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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션샤인' 이병헌이 돌려준 고종황제 비자금? 실제로는...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사극 <미스터 션샤인> 6번째 이야기

등록|2018.08.12 18:17 수정|2018.08.13 15:51

▲ <미스터 션샤인>. ⓒ tvN


tvN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고종황제 비자금이 초반부터 쟁점이 됐다. 극 중 고종(이승준 분)의 외국은행 예치증서의 행방을 둘러싼 국제적 신경전이 첨예하게 전개됐다. 그러다 조선계 미국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문서의 소재지를 알게 됐다. 성조기보다 핏줄에 이끌린 유진 초이는 고종 측에 귀띔을 해줬다. 이로써 고종이 되찾으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이 증서는 한동안, 영문도 모른 채 주인의 명령으로 받아든 소녀 하인의 수중에 있었다. 이 소녀와 알고 지내던 조선계 일본 무사 구동매(유인석 분)는 뒤늦게 사실을 확인하고 배신감을 느꼈는지, 소녀에게 증서만큼의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구동매의 협박을 목격한 고애신(김태리 분)이 자기가 대신 처리하겠노라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고종한테는 일본 엔화로 예치된 외국은행 비자금이 있었다. 고종은 독일공사관의 주선으로 1903년 12월과 1904년 초의 2차례에 걸쳐, 금괴 23개를 포함한 24만 2500엔(51만 마르크)의 내탕금(임금의 개인 자금)을 상하이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예치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독일을 덕(德)으로 표기했다. 화(華)는 중국을 지칭한다. 덕화은행은 최종적으로 오늘날의 도이치은행에 흡수됐다. 덕화은행장이 작성한 1903년 12월 2일자 1차 예치금 영수증에는 "이 예치금은 황제 폐하의 지시에 의해서만 처분된다"고 기록됐다.

▲ 덕화은행장이 써준 1903년 12월 2일자 1차 예치금 영수증. 김동진의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에 실린 사진. ⓒ 저작권자 없음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예치증서가 고종의 통제를 벗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중에 이를 둘러싼 국제적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됐다. 조선계 일본 무사인 구동매(유인석 분)도 이 쟁탈전에 가담했다. 그러다 결국 유진 초이 덕분에 고종한테 되돌아갔다고 이 드라마는 스토리를 이어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이 증서는 1909년 10월 20일까지는 고종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다 '고종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한테 옮겨졌다. 다른 사람은 심장만큼은 한민족이지만 눈동자는 파란 사람이었다. 미국인 출신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가 바로 그다.

스물세 살 때인 1886년 원어민 영어교사로 방한한 뒤 고종과 인연을 맺은 헐버트는, 이 낯선 땅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체험하는 사이에 조선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분개한 나머지 항일운동가로 변신하게 됐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이후로 일본인한테 땅을 빼앗기는 조선인들이 많아지자, 헐버트는 그 땅을 찾아주고자 발 벗고 나섰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사조약, 외교권 강탈)을 저지하고자 고종의 특사가 돼 미국 정부를 방문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무대로 일본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 호머 헐버트. ⓒ 퍼블릭 도메인


이 정도로 믿음직했기에 고종이 예치증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07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뒤로 일본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헐버트를 궁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09년 10월에 2단계 비밀작전을 통해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조카뻘인 조남승이 동원됐다. 조남승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사위, 조정구의 장남이다.

이 비밀작전이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 대표 및 제이피모간체이스은행 한국 회장 등을 지낸 국제금융인이자, 헐버트 전문가로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을 맡은 김동진의 헐버트 전기에 묘사돼 있다. 책 제목은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다.

"고종 황제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궁궐의 한 무수리로 하여금 그 서류들을 치마 속에 숨겨 궁을 빠져나가게 해 조남승을 통해 헐버트에게 전달했다." 


▲ 헐버트에게 예치금 인출을 맡기는 1909년 10월 20일자 고종황제의 위임장.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에 실린 사진. ⓒ 저작권자 없음


고종은 비자금을 찾아 미국 은행에 넣어두라고 헐버트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헐버트는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런데 거기서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덕화은행에 가보니 통장 잔고가 0이었다. 고종이 모르는 새, 모조리 인출돼 버렸던 것이다. 인출된 시점은 전년도인 1908년이었다.

