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 넘게 죽고 다쳤는데, 왜 이토록 바뀐 게 없나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주간] 문송면, 원진, 황유미... 일터에서 쓰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 반올림 농성장 전경.반올림 농성장은 밤이나 비올 때는 비닐을 덮어놓는다. 여름에 더울 때는 비닐을 걷어도 한증막이 따로 없다. 장마철은 정말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찜통 그 자체.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자리를 지켜왔다. ⓒ 반올림
강남역 8번 출구. 올 초까지만 해도, 그곳은 자꾸만 이상하게 완공이 지체되는 공사장이었다. 삼성본관 앞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농성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인근 거리에는 CCTV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났고, 8번 출구도 봉쇄됐다. 안전을 지키지 못한 공장의 피해노동자 이야기를 알리려고 눌러앉은 농성장 맞은편, 공사장 가벽에 적힌 '안전제일' 글씨는 마음을 이상하게 했다. 공사장에서 농성장 안으로 불어온 시멘트 가루와 흙먼지가 강남역 사거리의 매연과 섞여 떠다녔다.
엄연한 공유지인데도 갖은 핑계를 들며 농성장을 뜯어내던 경찰과 삼성 경비 때문에 섣불리 천막을 치지도 못했었다. 얼기설기 야금야금 높여간 파라솔은 온실비닐로 덮여 여름에는 온장고, 겨울에는 냉장고, 봄과 가을에는 꽃가루와 매연의 보고가 되었다. 밤과 새벽에는 취객이 시비를 거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이 나름 '5성급 호텔'이라고 농담해 가며, 한쪽에는 꽃과 식물을 심고 오가는 길고양이도 돌보면서 꾸준히 모여들었고, 삼성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얼어붙은 폭포처럼 차갑고 거대한, 묵묵부답하는 삼성의 본관 건물 그늘 아래, 그렇게 우리는 천일간 농성을 이어 왔다.
나는 지난 1년 반가량 반올림 농성장 지킴이로 활동했다. 뒤늦은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2016년 촛불집회에서 방진복 행진에 함께했다. 그러다가 강남역의 농성장을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2017년 1월 초였다.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반쯤 눈에 덮인 비닐 더미처럼 보이는 농성장 앞에서 김기철 씨의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기철씨는 반올림 삼성반도체·LCD 피해자로는 79번째 사망자였고, 32번째 백혈병 피해자였다. 2017년 1월 14일, 32세에 급성골수성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6년간 일하다 얻은 병이었다.
김기철씨는 삼성전자 협력업체 '크린팩토메이션'에 입사한 뒤 삼성전자 화성공장 15라인에서 수백 종의 화학물질을 다루면서 반도체 웨이퍼를 가공하는 공정을 여기저기 누비며 장비 유지와 보수 업무를 했다. 그러다가 이온주입 공정과 포토 공정 등, 전리방사선과 벤젠 등의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병이 다 낫고 나면 다른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고 하던 정의감 가득한 청년이었다.
▲ 고 김기철 씨의 추모 이어말하기에서.삼성 반도체, LCD 공장 산업재해 사망자들을 현수막에 손글씨로 직접 그려넣은 고 김기철 씨의 사진이 촛불의 불빛을 받아 환하게 웃고 있다. ⓒ 반올림
지난 10년간 삼성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400명 가까이 직업병 발병을 호소해 왔다. 입막음과 회유, 협박과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음 연락해 온 것이니, 그 진정한 피해의 규모는 차마 가늠하기조차 두려울 지경이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 에스디아이(SDI) 등 삼성 계열사에서의 발병 제보는 320명, 사망자는 118명이다. 지금까지 76명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산재 인정률은 매우 낮아서, 겨우 12명만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불인정 판결을 받은 35명 중 25명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그중 12명이 산재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여전히 힘겨운 법정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일하다가 병든 것이다. 그 병을 일으킬 확률이 몹시 높은 업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탓이다.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데다가, 앞으로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안전대책을 촉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왜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는가? 왜 회사는 '기업 비밀'이라는 거짓말을 내걸고 떳떳하지 못한 처사를 지속하는가? 산업재해 인정의 길은 왜 이렇게 고달파야 하는가?
1000일, 11년, 심지어는 30년이 지나도록 이 질문들은 해소되지 않았다.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투쟁의 길은 그토록 길고 험했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15세 문송면, 산업재해의 신호탄 되다
1988년 2월 8일, 15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문송면은 한 달째 원인 모를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면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자꾸 몸이 아팠다. 그래서 형의 충고에 따라 휴직계를 내고서 충남 태안의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취직한 지 두 달만이었다.
