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응답한 헌재, 너무 늦은 절반의 정의
과거사 사건에서 일부 위헌 결정... 대법원 긴급조치 판결은 그대로 인정
▲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고 있다. ⓒ 권우성
▲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앞에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사단법인긴급조치사람들 회원들이 ‘긴급조치 등 과거사 관련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헌법재판소(소장 이진성 재판관)가 과거사 피해자들의 호소에 마침내 응답했다. 그러나 결과는 양승태 대법원의 법 왜곡을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절반의 정의였다. 이마저도 시간과 싸우는 과거사 피해자들에겐 '지연된 정의'였다.
헌재는 30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심판정에서 과거사 관련 3가지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13년 '양승태 대법원'이 과거사 피해자들이 청구한 각종 손해배상 사건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원고 패소가 잇따랐다.
두 가지 정의
이날 헌재가 바로잡은 첫 번째 정의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 제18조 제2항에서 일부 위헌을 선고한 부분이다. "이 법에 의한 보상금 등의 지급결정은 신청인이 동의한 때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에 대하여 민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한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라고 규정한 이 조항은 '양승태 대법원'에서 과거사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도 국가에 정신적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았었다. 이미 돈을 받아 둘 사이에 화해가 성립했으니 더 이상 청구하지 말라는 논리였다.
2015년 1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고영한 대법관)가 내린 이 판단은 퇴행적이었다. 법적으로 엄연히 다른 의미인 '보상'과 '배상'을 구분 짓지 않았다. 보상은 국가의 합법행위로 인한 피해를, 배상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를 보전하는 개념이다.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 사건은 법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피해자 입장에서도 억울함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둘 사이 차이를 '퉁'쳐 버렸다. "다수 의견은 정의의 관념에 분명히 배치된다"라는 소수의견이 판결문에 등장한 이유다.
헌재는 7대2의 의견으로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에 해당한다"라고 결정했다. 적절한 배·보상이 이뤄졌음을 전제로 국가배상청구권 행사를 제한하려 한 민주화보상법의 입법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고,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를 규정한 헌법 제10조 제2문의 취지와도 배치된다는 판단이었다. 다수의 재판관들은 "해당 조항 중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관련자와 유족의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한다"라고 했다.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결정은 과거사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은 그 특성을 고려해 특별히 취급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날 헌재는 6대 3의 의견으로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 조작의혹 사건에는 민법 제166조 제1항, 제766조 제2항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일부 위헌 결정을 했다. 해당 법은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시작점을 '불법행위를 한 날'로 규정(객관적 기산점)한 조항이다. 각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안에 청구하도록 정했다.
문제는 이를 그대로 과거사 사건 피해자에게 적용했을 때다. 국가 기관이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했고, 보통 수십 년 후에야 진실이 밝혀지는 과거사 사건에서 이런 소멸시효는 터무니 없는 규정이었다. 또 '보안관찰' 등으로 오랫동안 국가의 감시에 시달려온 피해자들이 그 즉시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다수 재판관들 역시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 불법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했음에도 그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가해자 보호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것"이라며 "입법형성의 한계를 일탈해 청구인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한다"라고 지적했다.
▲ 이진성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하고 있다. ⓒ 권우성
하나의 부정의
전향적 결정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날 헌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등이 청구한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 중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부분과 긴급조치 제1호 및 제9호 발령행위 등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대법원 판결들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는 7대2 의견으로 각각 기각, 각하했다.
사건은 2015년 3월 26일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가 내놓은 판결 하나로부터 비롯됐다. 당시 대법원은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 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긴급조치가 이미 위헌으로 결정됐음에도 이를 발동한 국가의 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은 문제적 판결이었다. 긴급조치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백 소장은 이 판례가 근거가 돼 관련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후 백 소장 등 긴급조치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도 국가배상소송에서 패소한 피해자들은 헌재에 두 가지 판단을 요청했다. 법원의 재판은 헌법재판소의 심판 대상에서 제외한 헌법재판소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되며 대법원의 문제적 판결들 역시 위헌적 판결이니 재판을 취소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날 다수의 재판관들은 "이 사건 대법원 판결들에서 긴급조치 발령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것은 긴급조치가 합헌이기 때문이 아니라 긴급조치가 위헌임에도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해석론에 따른 것"이라며 "대법원 판결들은 예외적으로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심판청구는 부적합하다"고 결론 냈다. 김이수, 안창호 재판관만이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의 기속력에 반하여 판결했다"라면서 "재판이 취소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앞에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사단법인긴급조치사람들 회원들이 ‘긴급조치 등 과거사 관련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헌재에서도 길 잃은 피해자들... "국회로 가겠다"
이날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헌재 결정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대현 긴급조치사람들 법률대책위원장은 "오늘 헌재는 전향적인 듯하다가 마지막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기존의 판단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을 내렸다"라면서 "헌재마저 피해자들이 기대할 근거를 잃었고, 이제는 국회에 발의된 특별법을 통해 해결을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라고 평했다.
송상교 민변 사무처장은 "특히 긴급조치를 이미 위헌이라고 판단하고도, 위헌이지만 그로 인한 피해자에 대해서 배상해줄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고, 헌재 역시 그대로 인정해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면서 "최고 사법 기관들은 많은 세월 고통 받은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문제에서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청구 4년 반 만에 결정을 내려 정의를 지연시켰다는 지적도 나왔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이 만든 인권단체 '진실의 힘'은 결정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피해자들의 오랜 분투에 응답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환영한다"라면서도 "피해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4년 반이나 흐른 뒤에야 나온 이 결정을 앞에 놓고 피해자들은 기쁘다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