그 예금은 고종황제의 명령에 의해서만 인출될 수 있었다. 고종의 명령을 조작해 돈을 인출해간 사람이 있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그 주인공이다. 이윤용의 동생이 바로 이완용이다. 이윤용 역시 훗날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에게 돈을 빼오라고 지시한 사람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다.

국제금융인인 김동진은 위 책에서 그 비자금이 대한제국 1년 총세입의 1.5%에 상당할 거라고 추정했다. 최근 4년간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1년 세입 총액이 400조원 내외였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재정 규모는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1년 세입의 1.5%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런 거액이 이완용의 형에 의해 불법 인출돼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는 예치금 상당액을 소녀한테 요구하고, 고애신은 자기가 갚아주겠노라고 나섰다. 그 금액이 대한제국 1년 예산의 1.5%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드라마 속 인물들이 그런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은 사라졌지만,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예치금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고종의 명령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1919년에 고종이 죽은 뒤에도 예치금을 찾기 위한 헐버트의 노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1922년에는 이승만과 프린스턴대학 동창인 킴버랜드라는 인물을 통해 거물급 변호사인 윌콕스와 접촉했다. 윌콕스는 대통령선거 때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헐버트는 킴버랜드에게 예치증서를 위탁하고 법적 해결을 부탁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헐버트는 예치금 때문에 분투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난관에 직면했다. 예치증서를 보관한 킴버랜드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오랫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헐버트는 예치증서 반환을 요구했다. 뜻밖에도 킴버랜드는 거절했다. 이 때문에 헐버트는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서 킴버랜드와 난투극까지 벌였다. 1942년의 일이다. 헐버트의 나이 79세 때였다. 80이 다 된 나이에 고종의 명령을 지킨다며 난투극까지 벌인 것이다.

그런 소동까지 벌였건만, 킴버랜드는 절대로 내놓지 않았다. 잘 보관하고 있다며 "최근에 이승만 부부랑 저녁식사를 했다"는 말로 헐버트를 누르려 했다. 공금 문제로 말썽이 많았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뒤에도 여전히 대통령 행세를 하는 이승만을 거론하면서 증서 반환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 상태로 헐버트는 1945년 해방을 맞이했고, 이번에는 이승만한테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 헐버트한테는 킴버랜드에게 넘긴 서류 말고도 관련 문건이 더 있었다. 덕화은행이 고종으로부터 예금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영수증, 일본측이 독일 정부에 예금 인출을 요청하는 서한, 자신이 킴버랜드로부터 받은 서한 등이 있었다. 헐버트는 이 문서들을 변호사를 통해 이승만 측에 넘겼다.

이 서류들을 모두 넘긴 뒤 헐버트는 1949년 8월 5일 눈을 감았다. 만약 몇 년 더 살았다면, 그는 훨씬 더 분통 터지는 상황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킴버랜드보다는 이승만이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머지 서류를 그쪽에 넘겼을 것이다. 좀 더 살았다면 이승만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주미대사에게 비자금 문제 조사를 지시하는 1951년 11월 15일자 외무장관의 공문.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에 실린 사진. ⓒ 대한민국


서류를 인수한 이승만은 비자금 환수 작업에 착수했다. 외무부, 주미대사관, 재정부가 동원됐다. 그런데 그 뒤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비자금을 찾지 못했다면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기록이 없다. 환수 작업에 착수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사건이 오리무중이 돼버린 것이다. 김동진은 이렇게 말한다.

"필자는 정부 문서를 구석구석 뒤져봤으나 내탕금 문제에 관한 우리 정부의 후속 조치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위의 책에서.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유진 초이의 동포애 덕분에 비자금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됐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 측이 비자금을 가로챘을 뿐 아니라, 그 뒤 비자금 환수에 나선 사람들마저 모호한 행동으로 일관했다. 예치증서를 손에 넣은 킴버랜드는 시간을 질질 끌며 증서마저 반환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해방 뒤에 서류 일부를 확보한 이승만은 국가기관을 동원해 문제 해결에 착수했지만, 12년간 재임하며 반일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그 결과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이 문제는 자연스레 잠잠해지고 말았다.

▲ 헐버트의 묘비. 서울시 마포구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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