▲ '고 문송면군 장례식''수은, 신나 먹이고 송면이를 죽이더니 산업재해 은폐조작까지...' 하지만 30년이 지나도록 변한 것이 없다 ⓒ 일과건강
태안중학교 졸업반이었던 문송면은 집이 가난해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협성계공이라는 서울의 온도계/압력계 제조업체에 일하러 가면 기숙사에서 살고 야간학교도 다닐 수 있다고 들었다. 야간공고 진학의 꿈을 안고, 그 길로 낯선 서울행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숙사를 배정받지 못했고, 바닥에 수은이 방울져 맺힐 정도로 수은증기 자욱한 밀폐된 공장에서 밤잠을 청해야 했다. 낮에는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고 압력계를 신나로 세척하는 일을 했다. 거기서 추운 겨울밤 난로를 때워가며 잠을 잤으니, 거울처럼 고여 있던 수은이 더욱 빠르게 몸속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고향집에 내려온지 일주일이 지났을까. 문송면은 발작을 일으켰다. 집에서는 한약도 지어 먹여보고 굿도 해보고 별 수를 다 써보았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모른다고만 했다. 자꾸 악화되는 것만 같아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서울대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의사는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수은을 다루는 일을 했다면 직업병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는 수은중독과 유기용제 중독이라는 진단이었다.
▲ '온도계 공장 근무 15세 소년 두달만에 수은 중독'문송면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기사화되면서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 동아일보
하지만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이라며 산재승인을 거부했다. 협성계공 회사 측은 '시골에서 농약에 중독된 것 아니냐'라며 산재신청 날인을 거부했다. 결국 성모병원으로 옮겨 입원치료를 받던 문송면은 그해 7월 2일 목숨을 잃었다. 사망 2주 전에야 비로소 노동부는 그의 질병이 산업재해였음을 인정했다.
노동부의 산재인정이 있기까지, 서울대병원에서 당시 생소했던 산업재해에 대한 경종을 울린 의사 박희순, 당시 구로의원 상담실장이었던 김은혜, 수은 중독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대중적으로 알린 김록호, 시민공익법률상담소 법률상담 담당 박석운 등,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언급 자체를 '빨갱이' 취급하고 '국가 발전의 저해'로 인식하던 살벌한 당시 분위기를 무릅쓰고 진실을 알릴 용기를 낸 이들이 있었다. 의문의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동생을, 살려내려고, 진실을 파헤치려고,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동분서주한 가족이 있었다. 참혹한 진실을 알려낸 기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가는 길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모여든 노동자 대중과 시민, 학생들의 지난한 투쟁이 있었다.
7월 17일 영등포시장 앞에서 영결식에 이어 노제를 치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수천 명의 경찰병력이 방패로 막아섰다. 한참의 싸움 끝에서야 소년은 마석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 문송면 노제.'작업환경 개선하라' 고 문송면 산업재해 사망에 분노한 시민들이 장례투쟁을 진행했다. ⓒ 일과건강
950여 명의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목소리 내기 시작하다
1966년 가동을 시작했던 원진레이온사는 인조 비단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1988년 당시, 44세의 강희수씨는 한겨레 안종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하다가 걷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말했다. 안전교육을 입사 20년간 받은 적도 없었다고 했다.
정근복 피해자는 병과 관련해 민형사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입막음 각서를 써준 대가로 600만 원을 주겠다고 회사 측에게 들었다고 했다. 1986년 이후 이런 증상들로 강제퇴직당한 노동자가 12명이라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거동조차 어려워진 서용선 피해자, 한병화 피해자, 조규은 피해자...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갈수록 마비, 다발성 신경염 등 이상 증세가 오고 있었다. 노동부에서는 원진레이온사에 25,000시간 무재해 기록증까지 발급했는데, 자꾸만 일하던 사람들이 아파서 퇴사하고 몸이 상해서 입원하는 것이었다.
문송면의 열악했던 노동환경과 산업재해 인정 투쟁에 이은 장례 투쟁까지 알려지면서, 우리도 산업재해였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원진 공장의 피해자 가족들이 조사에 착수했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폐기 직전의 기계들을 들여온 원진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보호구도 없이, '구수한 냄새'가 나는 '증기'와 '물줄기'에서 인견이 뽑혀 나오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증기'와 '물줄기'는 다름이 아닌 맹독성 물질인 이황화탄소(CS2)였던 것이다.
이황화탄소는 세계 2차대전에서 독가스로 사용되었고, 몹시 희석된 형태로는 살충제에 사용될 정도로 유해한 물질이며, 신경계에 작용하여 정신질환, 2세 피해, 심장과 뇌 및 장기 손상, 시력 손실, 신부전증, 중증마비와 사망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물질이다. 이 물질에 마스크도 없이 노출된 채 매일 일하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병들고 죽어갔던 것이다.
▲ '원진레이온이 우릴 죽이고 있다'문송면의 사망에 이어 원진레이온 공장에서의 잇따른 직업병 사건이 기사화되며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 경향신문
투쟁의 과정에서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 대책위원회'를 전신으로 한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는 '원진레이온 직업병대책위원회'로 확장되었고,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가족협의회(원가협)이 결성되면서 원진 산재추방투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1994년에 이르러서는 이황화탄소 중독 판명을 받은 사람이 359명이었고 특수건강검진을 받거나 신청한 사람도 400명이었다. 이처럼 역대 규모의 1988년부터 원진레이온사에서 일하다가 죽은 사람은 230명, 직업병에 걸린 원진레이온 피해자는 총 915명에 달한다.
