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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연결돼야 잘 늙는다' 오키나와 마을의 교훈

[치매라도 괜찮아 ②] 책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읽고

등록|2018.08.19 20:53 수정|2018.08.19 20:53
할머니가 하루 종일 멍하게 앉아 계신다. 말수도 눈에 띄게 적어지고 움직임도 거의 없으시다. 우스운 장면을 봐도 웃지 않고 짓궂은 농담에도 무반응이다. 매일 어르신을 모시는 우리 주간보호센터 케어 종사자들은 걱정이 한가득이다.

어르신이 처음 주간보호에 오셨을 때만 해도 유쾌하고 말씀이 많았다. 치매로 인한 기억력 장애 때문에 조금 전에 했던 말이나 행동을 잊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다른 어르신들과 잘 어울리실 정도로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눈빛이 퀭하고 비어 있는 느낌... 할머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반응과 무감동, 우울감은 치매 어르신이 보이는 정신행동증상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치매 어르신들은 치매 초기 기억력 장애를 겪는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거나 직접 했던 행동들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면 움츠러들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될수록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불안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듯한 슬픔과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치매 어르신들이 자신의 상태를 편안하게 수용하고 심리적,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울감이 깊어질수록 자존감은 떨어지고 점점 현실세계와 단절된다. 감정변화가 거의 없고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없어지며 만사를 귀찮아한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하는 것이 전부인 무감동 증상은 현실세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단절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동경대 의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인지증 환자 연구에 몰두해온 의사 오이 겐은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책에서 "연결의 상실이 인지증 환자에게 '불안'이라는 근원적 정동(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을 일으킨다"며 "인지증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세계'라고 믿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각자의 세계를 자신의 기억에 따라 창조하고 거기서 의미와 조화를 찾는 경우도 많다"(9쪽)고 설명한다.

주위 세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 나와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치매로 인한 지남력(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능력) 상실과 인지능력 저하는 환경과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현실 세계라고 인식하는 환경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들은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그들의 의식이 창조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환경을 그녀는 공유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지금 자신이 놓인 환경은 기본적으로는 과거에 살던 곳으로 보이는 듯하다...(중략)...어수선하고 어딘가 이상한 환경에서 불안한 '나'는 그립고 잘 알던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현재와 연결은 있지만 없는 것과 같고, 과거와 연결이 강해진다.

...(중략)...그녀는 연결이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세계를 창조해서 적응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이 발견한 근본원칙은 '지각은 기대에 따라 조정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불안 없이 살아가기 위해, 세계가 어떻게 보이든 본인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기억력 상실로 현재와 연결이 끊어진 경우, 과거 세계가 현재의 '나'로서는 살아가기가 편하다." (163쪽)


미국의 신경생리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스티븐 코슬린(Stephen Kosslyn)은 "사람들은 바깥 세계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이 현실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보고 듣고 만지는 지각을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립한다"고 했다.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이란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의미'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금시계를 시계로 인지하는 것은 그 물건이 시간을 가르쳐준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계라는 물건의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금시계를 본다면 그저 반짝거리는 금속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기억력,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저하되면 현실 생활을 꾸려가는 것이 점차 어려워진다. 무리하게 '현실'에 매달리게 되면 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강한 불안이 발생한다. 끊임없이 재촉당하고, 실수나 실패를 비난받고 조롱당한다고 느끼는, 정황과 단절된 '내향'적 세계가 거기에 있다. 뇌를 지각하는 것을 (평화적인) 과거의 경험에 따라 구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현실'은 '사물'이 아니라 '의미'라는 점이다." (114쪽)

누구나 각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 세계의 의미는 각자 다르다. 저자는 "인지능력이 저하된 사람은 바깥 세계의 현실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현실세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113쪽)고 설명한다.

무감동 증상을 보이는 어르신의 흥미를 유발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나이 마흔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시부모를 모시며 아이들을 키워온 어르신의 깊은 외로움과 상실감이었다. 젊어서는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식구들을 건사했으나, 장성한 아이들이 다 떠나고 늙고 병든 자신만이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어르신이 먼 과거의 일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이야기하실 때마다, 우리는 '어르신이 그 시절을 정말 그리워하고 있구나'라고 짐작한다.

안정된 노후를 보내는 법
"오키나와 사시키 마을의 65세 이상 노인 708명 가운데 노인성 치매는 27명(4%)이었다. 이는 도쿄의 유병률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우울증, 망상, 환각, 야간섬망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도쿄에서는 치매 노인의 20%가 야간섬망을 보였고 절반정도가 주변 증상이 있다.

사시키는 경로사상이 강하게 보존되어 있고 실제로 노인들이 정성스러운 간호와 존중을 받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노인은 정신적 갈등이 없고, 설령 뇌의 기질적 변화가 생겼더라도 우울증, 환각, 망상이 발생하지 않는 순수치매에 그치는 것이다." (44쪽)


저자는 "노년기는 이른바 길게 늘어진 회색 지대로 '질환'이라 생각하면 '질환', '건강'하다 생각하면 '건강'한 심리현상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고(179쪽) 설명한다. 치매는 발병의 원인과 치료가 분명한 질병이라기 보다는 인지능력이 저하된 상태에 가깝다. 저자는 치매를 연결이 상실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노화에 따른 기능저하에도 불구하고 가족, 이웃, 지역사회와 잘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면 안정된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시키 마을처럼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지능력이 저하된 고령자의 '잘 연결됨'이란, ▲ 주위에서 항상 연장자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 ▲ 느긋한 시간을 공유할 것 ▲ 그들의 인지능력을 시험하지 않을 것 4>좋아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을 격려할 것 ▲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정동적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할 것"(181쪽) 등으로 형성된다.

살던 곳에서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과 격리되지 않고 지역사회의 보호속에서 치매 어르신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결이 곧 치유다.
덧붙이는 글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오이 겐 지음, 안상현 옮김 / 윤출판 펴냄 / 2013.12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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