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70년대 술집 '7공주집' 자리에 '마을극장' 설치

군산 개복동 극장 골목... 신석호 작가 "동네잔치로, 휴식 장소로 오래오래 사용되기 바라"

등록|2018.07.02 16:24 수정|2018.07.02 16:24

▲ 1920년대 군산 개복동 고지대(사진 왼쪽 윗부분) ⓒ 조종안


군산시 개복·창성동은 월명산(105m)에서 뻗어 내려온 야트막한 산줄기를 등지고 초가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군산 개항(1899) 전 지명은 옥구군 북면 개복리. 1910년 일제에 의해 개복정(町)이 되면서 군산부로 편입된다. 1932년 개복정 1정목(저지대)과 2정목(고지대)으로 나뉘고 광복 후 1정목은 개복동, 2정목은 창성동으로 개칭된다.

구한말 당시 어느 선비가 "군산은 앞으로 산(山) 수십 개가 없어지고 선유도는 육지로 변할 것이며, 어청도가 군산의 관문(항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언해서 주위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120여 년이 흐른 지금 군산은 그 선비 예언대로 올망졸망한 산 10여 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군산군도 섬들도 여러 개가 육지화 됐다.

명성 떨쳤던 '예술의 거리'...1980년대 이후 쇠락

▲ 군산 개복동 극장골목(2008년 촬영) ⓒ 조종안


창성동 말랭이(고지대) 옛 지명은 노서산(老鼠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해마다 정월에 당제를 지내는 신당(神堂)이 있었으나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에 의해 그 맥이 끊기고, 초가집이 옴닥옴닥 들어서 달동네를 이뤘으며 은군자마을(주점골목)이 조성된다. 광복 후에는 집창촌이 됐다가 2006년 아파트단지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제강점기 개복정 2정목은 빈민촌이자 조선인 무산아동 교육의 메카였다. 미선공조합 사무실을 비롯해 영신여학원(영신유치원 전신), 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청년야학교) 등 조선인 야학이 즐비했던 것. 이 야학들은 대부분 1910~1920년대 설립됐으며 교사 신축을 앞두고 독지가, 노동자, 기생 등 조선인 수백 명이 성금을 기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개복정 1정목은 골목이 많은 상가였으며 두 개 극장(희소관, 군산극장)과 기생을 관리, 양성하는 권번도 두 곳(군산권번, 보성권번)이나 있었다. 일급요릿집(요정)도 몇 개 있었다. 기생골목, 여관골목, 젠사이집 골목 등이 존재했으며 광복 후 문화·예술의 거리로 명성을 떨치다가 나운, 수송동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번영과 화합 기원하는 '길놀이'로 버스킹 시작

▲ 군산 시민예술촌(좌측)과 우일시네마(군산극장) ⓒ 조종안


서울 충무로에 비견될 정도로 번창했던 50~60년대. 그 시절 거리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개복동. 10년 전 이곳에 '예술의 거리'가 조성됐다. 그 거리 초입에 군산시민예술촌(촌장 박양기)이 자리한다. 옛 군산극장 부속 건물을 재건축한 시민예술촌은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쉼터이자 늘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박양기 촌장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고 지역 문화예술을 이어가고자 시민예술촌 건물 자투리 공간(옛 군산극장 골목)에 문화공간 '뒤 뜰(마을극장)'을 마련하고 지난달 16일(토) 오후 특별한 공연을 진행하였다. 이름하여 '열정의 버스킹'이다.

옛 향수를 자극하는 이색적인 공간에서 진포문화예술원 풍물패의 '길놀이' 한바탕이 펼쳐진다. 신명나는 '덩더꿍' 소리가 낡은 건물들이 엉클어진 고샅으로 파고든다. 귀가 솔깃해진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얼씨구!' '잘헌다!' 소리가 터져 나온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도 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를 따라 손장단을 맞추는 조무래기 꼬마도 보인다.