결국 원진레이온은 1993년 폐업했고, 그해 11월에는 원진재단이 설립되었고, '노동자의 건강지킴이'를 자임하는 녹색병원도 설립되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죽음의 행렬은 끊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21세 황유미
얼마나 더 많은 신호탄이 필요한 걸까? 2003년 10월 고등학교 3학년이던 황유미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취직했다. 삼성이라니, 대기업 아닌가. 자부심을 가지고 일이 아무리 고되어도 반도체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먹으면 토하고, 멍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병원에서는 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2006년 6월,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다. 백혈병 판정이었다.
병이 걸리고 나서는, 같이 일했던 동료들과의 연락도 뜸해졌다. 알고 보니, 일하다가 아프게 된 사람에게는 연락하지 말라고 회사 측에서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는 것이었다. 고립감과 외로움과 두려움에 병은 깊어갔다. 회사 측에서는 보상은커녕 500만 원을 줄 테니 공장에서 병에 걸렸다는 말을 외부에 하지 말라는 식으로 적반하장이었다. 온몸에 뼈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투병하던 황유미는 아버지 황상기 씨의 택시 뒷좌석에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공장에서는 반도체에 먼지 한 톨, 눈썹 한 가닥이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반도체 제품의 청결만을 신경 썼지, 그곳에서 사용하는 물질들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안전교육 한번 해준 적 없었다.
처음에는 산업재해 신청자가 황유미뿐이었다. 황유미 아버지 황상기 씨는 이 문제를 해결하겠노라고 자신의 딸에게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그래서 수원의 다산인권센터에 연락을 취해 삼성이 내 딸을 죽였노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놀랍게도, 자신이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비슷하게 아팠다거나 가족이 죽었다며 연락을 취해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책위가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전환되었고, 지금은 400명의 피해자까지 확인된 것이다.
▲ 고 황유미 11주기 추모 기자회견 황상기 씨가 고 황유미 씨의 영정을 들고 발언을 하고 있다. ⓒ 반올림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래도 지금은 <또 하나의 약속>이나 <클린룸 이야기> 등의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고, 뉴스에도 반올림 투쟁의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이 더 나와야 비로소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제도를 바꾸고 기업의 행태를 바꿀 수 있을까. 피해자와 유가족이 맨땅에 머리를 박아야만 아주 천천히 법정은 문을 열고 사회는 귀를 여는 이런 막막한 방식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가.
▲ 반올림 농성 999일차의 아침.농성장을 언제나 지키는 고 황유미 씨의 영정이 '반올림 노숙농성 999일차' 글씨 옆에 놓여 있다. ⓒ 반올림
최근에도 메탄올 중독으로 청년노동자 7명이 실명하는 일이 있었다. 맹독성 물질이 싱크대에 고여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대야로 퍼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문송면 사망 30년 지나도록, 노동자로서의 제권리도 학습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교육부의 이상한 사각지대에서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생들도 자꾸만 죽어나가고 있다.
이런 걸 정말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시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기업이 쥐고 흔드는 산업재해 왕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반올림에서 확인한 삼성공장 사망자수와 원진공장 사망자수를 합치면 348명이다. 피해자 수를 합치면 원진 915명, 반올림 394명, 도합 1309명이다.
이뿐인가. 매년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 수도 평균 천여 명을 꾸준히 웃돈다. 핸드폰, 텔레비전, 전화기, 대형 스크린 등,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여러 제품들을 일선에서 만드는 사람들은, 정작 회사에 대한 아무런 권리주장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문도 모른 채 몸이 상해가다가 목숨마저 잃는다. 그 과정에서 경영진은 오리발만 내밀며 정유라 같은 사람들에게 수백억 원 어치 말을 선물하는 등, 호위호식하고 혹세무민하기에 바쁘다.
▲ 반올림 농성장 옆에 설치된 반도체 노동자상과 이재용상.촛불집회 내내 끌려다니느라 낡고 해진 이재용 동상에는 '국정농단', '뇌물', 그리고 '산재살인' 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 반올림
이제는 겨울 내내 행진해 겨우 감옥에 보낸 이재용마저 석방되었다. 삼성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통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묵살해 왔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폭로되었다. 바꿔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노동자를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자본의 행태를, 언제까지, 어떤 궤변으로 비호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힘을 모아 바꿔나야만 한다. 회사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을 더는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그 누구도 일하다가 억울하게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 고 문송면 • 원진 30주년 및 반올림 농성 1000일맞이 삼성포위행동을 7월 4일 저녁 6시 강남역 8번 출구에서 진행한다. 이번 주 산재사망자 추모주간을 맞아, 함께 행동하는 사람이 보다 많아지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