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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은 반란일까, 항쟁일까?

여순항쟁 역사 다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를 읽고

등록|2018.07.13 21:35 수정|2018.07.13 21:35
여수에서 올라와 청와대 앞에서 여순항쟁의 왜곡된 진실을 밝혀달라며 1인 시위를 벌이는 스잔나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여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희생자 가족이다. 그이는 '빨갱이' 폭도로 매도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무고하게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열심히 호소한다.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제주 4.3항쟁이나 여순 사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지나친 것이 전부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한 역사적 사건인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을 잊거나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1948. 여순 항쟁의 역사를 살핀 책 ⓒ 흐름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흐름)는 1948년 여순 사건을 다각도로 재조명한 책이다 저자 주철희는 여수 출신으로 여순 사건을 비롯해 국가폭력과 반공문화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다. 저자는 여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바른 이름(正名)을 통해 여순항쟁의 역사가 바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남로당의 사주를 받아 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반란이라고 배웠던 여순 사건의 객관적 사실과 진실은 무엇일까.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14연대는 동족 학살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해 항명하며 궐기한 것이 여순 사건의 시초다. 그들은 왜 제주 토벌대 합류를 거부했을까.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회 -67쪽
 
여순 사건은 반란일까, 항쟁일까? 군대는 국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만으로 여순 사건은 반란으로 명명되었고 우리는 오랫동안 반란으로 배웠다. 여순항쟁을 집중 연구해 온 저자는 여순 사건은 반란이 아닌 '항쟁'이며 역사적 객관적 조명과 바른 명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여순 사건이 왜 반란이 아닌 항쟁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고 있다.

'항쟁'은 '사회적 현실 속에서 특정한 담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들이 지배적 담론 질서에 대항하여 집단적이고 전면적으로 저항을 실천하고, 나아가 지배 질서의 일상적 작동을 정지시킨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항쟁의 세 가지 의미에 대입하여 보면 첫째, 제14연대 군인의 촉발로 시작하여 전남 동부지역 민중의 지지와 합세에 의한 대중적 실천 행동이었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부터 현재까지 사회.정치적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셋째, 권력의 잘못된 명령에 대한 저항과 이승만 권력의 기반이었던 친일파 관리와 경찰의 부패와 억압에 대한만중의 실천적 대항이었다. - 15~16쪽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은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심각한 좌우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이념과 무관한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이들 대부분 소작농이었기에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해준다는 사회주의를 심정적으로 지지했을지 모르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해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순박한 민중들은 외세가 갈라 친 조국의 혼란 속에서 빨갱이로 둔갑되어 무고한 희생양이 된 경우가 많다. 제주도 4. 3의 희생자, 여순 사건의 희생자, 5, 18 희생자, 심지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해고노동자에게도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설 곳이 없는 대한민국이다.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은 사회적으로 사형을 선고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빨갱이'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취직을 할 수도 없고 외국으로 나가지도 못하니 사회 어느 곳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의 이분법적 사고가 가져 온 병폐다.

냉전의 진영 논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기초로 하였다. 이승만 정권에 찬동하거나 지지하는 세력은 아군이며, 정권에 반대하거나 정책에 비판만 해도 적군이 되는 논리, 그 논리는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이승만 정권의 최후 보루인 반공주의는 기독교(인)에도 그대로 작동되었다. 이원론에 바탕을 둔 기독교의 배타성은 자신의 논리만 선으로 규정하고 타자를 악마로 규정하는 이승만의 이분법적 논리와 궤를 같이했다. - 270쪽
 
가족이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어도 후손들은 연좌제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 때문에 상처를 가슴에 묻고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이제 그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저지른 국가 폭력과 역사 왜곡을 바로 잡고 덧씌워진 굴레를 벗겨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여순 사건에 대한 연구나 객관적 사료는 많이 부족한 상태다. 기록물이 대개 우익이나 군부대, 군청 등에 의해 기록되어 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남아 있는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좌익이나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의 열 배 이상이 군과 경찰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었다. 손가락으로 부역자라 가리키기만 해도 대부분의 희생자가 재판 없이 즉결 처형을 받았다고 한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어 간 수많은 희생자들은 이념과 무관한 순박한 민중이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반복해 이뤄진 지역적 비극이며 피의 복수였다. 저자는 여순 사건에 대한 바른 이름 찾기를 통해  빨갱이로 둔갑된 무고한 희생자들이 역사에 바로 기억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제 국가는 이념과 무관하게 빨갱이로 둔갑된 민중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남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 줘야 한다. 또한 연좌제로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가족들에게도 적절한 배상을 해줘야할 것이다.

1948년 10월 19일 그리고 2017년, 2018년...... 어느 덧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 무고한 동족을 살상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제주도 출동을 거부했던 제 14연대 병사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산과 들로 가서 소나무껍질과 피(柀)로 연명했지만, 관리와 경찰의 부정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어 민생고에 시달렸던 민중들, 이들이 만들어낸 1948년 10월의 역사는 70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성격이 모호하다. 이제 그 역사를 불의에 저항한 여순항쟁이라 정명(正名)한다. - 143쪽

덧붙이는 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주철희/흐름/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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