▲ 진포문화예술원 풍물패의 ‘길놀이’ 공연 ⓒ 조종안


버스킹은 마을극장의 번영과 주민들의 안녕, 화합을 기원하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바이올린, 설장구, 여성 4인조 보컬공연, 국악, 록 밴드 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공연이 펼쳐진 무대는 대낮에도 술집 아가씨들의 간드러진 웃음과 화장품 냄새가 찐하게 풍겼던 1970년대 극장골목. 그 골목의 '칠공주집' 자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묘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 시절 극장골목 오른쪽은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군산극장 담이었고, 왼쪽은 판자와 함석을 덧댄 그래서 보기에도 옹색한 술집들이 얽히듯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밤이면 꽃밭으로 변했다. 어둑어둑해지면 집집이 보유하고 있는 전축에서 최신유행가가 흘러나왔으며 합죽선 모양의 네온간판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비주류 공간이었던 동네, 새롭게 형성되는 중

▲ 신석호 작가 ⓒ 조종안


무대 설치를 주도한 신석호 작가는 "이번 작업은 시민예술촌 제안으로 시작됐다. 목적은 오랫동안 방치돼 오면서 청소년들의 비공식 거류 공간이었던 이곳을 공식화된 새로운 공간적 특성을 갖도록 하면서 커뮤니티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거였다. 과거 역사를 통한 문화 재창출과 여러 관계가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공동체가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설명을 이어간다.

"일제강점기 개복동은 조선인 동네 중심지였다. 군산경찰서를 경계로 영화동, 월명동, 중앙로 일대는 일본인들 공간이었고, 영동, 죽성동, 둔율동, 개복동 일대는 조선인 거류지였다. 상업적으로는 70~80년대까지 영화동 일대가 미군 전용 클럽 거리로 명성을 떨쳤다면 개복동 일대는 내국인들 여흥 공간으로 소란했던 곳이다.

1950년대 초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시화전과 사진전이 열리고 문인들이 모여 문학을 논하는 다방도 있었다. 호남 최초 영화관과 연극 공연장이 있던 동네이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집창촌도 생기고 화재사건도 발생했던 가슴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구도심의 가장 슬럼화된 공간이지만 시민예술촌의 활동과 공간의 문화적 재생을 위한 움직임이 새롭게 형성되는 중이다."

이어 신 작가는 "소설 <탁류>의 무대였던 공간, 선양동 아리랑 고개 넘어 정주사 발길을 따라가는 한참봉내 싸전, 행화내 술집 등이 있었던 이 공간(개복동)은 오랫동안 비주류 비 주체의 공간이었다. 세월만큼 낡은 풍경이 익숙한 곳이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장소(야외무대)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생겨나길 바란다"라며 "때로는 동네잔치로, 때로는 공연으로, 때로는 휴식 장소로 오래오래 사용되기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지켜봐 주고 격려해준 주민들께 감사

▲ 인사하는 신석호 작가와 박양기 촌장 ⓒ 조종안


신 작가는 무대 주변에 설치한 시설물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다. 플로어는 공식화된 장소 역할을, 벤치 스탠드는 편안한 휴식과 이웃과의 소통을,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우주상자-별 박스는 낭만적인 연출과 조형성을, 드로잉들은 공간의 심리와 마음 등을 표현한 작업이었다는 것.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특별히 이곳은 낡은 풍경들로 둘러싸인 공간이지만 무대 뒤 낡은 건물들은 무대세트 같이 보이도록 연출함으로써 낡은 이미지에 시간의 의미를 담고자 하였다. 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아파트 불빛, 시원하게 열리는 하늘과 우주상자의 별빛은 바쁜 하루를 지낸 다음 잠깐의 휴식에 더없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 작가는 창작 활동과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한 예술프로젝트를 수차례 이끈 미술가이자 기획자로 알려진다. 그는 공간을 만드는 내내 관심을 두고 지켜봐 주고 격려해준 동네 주민들과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시민 예술촌 식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신석호 작가의 대표 기획 작품은 2005 전주 동문거리 예술전과 2006 군산 임시공간 '방편'을 기반으로 진행한 네 번의 군산 지역 읽기 프로젝트를 꼽는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10, 2011 군산 아트레지던시, 그리고 2015 영화동 사진전을 기획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전 8회와 다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군산에 거주하며 예술과 사회적 관계 속에 파생할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 낭만과 조형미를 연출한 우주상자-별 박스 ⓒ 조종안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매거진군산 7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