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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미안해' 엄마의 뒤늦은 고해성사

전쟁 같던 워킹맘의 삶... '동지'가 되어준 딸에게

등록|2018.08.31 14:42 수정|2018.08.31 15:20

▲ ⓒ unsplash


미국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는 딸하고는 하루걸러 한 번 정도 스마트폰 메신저로 자주 연락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아침에 걸려온 전화 내용은 다른 때 소소하게 나누었던 일상 대화와 달랐다.

"엄마, 책을 읽다가 많이 울었어요. 너무 많이 우니까 스서방(성이 Spivy)이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여주인공의 불행한 유년시절과 제 어린 시절이 겹치면서 감정 조절이 안돼요. 행복하지 못했던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요."

가슴이 쾅하고 내려앉는다. 여전히 흐느끼면서 말하는 딸아이 앞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행복한 기억을 너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정말 그랬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면 직장생활과 육아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 비해 상황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자들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잘하기는 여전히 녹록지 않다.

결혼하자마자 큰애가 계획 없이 덜컹 찾아왔다. 전쟁 같은 삶이 시작됐다. 여주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주말이면 남편이 있는 서울 잠실로 올라오곤 했다. 남편 와이셔츠 일곱 개를 다림질하고, 밑반찬과 국을 끓여 놓는 일로 주말을 보내곤 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고속버스 첫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고 또 뛰었다. 추운 겨울에 정신없이 뛰다가 차량 방지 턱에 넘어져서 둥글게 부른 배를 안고 나뒹군 적도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첫째 예근이는 고달팠다.

뱃속부터 고달팠던 내 아이

예근이가 태어난 후 나도 인천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주말부부 생활을 접을 수 있었다. 또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예근이를 돌봐주던 할머니가 계신 덕분에 약 3년 정도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가신 후 예근이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다.

예근이 보다 두세 살 많은 아들을 둔 젊은 엄마에게 맡겼던 적이 있었다. 아침에 아이를 맡기러 가면 예근이를 맞이하는 첫 인사가 그 집 아이의 냉대였다.

"너 우리 집에 왜 와. (너희 집에) 가."

심지어는 골방에 아이를 가두고, 짜장면을 시켜서 다 먹고 난 다음 찌꺼기를 먹게 하고, 베란다에 금을 그어 놓은 채 넘지 못하게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여자에게 아이를 맡긴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죽을 듯이 울어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소아 스트레스라고 했다. 머리가 동그랗게 빠지는 원형탈모 증세까지 왔으니 네 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고단했나 싶다.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하 어린이집에 예근이를 맡긴 적도 있다. 신문과 TV뉴스에서는 사흘도리로 열악한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사건을 전했다. 그 당시에는 화재, 연탄가스사고 등으로 어린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잇따랐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는 오후 늦게까지 맡긴 적이 있었다. 아침에는 예근이와 동갑내기 딸을 둔 원장선생님 댁에 맡겼다. 원장선생님 딸은 텃세가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장선생님인 엄마의 관심이 다른 아이에게 분산되는 것이 몹시도 싫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예근이는 원장선생님 집에 맡겨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게 됐다. 구두를 신고, 현관에서 늦었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식탁에 앉아서 느리게, 느리게 밥 먹는 것이 예근이의 유일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네 살 터울로 둘째가 태어났다. 결혼생활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우울증이지 싶다. 부천에서 압구정동까지 출퇴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나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사의 역할 분담이라는 사고 자체를 완벽하게 갖지 않았던 철없는 남편이었다. 아파트 바로 앞 동에 친정 부모님이 살고 계셨지만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 앞에서 난 늘 악착같이 당당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생활, 육아, 가사는 온전히 내 몫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능력 있는 선생님, 집에서는 흐트러짐 없는 살림꾼으로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집안의 먼지를 털고 닦아 냈다. 책 한 줄 볼 수 없으면서도 대학교 때 교재였던 두꺼운 영문학사 원서를 항상 식탁 위에 올려놓고 살았다. 늘 주문을 외우고 살았다.

'언젠가는 저 책을 읽어야지.'

둘째는 유독 말이 느렸고, 침을 많이 흘렸고, 자주 아팠다. 두 살 정도 될 때까지 아빠, 엄마를 못했다. 변기에 앉아서 볼 일을 보고 있는 현근이에게 "아~빠, 엄~마" 하면서 현근이 말문을 틔우려고 애쓰던 남편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언어발달이 늦으면 두뇌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는 기사에서부터 자폐아를 소재로 한 TV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눈을 뜨고 보면 온 천지가 자폐아로 고통 받는 부모들의 이야기였다.

