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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안기부 비밀공작원 '흑금성', 그는 왜 버림받았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공작>에 담긴 '흑금성'과 실제의 박채서

등록|2018.08.03 19:56 수정|2018.08.10 17:29
상대 진영을 파고들어가 최고지도자를 면담하고 녹음까지 해왔다면, 유능한 공작원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무사히 녹음을 해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번쯤 의심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능한 공작원이 조직의 배신을 당했다.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비밀 공작원인 그의 신분을 공개해 위기에 빠트린 것이다. 지금의 기무사처럼 곤경에 빠진 안기부 지도부가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에서였다. 안 그래도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한층 더 극적인 삶을 살게 된 대북 공작원 박채서(암호명 흑금성)를 다룬 영화가 8월 8일 개봉한다. 배우 황정민·이성민 주연의 <공작>이다.

▲ 영화 <공작>. ⓒ (주)영화사 월광


암호명 '흑금성', 박채서는 누구?

박채서는 군 정보기관 장교로 복무하다 전역한 뒤 안기부 비밀요원이 되어 중국과 북한에서 활약했다. 군에 불만을 품은 장교 출신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북한 최고위층에 접근해 고급 정보를 빼내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적도 있다.

1998년에 안기부가 흑금성이란 공작원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극적으로 기사회생해 대북 활동에 다시 나섰다가 2010년 징역형을 받고 2016년 석방됐다. 영화 <공작>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안기부 비밀요원이 되는 순간부터 안기부의 배신으로 신분이 폭로하는 시점까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공작>의 줄거리는 책이나 신문으로 알려진 흑금성 박채서의 삶과 대체로 일치한다. 1954년 충북에서 출생해 청주고와 육군3사관학교를 거쳐 국군정보사령부에 배치된 박채서는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1년부터 정보사 소속의 한·미 합동공작대 A-23팀에서 대북 우회침투 공작에 참여했다. 정보사는 기무사와는 별개의 조직이다.

얼마 안 있어 박채서는 <공작> 초반에 황정민의 연기로 표현된 것처럼 파행적 삶으로 빠져들었다. 간첩 조작사건인 수지킴 사건을 특종 보도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정훈 <동아일보> 전문기자의 첩보비화집 <공작-대한민국 스파이 전쟁 60년 '통일을 만드는 길'>(아래 공작)은 이렇게 정리한다.

"박채서 소령팀은 북한 공작조직이 당면한 자금난을 이용하는 공작안을 기획하여 상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때부터, 엘리트였던 박 소령은 무능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장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 장교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1993년 3월 박채서씨는 3사 출신의 그렇고 그런 소령 중의 한 사람으로 군복을 벗었다."

박채서가 이미지 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보사를 나온 뒤에 펼친 작전 중 하나가 이른바 '편승공작'이다. 박채서 공작팀이 단독으로 대북침투 사업을 벌이는 게 아니라, 대북사업에 열의가 있는 사업가를 지원하고 거기 편승해 대북침투를 실현하는 공작이다.

평양의 흑금성 공작원안기부의 '흑금성' 공작원 시절에 비밀 방북한 박채서씨가 평양의 5.1경기장에서 안내원과 함께 찍은 사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채서 팀은 광고 프로듀서 출신인 박기영에 주목했다. 영화 <공작>에서는 배우 박성웅이 박기영을 연기했다. 배우 채시라를 발굴해낸 박기영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광고를 북한에서 촬영하는 방안을 꿈꾸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박채서는 박기영의 이웃집으로 이사 간 뒤 친분을 쌓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박기영의 열정을 대북침투 루트 중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됐다. 또 대북 활동자금을 상부에서 지원받지 않고 자체 사업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됐다.

박채서는 박기영과 함께 1995년 '커뮤니케이션 아자(AZA)'란 회사를 설립했다. 주먹을 쥐며 '열심히 하자'란 취지로 외치는 그 '아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A에서 Z까지 갔다가 다시 A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띠는 상호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원래 상태(正)로 되돌아가는(反) 것을 반정(反正)이라 불렀다.

'아자'를 앞세운 박채서는 광명성경제연합회 베이징 대표부의 리철 등을 통해 북한에서 광고 촬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김정일의 호를 딴 이 기구는 대남 경제협력 사업을 관장했다.

북한은 1990년을 전후한 동구권 붕괴에 이어 1993년부터의 제1차 핵 위기로 한층 더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거기다가 자연재해마저 겹쳐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96년 북한 신년사에서 '고난의 행군'이 표방될 정도였다. 이런 점을 활용해 박채서는 '광고촬영 사업이 북한에 이득이 될 거'라는 미끼를 앞세워 북한 지도부에 접근했다. 그 결과,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고 독점사업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북한 핵심부의 신뢰를 받게 된 박채서씨는 그 무렵 김정일을 만났다는 보고를 안기부로 올렸다. 박씨는 몸속에 녹음기를 감추고 들어가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고 한다." - 이정훈의 <공작> 중에서.

박채서의 사업은 급속히 불어났다. 북한 내 광고촬영 독점을 발판으로, 핸드폰 애니콜 광고의 북한 촬영 건을 삼성전자와 함께 추진하게 됐다. 또 북한 내 TV 촬영 독점권도 얻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MBC와도 합작하게 됐다. 이때가 1997년이다.

