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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하석주 '눈물의 재회', 이산가족 상봉만큼 뭉클했다

[TV 리뷰] 시청자에게 '힐링' 선사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고마웠다

등록|2018.07.06 17:12 수정|2018.07.06 17:12
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지난 5일 오후 방송된 SBS 시사 토크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보면서도 그랬다.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는 게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번 감동은 색달랐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시사 토크 프로그램이다. 시사 토크 프로그램은 사회적 논란이 첨예한 문제를 주제로 열띤 공방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동보다는 주로 논리가 앞선다.

그러나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아래 블랙하우스)는 달랐다. 블랙하우스는 첫 꼭지에 2018러시아 월드컵 특집 '아! 맞다, 월드컵이지?' 코너를 다뤘다. 이 코너엔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과 최용수 전 서울FC 감독, 그리고 독일 출신 방송인 니콜라스 클라분데가 패널로 자리했다. 세 사람은 한국과 독일 축구 대표팀 경기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약 10분가량이 지났을까, 한 명의 패널이 합류했다. 주인공은 하석주 현 아주대 감독이었다. 차 전 감독은 하 감독을 보자 얼싸안았고, 하 감독은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하 감독에게 차 전 감독은 이렇게 위로를 건넸다.

▲ 하석주 아주대 감독은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20년 만에 재회했다. ⓒ SBS


"왜 이렇게 마음에 두고 살어. (축구를 하다 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축구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의 만남은 흡사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광경을 방불케 했다.

1998년 월드컵의 비극, 20년이나 갈 줄이야 

차범근과 하석주의 만남은 여러모로 각별하다. 이 지점에서 시계를 1998 프랑스 월드컵으로 되돌려보자.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국민적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지역예선에서 일찌감치 본선행을 확정한 데다, 조추첨 결과도 나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멕시코, 벨기에, 네덜란드와 한 조에 속했다. 네덜란드를 빼면 해볼만 한 상대였다. 특히 멕시코와의 경기는 잡아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전 월드컵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멕시코였는데, 적어도 멕시코만큼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차범근 감독의 존재감 역시 대단했다. 도쿄에서 열린, 이른바 '도쿄 대첩'에서 일본에게 2-1 역전승을 거둔 뒤 차 감독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외신도 대회 직전 대표팀을 이끌고 프랑스로 온 차 감독을 '동방의 베켄바워'라며 치켜 올렸다.

여러모로 첫 승은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경기를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다. 경기 초반 분위기도 좋았다.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하석주였다. 기대했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98프랑스월드컵에서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장면. ⓒ SBS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하석주가 상대팀 선수에게 백태클을 가하다 퇴장 당한 것이다. 마침 대회 직전 월드컵을 주관하는 FIFA는 백태클을 엄격히 규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석주는 이 기준에 따라 퇴장 당한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심판이 레드 카드를 꺼내들자 하석주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때 중계화면에 비친 하석주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경기 흐름은 멕시코가 주도했다. 멕시코는 세 골을 몰아 넣으며 승리를 챙겼다. 이때부터 여론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했다. 언론은 차 감독의 선수기용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네덜란드와의 두 번째 경기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대표팀은 한국 진영을 마음껏 휘저었다. 이 경기 이후 참극이 벌어졌다. 차 감독이 현지에서 전격 해임된 것이다.

하 감독은 '그때의 일로 20년간 차 감독을 피해다녔다'고 고백했다. 지난 6월 21일 방송된 블랙하우스 20회차에서 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차 전 감독 – 글쓴이)한테 정말 죄송해서 무릎 꿇고라도 사죄를 드리고 싶은데 앞에 나타나질 못하겠더라고요. 한번 빨리 뵙고 싶은데 그게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한 번 빨리 뵙고 싶다는 하 감독의 바람은 20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아마 멕시코전 역전패의 빌미를 줬다는 자책감이 하 감독을 괴롭힌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하석주 감독과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의 재회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하 감독을 다독이는 차 전 감독의 모습은 감동을 더했다. 녹색 그라운드를 거침없이 누비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 속은 참으로 여렸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비단 감동만 있었던 건 아니다. 차 전 감독과 하 감독, 그리고 최 전 감독은 선수를 비난하는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 러시아 월드컵 스웨덴과의 첫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내준 김민우, 그리고 멕시코전 페널티킥 반칙을 범한 장현수는 팬들의 비난에 시달렸고 두 선수의 소셜 미디어 계정은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만약 1998년 당시 소셜 미디어가 있었더라면 하 감독과 차 전 감독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독일 출신 클라우스 클라분데는 한국전 패배에 속상해 하면서도 '선수들을 비난하는 문화는 없다'고 했다. 참으로 새겨 들어야 할 지적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책임 없나 

이 지점에서 대한축구협회는 잘못이 없는지 묻고 싶다. 지난 일을 들추는 게 부질 없어 보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복기는 필요하다. 네덜란드와의 경기 이후, 축구협회가 계속해서 차 감독을 신임했다면 어땠을까? 이후 경기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하 감독이 마음의 짐을 느껴 20년간 차 전 감독을 피해 다니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차범근은 말 그대로 불세출의 축구 스타였다. 후배 축구인이 단 한 번의 실수로 귀감이 될 선배 축구인과 관계가 단절됐다는 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축구협회는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 절차를 진행 중이다. 신태용 현 감독도 후보로 올라 있다. 차 전 감독이나 하 감독, 최 감독 모두 신 감독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독일축구협회는 훌륭한 참고 사례가 될 것이다. 독일은 80년 만에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독일축구협회는 현 요하임 뢰브 감독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대회 중 감독을 해임시킨 대한축구협회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축구협회의 차 감독 해임은 본인에게나 하 감독은 물론, 당시 축구팬에게도 큰 생채기를 남겼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이런 차 전 감독과 하 감독의 재회를 성사시켰다. 제작진의 기획은 두 사람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치유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시사 프로그램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난 사실 진행자 김어준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김어준은 사회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음모론을 꺼내들었다. 또 한창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을 때 정 전 의원에게 기울어진 방송 내용으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같은 시간대 JTBC가 방송하는 <썰전>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시사 프로그램으로선 보기 드물게 '힐링'하는 경험을 출연자와 시청자들에게 전해줬다. 김어준 MC와 <블랙하우스> 제작진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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