웃을 줄 모르던 엄마

내외적으로 혼돈스러운 삶을 메꾸듯이 살아가는 나는 예근이의 내적인 외로움과 심리적 변화를 눈여겨 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충분히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을 가졌다.

예근이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산만했고 매사에 겉돌았다. 현관에 똑바로 놓여 있지 않은 아이 신발을 보면 분노가 솟구쳤다. 어쩌다 검사하는 예근이의 가방 속엔 책은 거의 없고 인형이 그려져 있는 낙서장만 구깃구깃 처박혀 있었다. 수학문제집의 절반은 책꽂이 뒤쪽에 몰래 버려져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아이에게 매를 대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고 호령치고, 성에 차지 않으면 매를 대고, 이런 악다구니는 거의 매일 반복됐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근이가 달려와서 온몸으로 제 누나를 감쌌다.

"우~ 우~ 하지 마."

말도 못하면서 분노에 차서 나를 쳐다보던 현근이 모습에 와락 정신이 돌아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주말이면 남편과 전쟁이었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성격은 파탄나기 시작했다. 산산조각이 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 이상의 것이었다.

"한난옥 선생님이 웃었다." "와~ " "한난옥 선생님이 더 웃을 수 있도록 그 농담 조금만 더 해봐요."
"어머~ 선생님도 서울에 만날 친구가 있어요?"


학교-집, 학교-집 쳇바퀴 돌듯이 살았던 나에게 동료 선생님들이 툭 던진 말이었다.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이었다.

예근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몸도, 정신도 지나치게 성숙했다.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경을 시작했다. 언니처럼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줬다. 또 집에 오면 현근이 보육선생님 역할을 했다. 나는 한 번도 예근이 초등학교 운동회, 소풍을 참여해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점심 도시락을 본인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서 싸가지고 갔다.

"예근이 얼굴이 어두워 보여요."

명절에 만났던 시누이 말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어둡긴~뭐가~"

2000년 말에 유학을 결심하고 난 후 아이들도 미국에 데리고 가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수속절차를 밝을 때였다. 그때 예근이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예근이가 미국을 가기 전, 외할머니한테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할머니, 저는 미국에 가는 것이 싫다기보다 걱정이에요. 아빠도 없는 미국에서 엄마하고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소소한 일들이 미국에서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터무니없이 전기요금이 두 배로 나오고, 아파트에 벼룩이 생겨서 현근이 등이 술떡처럼 부풀었고, 한겨울에 싱크대 배관이 막혀서 넘친 오물이 카펫을 다 적셔서 난리가 났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예근이가 옆에 있었고 힘이 되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 중의 하나가 운전이었다. 한국에서 운전을 한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낯선 미국에서 운전하는 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그런데 옆자리에 예근이를 앉히고 운전을 하면 마음이 안심이 되고 편해졌다. 그 당시에 예근이는 나에게 의논의 대상자며, 어려움을 같이 넘어가는 동지였다.

이해하고 도와준 딸이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 그날의 대화가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늦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고, 블라인드 사이로 깊게 햇살이 스며들어왔고, 아파트 단지 내 수영장이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그날 난 예근이에게 진심을 다해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빌었다. 이해를 구하고 청했다.

엄마는 견딜 수 없이 고달팠노라고. 우리 집에 정상적인 사람은 유일하게 너밖에 없었다고. 아빠는 철이 없었고, 이해자도 조력자도 되지 못했다고. 현근이는 말이 느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아팠고 엄마는 너무 지쳐 갔다고. 너에게 모질게 소리 지르고, 때리고, 이건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엄마, 엄마가 울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 마음이 더 아파요."

방언을 터트리는 사람처럼, 끝도 닿지는 않는 캄캄한 우물 속에서 물이 넘쳐흐르듯 참 많이 울었다. 예근이도 나도.

한동안 부모의 폭력에 관한 뉴스만 나오면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하던 나였다. 죄책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예근이에게 너무 늦지 않게 사과를 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예근이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서로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서른이 이제 훅 넘은 딸도 아직 이따금씩 어린 시절의 상처가 욱신거리면서 아플 때가 있는가보다. 내 마음처럼. 나의 아픈 경험과 부끄러운 고백은 학생들, 학부모, 동료 선생님들에게 상담 치료약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생채기를 냈던 그 상처는 부모만이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을!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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