박채서가 성공적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북한 쪽 첩보도 잘 얻어왔지만,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한 쪽 정보도 과감하게 넘겨줬다. 기자나 야당 정치인들과도 은밀히 만나 고급 정보를 제공하면서 별도의 인맥을 구축해뒀다.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이성이나 금전, 술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결백했다고 이정훈의 <공작>은 말한다. 영화에서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97년까지는 그랬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동력이 돼 1997년, 그의 나이 43세 때 공작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 흑금성 박채서(황정민 분). ⓒ (주)영화사 월광


1997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시점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던 보수 정권이 대통령선거에 최초로 패배한 해다. 보수 여당인 신한국당의 대선 승리를 위해 안기부가 이른바 북풍 공작을 벌였지만, IMF 경제위기로 인한 민심이반과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대로 인한 충청권의 야당 가세 등이 원인이 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이 해에는 북풍(北風)이 유난히 많았다. 북풍이란 용어는 1996년 4·11 총선 직전에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벌인 무력시위가 신한국당한테 유리하게 작용한 일을 계기로 등장했다. 이 북풍이란 용어에 들어맞는 사건들이 1997년 한 해 동안 여러 번 벌어졌다.

주체사상 이론가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그 해 2월 망명해 김정일 정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8월에는 야당인 국민회의 고문인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최고책임자)이 월북했다. 신한국당 정권과 안기부는 이런 상황을 김대중 낙선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거기다가 대선 직전에는 남한이 북한 측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같은 북풍들은 국민회의 대선 후보인 김대중이 당선된 뒤로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됐고, 그에 맞서 안기부 지도부는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맞불 작전을 펼쳤다. 국민회의 측의 대북 접촉을 언론을 통해 흘려보낸 것이다.

이것이 박채서에게 악재가 됐다. 안기부의 문건 공개로 인해 공작원 흑금성의 존재가 공개되고, 박채서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흑금성과 그를 연관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998년 3월 18일자 <한겨레>는 "단독 입수한 안기부의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자료에 따르면, '공작원을 베이징에 파견해 북쪽의 대선 관련 공작 기도를 유도'한다고 돼 있어 안기부가 북한 공작을 적극 주도했음을 보여준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이 자료는 특히 안기부가 북한에 위장 포섭돼 활동 중인 특수공작원 흑금성이 지난해 5월 밀입북해 받은 지령을 따르는 형식으로 97년 9월께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 진영에 침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흑금성이 김대중·이인제 진영의 대북 접촉을 도왔다는 언론보도는 박채서가 추진하던 광고 사업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A에서 Z까지 갔던 사업이 도로 A로 반정(反正)된 것이다.

▲ 흑금성의 북한측 파트너 리명운(이성민 분). ⓒ (주)영화사 월광


영화 <공작>과 실제의 공작

영화 <공작>에서는 흑금성이 평양에 들어간 직후에 한국 언론에서 보도가 나왔다고 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체포될 위험에 빠진 흑금성이 대외경제처장 리명운(이성민 분)의 도움으로 북한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1998년 4월 2일 <시사저널> 기사를 썼던 김당 기자는 "그는 아자 광고팀과 함께 올 3월 말쯤 방북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6년 11월부터 흑금성을 알고 지냈으며, 흑금성의 방북 일정은 그의 신분이 노출된 날로부터 13일 뒤로 잡혀져 있었다는 것이다.

신분이 공개된 뒤 박채서는 이중간첩 혐의를 받았다. 북한에 들어가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살기 힘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시사저널> 기사가 그를 살렸다. 당시 언론들은 국민회의가 연이은 북풍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승리한 요인 중 하나로 국민회의 북풍 대책팀의 정보력을 꼽고 있었다. <시사저널> 기사는 국민회의가 그런 정보력을 갖게 된 비결로 박채서를 거론했다.

"국민회의가 북풍 대책팀을 구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흑금성의 제보였다. 흑금성이 김우중 회장의 방북 사실과 오익제 편지를 비롯한 일련의 평양발 편지 공세 및 비디오테이프 공세 그리고 정재문 의원(북한에 북풍 요청하면서 360만불 제공)의 대북 접촉 사실 등을 미리 예보함으로써 북풍 대책팀이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보도를 계기로 박채서는 김대중 정권 탄생의 공신으로 재탄생했다. 박채서는 김대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에 기여한 사람이 됐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1998년 5월 22일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박채서는) 안기부의 4급 상당 공작원이다"라고 확인해줌으로써 박채서는 이중간첩 혐의를 벗게 됐다.

▲ 20여년 동안 직업군인과 대북 특수공작원(암호명 흑금성)으로 일했지만, 북한에 국군 작전계획을 넘긴 혐의(국가보안법 상 간첩)로 기소돼 징역 6년형을 받은 박채서씨가 2016년 5월 31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 박채서씨는 31일 오전 출소한 뒤 기자들과 만나 "진실은 감출 수 없고 국민은 알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이종호


공작원 세계에서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1998년 봄에 지옥으로 곤두박질한 뒤 극적으로 회생한 박채서는 이런 끔찍한 경험을 겪고도 별로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광고회사는 1998년 그해에 정부를 상대로 77억 원의 손해배상소송까지 제기했다. 안기부가 흑금성의 존재를 공개하는 바람에 대북사업이 무산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원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반정(反正)을 이런 방식으로도 벌였던 것이다.

박채서는 대북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2003~2008년) 때는 한미연합군 전시작전계획인 '작전계획 5027'의 대강을 베이징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넘겨줬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권 때인 2010년 실형을 선고받고 6년 만에 석방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영화 <공작>도 담지 못했다. 2시간짜리 영화로는 다 담기 힘들 정도로 그는 유감없이 공작원 생활을 경험했다. 어쩌면 '유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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