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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펭귄들... 누나는 왜 콜라캔을 던질까?

일본 작가 모리미 토미히코의 새 영화 <펭귄 하이웨이>

등록|2018.08.17 14:14 수정|2018.08.17 14:14

▲ 영화 <펭귄 하이웨이>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일본의 문학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은 현재 한두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에 정식으로 발간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모리미 토미히코는 한국 사람에게도 인기가 많다. 한국에서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은 언제나 품절 행렬을 이어왔고, 지금도 중고로만 구할 수 있는 게 다수다. 물론 일본 소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건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다. 국내 문학계에는 일본 소설이 늘 상당한 인기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리미 토미히코를 '일본 소설'이라는 범주로 통틀어 부르기에는 조금 아쉽다. 바꾸어 말하면, 모리미 토미히코가 인기 있는 것은 단지 일본소설이라는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모리미 토미히코는 여느 일본 소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그를 찾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스타일

사람들이 모리미 (이하 축약)를 언급할 때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 것은 바로 '문체'다. 이른바 '의고체'라고 불리는 이 문체는 옛스러운 말투를 가져와 장난스럽게 쓴다는 점이 매력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친구에게 "밤새 안녕하셨사옵니까?"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사용하면 소소한 웃음을 줄 것이다. 그런데 모리미의 주인공은 이러한 말투를 '늘' 사용한다. 그들은 보통 대학 새내기 남자이고, 짝사랑의 비애와 젊음의 허세가 합쳐져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이를 테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나'와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나'는 이제 막 대학교에 올라온 신입생이자 '검은 머리 그녀'를 사랑하는 중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상은 의고체를 사용한 내면의 독백으로 독자에게 줄곧 전해진다. 독자가 보기에는 그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나'는 독자의 존재를 알 리가 없으므로 주절주절 독백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 점, 지질하지만 연민이 가는 청춘의 생각을 엿본다는 점에서 모리미의 작품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대학생활을 다루는 건 아니다. <펭귄 하이웨이>나 <유정천 가족>과 같은 작품은 '대학 소설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자연스럽게 의고체의 사용이 사라졌으나, 그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교토'만은 남는다. 그리고 이러한 교토라는 공간은 그의 인물들이 한 데 모이는 계기가 된다. 특정 인물이 다른 작품에서 조연으로 나오거나, 특정 장소가 다른 작품에서도 나오는 방식이다.

모리미 토미히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세계

▲ 영화 <펭귄 하이웨이>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그러나 모리미는 문학 팬들에게만 인기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 중 다수가 '영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영상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다. 소설 원작은 '실사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대부분인데 영상화 된 그의 작품은 모두 '애니메이션'이다.

모리미는 두 개 애니메이션 영화와 두 개 TV 애니메이션의 원작 작가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지난 3월 국내 개봉했으며, <펭귄 하이웨이>는 오는 10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또한 TV 애니메이션인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와 <유정천 가족>은 국내에도 마니아 층을 형성했다. 왜 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만 만들어졌을까.

그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답변은 아마도 '실사영화가 그의 소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일본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화됐을 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 부분이 모리미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만들지도 않고 결론부터 내리는 건 성급한 일일 수 있다. 영화는 감독의 재량에 달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성급함을 덮을 수 있는 나름의 근거가 이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모리미의 소설이 자기만의 세계를 갖기 때문이다.

모리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실 의고체가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 중점으로 떠오르는 건 바로 '세계'다. 그 세계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내면의 상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이상한 곳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에게만 이상한 곳이다. 작중 인물들에게는 그 이상함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분명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문학 사조에 대해서는 부가 설명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간에 사실관계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모리미의 작품을 보는 우리는 부차적인 설명 없이도 몇몇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 이를테면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단어에서 방점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마술적'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용어가 다루는 세계는 사실적인 것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곳에 묘사된 사실들, <유정천 가족>에서 너구리와 텐구가 인간으로 둔갑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 모습이 무언가를 빗댄다거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지는 않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그대로 '마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술적'이라는 단어는 경이나 놀라움의 상징으로 쓰이는 게 아니다. 그저, 작가의 내면세계를 외부 세계의 일원으로 자연스레 편입하는 방식일 뿐이다. 바로 그래서 모리미의 소설은 영화화될 수가 없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서 주인공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지만 전차에서 풍류를 즐기는 노인 '이백'에게 팬티를 빼앗겨 거리에 내쫓기기도 하고, 그가 벌이는 '불같이 매운맛 전골 먹기 대회'에 참가해 짝사랑하는 소녀의 옛 애장품을 되찾아 오기도 한다. 그것도 본인의 힘이 아니라 '낡은 책의 신'이라는 어느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이 소설이 단순히 청춘예찬에만 머물지 않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술 그리고 사실주의


▲ 영화 <펭귄 하이웨이>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모리미는 <펭귄 하이웨이>를 집필하고 인터뷰에 지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를 무척 좋아해서, 이 소설이 무척 아름답게 건축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경계선을 그려보려 했습니다. (후략) "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나 소설로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로 만든 <솔라리스>에서 '솔라리스'라는 행성은 접근하는 사람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구현하는데, 작중 인물들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눈앞에 구현된 '사람'이 진짜인지를 따져 묻는다. 즉,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중요한 건 본질이 아니라 눈앞의 현상이다. 바꾸어 말하면 대의 같은 것보다 개인의 내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작가가 밝힌 것처럼 <펭귄 하이웨이> 또한 대략 그런 흐름을 따라간다.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4학년생 아오야마 유우(키타 카나 분)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펭귄들이 나타난 것을 목격한다. 여기가 남극도 아니고 주변에 동물원도 없는데 그 펭귄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궁금해하던 유우는 불현듯 잘 알던 누나가 던진 콜라 캔이 펭귄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하여 이 호기심 많은 꼬마는 온갖 상상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탐구를 진행하고, 펭귄과 단서와 누나라는 세 가지 사실들을 엮어가며 나름의 해답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모리미의 세계에서 행동의 앞뒤 관계를 구구절절하게 따져 묻는 것은 그다지 합당하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에 호기심을 품은 이가 있고, 우리는 그 호기심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보며 초롱초롱한 눈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콜라 캔이 펭귄으로 변하는 것보단 펭귄이 귀엽다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완성된다. 단서 하나에서도 소소한 의미를 찾아내는 우리는 그 마술에서 항상 삶의 의미를 찾고는 하지만, 그냥 느끼는 대로 보는 것도 좋은 관람법일 테다. 모리미 토미히코 원작의 <펭귄 하이웨이>는 오는 10월에 국내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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