년 10월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선출되고, 1943년 외무부 총무과장, 1944년 외무부 정보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차남 이동호는 화북에 주둔 중인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을 맞아 이산가족이 되는 3부자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3부자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환국한 이현수는 조선대중당을 조직하여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 운동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납북되었는지 월북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1948년 총무처 정훈국장 등을 역임한 장남 이정호는 그 이후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했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차남 이동호는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이현수 부자의 생가터인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86번지, 도로명주소 화원읍 명곡로22길 18은 분단으로 인한 3부자 이산의 슬픈 가족사가 깃들어 있는 한국현대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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